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장아함경

장아함경17 청정경

다르마 러브 2012. 6. 16. 20:06

불설장아함경 제 十二권

 

제 二분 청정경(淸淨經) 제 十三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가비라국의 면기(緬祇) 우바새의 동산에서 큰 비구 무리 천 二백 五十인과 함께 계셨다.

때에 사미(沙彌) 주나(周那)는 파파(波波)국에서 여름 안거(安居)를 마친 뒤 가사와 바루를 가지고 가비라국의 면기 동산으로 나아가 아난이 있는 곳으로 가서 머리로 그 발에 예배하고 한 쪽에 서서 아난에게 사뢰었다.

“저 파파성 안에 있는 니건자(尼乾子)는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제자들은 두 파로 갈라져 각각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서로 맞대고 헐고 욕하면서 상하의 분별도 없고 서로 상대방의 허물을 들추며 그 지견(知見)을 다투어 ‘나는 이것을 아는데 너는 그것을 모른다. 내 행은 참되고 바른데 너는 삿된 소견을 가지고 있다’고하여 앞의 것으로써 뒤에 붙이고, 뒤의 것으로써 앞에 붙이며, 뒤바뀌고 어지러이 얽히어 어떤 일정한 법칙이 없어 서로 ‘내가 하는 것은 묘하고 네가 하는 말은 그르다. 너에게 의심이 있거든 마땅히 내게 물으라’고 합니다. 대덕(大德) 아난이여, 그래서 니건자를 섬기던 저 나라 사람들은 이 다투는 것을 듣고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아난은 주나 사미에게 말했다.

“우리는 할 말이 있어 세존께 여쭈려 한다. 이제 너와 함께 나아가 이 사실을 세존께 여쭈어 보자. 만일 세존께서 어떤 가르침이 계시거든 우리는 다 같이 받들어 행하자.”

그 때 사미 주나는 아난의 말을 듣고 곧 세존께 나아가 머리로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서 있었다.

아난은 세존께 여쭈었다.

“이 사미 주나는 파파국에서 여름 안거를 마친 뒤 가사와 바루를 가지고 이곳에 와 제 발에 절하고 제게 말했습니다. 파파국에 있던 니건자는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제자들은 두 파로 갈라져 각각 서로 다투고 있다 합니다. 그들은 서로 맞대고 헐고 욕하면서 상하의 구별도 없답니다. 서로 상대방의 단점을 들추어 그 지견을 주장하고 있답니다. ‘나는 이것을 아는데 너는 그것을 모른다. 내 행은 참되고 바른데 너는 삿된 소견을 가지고 있다’고. 앞의 것으로써 뒤에 붙이고 뒤의 것으로써 앞에 붙이어, 뒤바뀐 소견이 어지러이 얽히어 어떤 일정한 법칙이 없답니다. ‘내 말은 옳고 네 말은 그르다. 너는 의심나는 것이 있거든 내게 물으라’고. 그래서 니건자를 섬기던 저 파파 국민들은 이 다툼을 듣고 걱정을 한다고 합니다.”

