번뇌와 유루 (3) 번뇌와 서로 따르는 네 종류의 사람
어느 때 존자 샤아리푸트라와 존자 모옥갈라아나는 자아자그리하의 카란다 대나무 동산에 있었다. 그때에 샤아리푸트라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어떤 것이 네 종류인가. 이른바 첫째 사람은 번뇌와 서로 따르면서도 마음에 번뇌가 있는 줄을 모르며, 또 어떤 사람은 번뇌와 서로 따르면서 마음에 번뇌가 있는 줄을 여실히 안다. 또 어떤 사람은 번뇌와 서로 따르지 않으면서도 마음에 번뇌와 서로 따르지 않으면서도 마음에 번뇌가 없는 줄을 여실히 모르며, 또 어떤 사람은 번뇌와 서로 따르지 않으면서 마음에 번뇌가 없는 줄을 여실히 안다.
그 셋째 사람으로서 번뇌와 서로 따르지 않으면서도 마음에 번뇌가 없는 줄을 여실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번뇌가 없는 사람 중에서 가장 못난 사람이다. 그러나 그 넷째 사람으로서 번뇌와 서로 따르지 않으면서 마음에 번뇌가 없는 줄을 여실히 아는 사람은 번뇌가 없는 사람 중에서 가장 제일이 된다.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세상에는 이런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 때에 존자 모옥갈라아나는 샤아리푸트라에게 물었다.
“무슨 이유로 번뇌와 서로 따르는 사람으로서 한 사람은 못나고 한 사람은 훌륭하다 하는가. 또 무슨 이유로 번뇌와 서로 따르지 않는 사람으로서 한 사람은 못나고 한 사람은 훌륭하다 하는가.”
샤아리푸트라는 대답하였다.
“저 번뇌와 서로 따르면서도 마음에 번뇌가 있는 줄을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오. ‘나는 깨끗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그는 곧 깨끗하다고 생각하오. 그가 깨끗하다고 생각할 때에 그는 곧 욕심을 일으키고, 욕심을 일으키고는 곧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을 가진 채, 목숨을 마치오. 그 때에 그는 방편을 구해 욕심을 없애지 못하고,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을 가진 채 목숨을 마치고 마는 것이오.
모옥갈라아나님, 알아야 하오. 마치 어떤 사람이 시장에 가서 구리 그릇을 샀는데 먼지와 때가 묻어 매우 더러웠소. 그러나 그 사람은 때때로 닦지도 않고 씻지도 않아서 그 그릇은 갈수록 때가 생겨 더욱 더러워지는 것처럼, 그 첫째 사람도 그와 같아서 번뇌와 서로 따르면서도 마음에 번뇌가 있는 줄을 여실히 모르고 그는 곧 생각하오. ‘나는 깨끗하다고 생각한다’고. 그는 깨끗하다고 생각하고는 곧 욕심을 내고, 욕심을 내고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가진 채 목숨을 마치면서도 방편을 구해 그 욕심을 없애지 않소.
그 둘째 사람은 번뇌와 서로 따르면서 마음에 번뇌가 있는 줄을 여실히 알아 ‘나는 깨끗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깨끗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리라’고 생각하오. 그는 깨끗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깨끗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깨끗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짐으로써 욕심을 내지 않소. 그래서 방편을 구해 얻지 못한 것을 얻고 거두지 못한 것은 거두며 미치지 못한 것은 미치게 하여 곧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고, 또 번뇌가 없이 목숨을 마치오.
마치 어떤 사람이 시장에 가서 구리 그릇을 샀는데 먼지와 때가 묻었으면, 그는 때때로 닦고 씻어 깨끗이 하는 것처럼 이 사람도 그와 같아서, 번뇌와 서로 따르면서 마음에 번뇌가 있는 줄을 여실히 아오. 그는 곧 깨끗하다고 생각을 버리고 깨끗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오. 그는 깨끗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다시 방편을 구해, 얻지 못한 것을 얻고 거두지 못한 것은 거두며 증득하지 못한 것은 증득하오. 그래서 욕심이 없고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이 목숨을 마치오. 모옥갈라아나님, 이것이 이른바 ‘번뇌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한 사람은 못나고 한 사람은 훌륭하다’는 것이오.”