세존은 주나 사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주나야, 저 그른 법 가운데는 족히 들을 만한 것이 없다. 그것은 삼마아삼붓다[三耶三佛]의 하신 말씀이 아니다. 마치 썩은 탑에 색칠하기 어려운 것처럼, 저들에게는 스승이 있다고 하지만 그는 다 삿된 소견을 품었고 또 그들에게는 법이 있다고 하지마는 그것은 다 참되고 바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족히 들을 것이 못되고, 그것으로는 번뇌를 떠날 수가 없다. 그것은 삼마아삼붓다의 하신 말씀이 아니어서, 마치 썩은 탑에는 색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저 모든 제자들이 그 법을 따르지 않고 삿된 소견을 버리며 바른 소견을 행할 때, 주나냐,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제자에게 말하기를 ‘여러분, 그대들의 스승의 법은 마땅히 그 가운데서 행할 만한데 왜 버리느냐.’하고, 그 때 그 제자가 만일 그 말을 믿는다면 그 두 사람은 함께 도(道)를 잃어 무량한 죄를 받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에게는 비록 법이 있지마는 그것은 진정한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나야, 만일 그 스승의 소견이 삿되지 않고 그 법이 진정하여 족히 들어 행할 만하고 또 번뇌를 떠나게 할 수 있으면 그것은 삼약삼붓다의 말씀일 것이다. 마치 새로운 탑에는 색칠하기 쉬운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저 모든 제자들이 이 법 가운데 있어서 부지런히 닦지도 못하고 성취하지도 못해 평등한 도를 버리고 삿된 소견으로 들어갈 때,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제자들에게 와서 말하기를 ‘여러분, 그대들 스승의 법은 마땅히 그 가운데서 행할 만한데 왜 그것을 버리고 삿된 소견으로 들어가느냐.’하고, 그 때 그 제자가 만일 그 말을 믿는다면, 그 두 사람은 함께 진정한 도를 보아 무량한 복을 얻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 법은 진정하기 때문이다.

주나야, 저들에게는 스승이 있어도 그들은 다 삿된 소견을 품었고 다시 법이 있다 하지마는 그것은 다 진정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은 족히 들을 만한 것이 못되고 또 그것은 번뇌를 떠나게 하지도 못해 삼약삼붓다의 말씀이 아닌 것은 마치 썩은 탑은 색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 제자로써 법 중의 법을 성취하고 그 행을 순종하면서 모든 삿된 소견을 일으킬 때 주나야,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제자에게 와서 말하기를 ‘네 스승의 법은 바르고 네가 행하는 것은 옳다. 이제 그것을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 이러하니, 너는 반드시 현재에서 도과(道果)를 성취하리라’ 하고, 만일 그 제자가 그 말을 믿어 받는다면 그들 두 사람은 함께 도를 잃고 무량한 죄를 받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 법이 진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나야, 만일 그 스승의 소견이 삿되지 않고 그 법은 진정하여 족히 들을 만하고 또 번뇌를 떠날 수 있으면 그것은 삼약삼붓다의 말씀으로써 마치 새 탑은 색칠하기 쉬운 것과 같다. 그런데 그 제자로서 법 중의 법을 성취하고 수순(隨順)하고 수행하여 바른 소견을 낼 때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제자에게 와서 ‘너의 스승의 법은 바르고 너의 행하는 것은 옳다. 이제 그것을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 이러하니 너는 반드시 현재의 세계에서 도과를 성취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자. 만일 그 제자가 그 말을 믿어 받는다면 그들 두 사람은 다 바른 소견으로서 무량한 복을 얻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 법은 진정하기 때문이다.

주나야, 혹 어떤 도사(導師)는 세상에 나와 그 제자에게 걱정이 있게 하고 혹 어떤 도사는 세상에 나와 그 제자에게 걱정이 없게 한다. 어떤 것을 도사가 세상에 나와 그 제자에게 걱정이 있게 한다고 하는가. 주나야, 도사가 새로이 세상에 나와 성도 한지 오래지 않았는데 그 법은 구족하고 범행(梵行)은 청정하다. 여실한 진요(眞要)를 펴서 나타내지 못하고 그러나 도사는 어느새 멸도(滅度)에 든다. 그 때 그 제자들은 수행할 수가 없어 다 근심스리 말한다. ‘우리 스승은 새로이 세상에 나와 성도 한지 오래지 않았는데 그 법은 청정하고 범행은 구족했다. 그러나 여실한 진요는 끝내 펴서 나타내지 못하고 이제 도사는 갑자기 멸도에 드셨다. 그래서 우리 제자들은 수행할 수가 없다.’고 하면 이것을 도사가 세상에 나타나 그 제자를 걱정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것을 도사가 세상에 나와 그 제자에게 걱정이 없게 하는 것이라 하는가. 도사가 세상에 나오매 그 법은 청정하고 범행은 구족하며 여실한 진요를 널리 편 뒤에 도사가 바야흐로 멸도에 들므로 그 제자들은 다 수행할 수 있어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스승은 세상에 나와 성도 한지 오래지 않다. 그 법은 청정하고 범행은 구족 하여 여실한 진요를 널리 펴셨다. 이네 도사가 갑자기 멸도 하시더라도 우리 제자들로 하여금 다 수행하게 한다.’ 이것을 주나야, 도사가 세상에 나오매 제자가 걱정이 없다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다시 주나에게 말씀하셨다.