모옥갈라아나는 물었다.
“그러면 또 무슨 이유로 두 사람이 다 번뇌를 따르지 않는데 한 사람은 못나고 한 사람은 훌륭하다 하는가.”
샤아리푸트라는 대답하였다.
“그 셋째 사람은 번뇌와 서로 따르지 않으면서도 마음에 번뇌가 없는 줄을 여실히 알지 못하고 이렇게 생각하오. ‘나는 방편을 구해 생각하지 않지마는 얻지 못한 것을 얻었고 거두지 못한 것을 거두었으며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하였다’고. 그래서 그는 욕심이 있고 성냄과 어리석음에 얽매인 채 목숨을 마치오.
마치 어떤 사람이 시장에 가서 구리 그릇을 샀는데 티끌과 때가 묻었소. 그러나 그는 때때로 씻지도 않고 닦지도 않는 것처럼, 그 셋째 사람도 그와 같아서 번뇌와 서로 따르지 않으면서도 마음에 번뇌가 없는 줄을 여실히 모르고 또 ‘나는 방편을 구해 이 온갖 번뇌를 없애리라’고 공부하지도 않소.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가진 채 목숨을 마치는 것이오.
그 넷째 사람은 번뇌와 어울리지 않으면서 마음에 번뇌가 없는 줄을 여실히 아오. 그는 이렇게 생각하오. ‘나는 방편을 구해 얻지 못한 것은 얻고 거두지 못한 것은 거두며 증득하지 못한 것은 증득하리라’고. 그래서 그는 이런 번뇌가 없이 목숨을 마치오.
마치 어떤 사람이 시장에 가서 좋은 구리 그릇을 얻어 매우 깨끗한데, 다시 때때로 닦고 씻으면 그 그릇은 더욱 깨끗하고 고와지는 것처럼, 그 넷째 사람도 그와 같아서 번뇌와 어울리지 않으면서 마음에 번뇌가 없는 줄을 여실히 알지마는 그는 이렇게 생각하오. ‘나는 방편을 구해 얻지 못한 것을 얻고 거두지 못한 것은 거두며 증득하지 못한 것은 증득하리라’고. 그래서 그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번뇌가 없이 목숨을 마치는 것이오.
모옥갈라아나님, 이것이 이른바 ‘번뇌와 어울리지 않아 마음에 번뇌가 없는 두 사람으로서, 그것을 여실히 아는 사람은 훌륭하고 여실히 모르는 사람은 못났다’는 것이오.”
존자 모옥갈라아나는 물었다.
“어찌하여 번뇌라 부르는가.”
샤아리푸트라는 대답하였다.
“모옥갈라아나님, 알아야 하오.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온갖 삿된 소견을 일으키기 때문에 번뇌라 하오. 혹 어떤 사람은 생각하오. ‘여래께서는 내게 이치를 물으신 뒤에 비구들을 위해 설법하시고, 다른 비구들에게 이치를 물어 비구들을 위해 설법하시지 않았으면’하고. 그러나 때로는 세존께서 다른 비구에게 말씀하시어 설법하시고 그 비구에게는 말씀하시지 않으면 그는 ‘여래는 설법하시면서 내게는 말씀하시지 않는다. 내가 비구들을 위해 설법하리라’고. 이리하여 착하지 않은데 또 탐욕이 있소. 이미 착하지 않은데 또 탐욕이 있으니 둘은 다 좋지 않은 것이오.