“주나야, 범행을 성취하는 지(支)라는 것은 이른바 도사가 세상에 나와 집을 떠난 지 오래지 않고 그 이름이 널리 퍼지지 않으면 이것을 범행지(梵行支)의 구족하지 못한 것이라 한다. 주나야, 도사가 세상에 나와 집을 떠난 지 이미 오래고 그 이름이 널리 퍼지면 이것을 범행지의 구족만(滿)이라 한다. 주나야, 도사가 세상에 나와 집을 떠난 지 이미 오래고 그 이름이 널리 퍼졌으면서도 모든 제자가 이직 그 훈계와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범행을 구족하지 못하고 안락한 곳에 이르지 못하며, 아직 자기의 이익을 거두지 못하고 아직 법을 받아 널리 펴서 연설하지 못하며 이론(異論)이 있어 일어났을 때에는 법다이 가서 그것을 멸하지 못하고 아직 그 변화로 신통증(證)을 이루지 못했으면 이것을 범행지의 구족하지 못한 것이라 한다. 주나야, 도사가 세상에 나와 집을 떠난 지 이미 오래고 그 이름도 널리 퍼지어 모든 제자는 다 그 교훈을 받아 범행이 구족하고 안온한 곳에 이르렀으며 이미 자기의 이익을 거두었고 또 법을 받아 분별하여 연설하며 이론이 있어 일어났을 때에는 능히 법다이 가서 그것을 멸하고 변화가 구족하여 신통증을 이루었으면 이것을 범행지의 구족만이라 한다.

주나야, 도사가 세상에 나와 집을 떠난 지 또한 오래고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 하더라도 모든 비구니가 그 교훈을 받지 못하고 편안한 곳에 이르지 못하며 자기의 이익을 거두지 못하며 법을 받아 널리 펴서 연설하지 못하며, 이론이 있어 일어났을 때 능히 법으로써 실답게 멸하지 못하며 변화가 없어 신통증을 이루지 못하면 이는 범행지가 구족하지 못한 것이다. 주나야, 도사가 세상에 나와 집을 떠난 지도 오래고 이름도 널리 퍼졌으면 모든 비구니가 다 그 교훈을 받아 범행이 구족하며 안온한 곳에 이르러 자기의 이익을 거두며 또한 능히 법을 받아 분별하고 연설하며, 이론이 있어 일어나면 능히 법다이 멸하며 변화가 구족하고 신통증을 이루었으면 이를 범행지의 구족만이라 한다. 주나야, 모든 우바새, 우바이가 널리 범행을 닦고 내지 변화가 구족하여 신통증을 성취함도 또한 이와 같다.

주나야, 만일 도사가 세상에 있지 않고 그 명문(名聞)이 없고 이양(利養)이 없으면 그것은 범행지의 구족만이 아니다. 만일 도사가 세상에 있으면서 명문과 이양이 다 구족하여 줄어듦이 없으면 그것은 범행지의 구족만이다. 만일 도사가 세상에 있어 명문과 이양이 다 구족하더라고 모든 비구의 명문과 이양이 구족하지 못하면 그것은 범행지가 구족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도사가 세상에 있어 명문과 이양이 구족하여 줄어듦이 없고 모든 비구 중도 또한 구족하면 그것은 범행지의 구족만이다. 비구니 중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다.