혹 때로 그 비구는 이렇게 생각하오. ‘내가 항상 비구들 앞에 서서 마을에 들어가 걸식하고 다른 비구는 비구들 앞에 서서 마을에 들어가 걸식하지 못하게 했으면...’ 그러나 때로는 다른 비구가 비구들 앞에 서서 마을에 들어가 걸식하고, 자기가 비구들 앞에 서서 마을에 들어가 걸식하지 못하게 되면 그는 ‘나는 비구들 앞에 서서 마을에 들어가 걸식하지 못했다’고 하오. 이미 착하지 않은데 또 탐욕이 있으니 이 둘은 다 좋지 않은 것이오.
모옥갈라아나님, 알아야 하오. 또 때로 그 비구는 이렇게 생각하오. ‘내가 비구들 앞에 앉아 물과 밥을 먼저 받고 다른 비구는 비구들 앞에 앉아 물과 밥을 먼저 받지 못하게 했으면...’ 그러나 때로는 다른 비구가 비구들 앞에 앉아 물과 밥을 먼저 받고, 자기가 비구들 앞에 앉아 물과 밥을 먼저 받지 못하게 되면 그는 ‘나는 비구들 앞에 앉아 물과 밥을 먼저 받지 못했다’고 하오. 이미 착하지 않은데 또 탐욕이 있으니 이 둘은 좋지 못한 것이오.
또 때로 그 비구는 이렇게 생각하오. ‘내가 밥을 먹은 뒤에 시주를 위해 설법하고, 다른 비구는 밥을 먹은 뒤에 시주를 위해 설법하지 못하게 했으면...’ 그러나 때로는 다른 비구가 공양을 든 뒤에 시주를 위해 설법하고 자기가 공양을 든 뒤에 시주를 위해 설법하지 못하게 되면 그는 ‘나는 밥을 먹은 뒤에 시주를 위해 설법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오. 이미 착하지 않은데 또 탐욕이 있으니, 이 둘은 좋지 못한 것이오.
또 때로 그 비구는 이렇게 생각하오. ‘내가 동산으로 가서 장자나 바라문을 위해 설법하고 다른 비구는 동산으로 가서 장자나 바라문을 위해 설법하지 못하게 했으면...’ 그러나 때로는 다른 비구가 산으로 가서 장자나 바라문을 위해 설법하고 자기가 동산으로 가서 장자나 바라문을 위해 설법하지 못하게 되면 그는 ‘나를 동산으로 가서 장자나 바라문을 위해 설법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오. 이미 착하지 않은데 또 탐욕이 있으니 이 둘은 좋지 못한 것이오.
또 때로 그 비구는 이렇게 생각하오. ‘나는 지금 계율을 범했다. 여러 비구들로 하여금 내가 계율을 범한 것을 알지 못하게 하였으면...’ 그러나 때로는 그 비구가 계율을 범하고 여러 비구들이 그 비구가 계율을 범한 것을 아오. 이미 착하지 않은데 또 탐욕이 있으니 이 둘은 좋지 못한 것이오.
또 때로 그 비구는 이렇게 생각하오. ‘나는 지금 계율을 범했다. 다른 비구들로 하여금 계율을 범한 것을 내게 말하지 못하게 했으면...’ 그러나 때로는 그 비구가 계율을 범하고 다른 비구가 그 계율을 범한 것을 그에게 말하오. 이미 착하지 않은데 또 탐욕이 있으니 이 둘은 좋지 못한 것이오.
또 때로 그 비구는 이렇게 생각하오. ‘나는 지금 계율을 범했다. 청정한 비구가 내게 말하고 청정하지 않은 비구로 하여금 내게 말하지 못하게 했으면...’ 그러나 때로는 청정하지 않은 비구가 그에게 ‘너는 계율을 범했다’고 말하오. 이미 착하지 않은데 또 탐욕이 있으니 이 둘은 좋지 못한 것이오.
또 때로 그 비구는 이렇게 생각하오. ‘나는 계율을 범했다. 만일 어떤 비구가 내게 말하려면 대중 속에서가 아니라 그윽한 곳에서 했으면...’ 그러나 때로는 그 비구가 계율을 범했을 때, 대중 속에서 말하고 그윽한 곳이 아니면 그는 ‘이 비구는 그윽한 곳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내게 말한다’고 생각하오. 이미 착하지 않은데 또 탐욕이 있으니 이 둘은 좋지 못한 것이오.
모옥갈라아나님, 이것이 모든 법의 근본으로서 이런 행을 일으키기 때문에 번뇌라 하는 것이오.
또 모옥갈라아나님, 이시오. 모든 네 무리는 이런 행을 범하는 이를 다 듣고 보고 생각해 아오. 그러므로 그가 ‘나는 아라냐행을 행하고, 한적한 곳에서 다섯 가지 누더기 옷을 바로 입고, 항상 걸식하되 빈, 부를 가리지 않으며, 행동은 사납지 않아 가고 오고 서고 움직임이 조용하고, 말하고 말 안하는 것이 법에 맞다’고 말하고, 또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 이런 여러 범행을 닦는 이들이 항상 와서 내게 공양하였으면...’하고 생각하지마는 네 가지 무리들은 때를 따라 공양하지 않소. 왜 그러냐 하면 그 비구가 악하고 착하지 않은 행을 버리지 못한 것을 그들은 보고 듣고 생각해 알기 때문이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아주 깨끗한 구리 그릇에 더러운 것을 가득 담고는 다른 뚜껑을 그 위에 덮고 그것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물을 것이오.
‘그대가 가진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보고 싶다’고.
그 때에 그 사람들은 매우 굶주려 있었소. 그래서 ‘이것은 좋은 음식이다’하고 이내 그 그릇 뚜껑을 열었소. 그러나 그것은 바로 더러운 것임을 다 볼 수 있을 것이오. 이 비구도 그와 같아서 아무리 아라냐행이 있고 때를 따라 걸식하며 다섯 가지 누더기 옷을 입고 몸과 마음을 바루고 생각을 매어 앞에 두며, 또 여러 범행을 닦는 이로 하여금 때를 따라 와서 공양하게 하려고 생각하더라도 그 범행을 닦는 이들은 때를 따라 와서 공양하지 않소. 왜 그러냐 하면 그 비구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과 번뇌가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오.
모옥갈라아나님, 알아야 하오. 어떤 비구로서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없고 번뇌가 이미 없어진 것을 그들이 듣고 보고 생각하고 알면, 그는 비록 성밖을 다니더라도 오히려 법을 가진 사람으로서 혹은 남의 청을 받고 혹은 장자의 공양을 받을 것이오. 그 비구는 그런 탐욕이 없기 때문이오. 그 때에는 네 무리와 여러 범행을 닦는 이가 모두 와서 공양하오. 왜 그러냐 하면 그 비구는 행이 청정하므로 그들이 그것을 보고 듣고 생각해 알기 때문이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좋은 구리 그릇에 아주 맛나고 향기로운 음식을 담고 다른 물건을 그 위에 덮고, 그것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물을 것이오.
‘그것은 무엇이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싶소.’ 그들은 곧 뚜껑을 열고 그 음식을 보고 모두 같이 먹을 것이오. 이 비구도 그와 같아서, 이 비구를 보고 듣고 생각해 알면 그가 비록 성밖으로 다니면서 장자의 공양을 받더라도 그는 ‘여러 범행을 닦는 사람들이 모두 와서 내게 공양하였으면...’하고 생각하지 않소. 그러나 여러 범행을 닦는 이들은 다 와서 공양하오. 왜 그러냐 하면 그 비구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범행을 모두 버렸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모옥갈라아나님, 이런 여러 가지 행이기 때문에 그것을 번뇌라 하는 것이오.”
대정장 2/632 상~633 하 ;『한글 증일아함경』1, pp. 321~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