주나야, 나는 집을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이름은 널리 퍼졌으며 나의 모든 비구들은 이미 나의 가르침을 받았고 안온한 곳에 이르렀으며 스스로 자기의 이익을 얻었고 다시 능히 법을 받아 남을 위하여 연설하며 이론이 일어났을 때에는 능히 법다이 멸하고 변화가 구족하여 신통증을 이루었다. 모든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도 또한 그러하다. 주나야, 나는 그로서 널리 범행을 유포하고, 내지 변화가 구족하여 신통증을 이루었다. 주나야, 일체 세간의 모든 도사로써 그 명문과 이양을 얻는 것이 나 여래, 지진, 등적각과 같은 이를 보지 못했다. 주나야, 모든 세간의 모든 무리들로서 그 명문과 이양이나 무리들과 같은 것을 보지 못했다. 주나야, 만일 바로 말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보려고 해도 보지 못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것이 보려고 해도 보지 못하는 것인가. 일체의 범행을 청정하고 구족하여 두루 펴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려고 해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때 세존은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울두람자(鬱頭籃子)는 대중 가운데서 이렇게 말한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다. 어떤 것을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하는가. 마치 ‘칼은 볼 수 있어도 칼날은 볼 수 없다는 것과 같다’고. 모든 비구들이여, 저 사람은 범부의 무식한 말을 끌어 비유로 하는 것이 이와 같다. 주나야, 만일 바로 말하고자 한다면 보고도 보지 못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것이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인가. 너는 마땅히 바로 말하라. 일체 범행은 청정구족하여 펴서 보이고 흘러 퍼지는 것이니 이것을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 주나야, 저 서로 계속하는 법[相續法]은 구족하여 하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주나야, 모든 법 가운데의 범행은 낙(酪)과 소 가운데서 제호이니라.”

그 때 세존은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 법 가운데서 몸소 스스로 증명을 얻었다. 이른바 四념처(念處), 四신통, 四의단(意斷), 四선(禪), 五근(根), 五력(力), 七각의(覺意), 현성, 八도(道)가 그것이다. 너희들은 다 함께 화합하여 서로 다툼질을 하지 말라. 동일한 스승의 제자는 동일한 물과 젖이다. 여래의 정법에 있어서 마땅히 자기 등불로 유쾌히 안락을 얻어야 하고 안락을 얻어 마쳐야 한다. 만일 어떤 비구가 설법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는 이가 있었다 하자. ‘저이가 말한 구절은 옳지 않고 그 뜻도 옳지 않다.’고 하면 비구는 그 말을 듣거든 그것을 옳다고도 말하지 말고 그르다고도 말하지 말라. 마땅히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라. ‘어떤가 여러분, 내 글귀는 이러하고 너의 글귀는 이러하다. 내 뜻은 이러하고 너의 뜻은 이러하다. 어느 것이 낫고 어느 것이 못한가.’ 그 때 그 비구는 대답하리라. ‘내 글귀는 이러하고 내 뜻은 이러하다. 너의 글귀는 이러하고 너의 뜻은 이러하다. 그래서 너의 글귀가 이겼고 너의 뜻도 이겼다’고 한다면, 그 비구가 이렇게 말할 때 또한 그것을 그르다고도 말고 옳다고도 말라. 마땅히 그 비구를 충고하고 꾸짖고 그치게 하고 마땅히 함께 그 바른 것을 찾도록 하라. 이렇게 다 함께 화합하여 서로 다툼질을 하지 말라. 동일한 스승의 제자는 동일한 물과 젖이다. 여래의 바른 법 가운데서 마땅히 자기 등불로 유쾌히 안락을 얻어야 하고 안락을 얻어 마쳐야 한다.

만일 어떤 비구가 설법할 때 그 중에 어떤 비구가 있어 이런 말을 했다고 하자. ‘저이가 말한 글귀는 바르지 못하다. 그러나 그 뜻은 바르다’고. 비구는 그 말을 듣거든 옳다고도 말하지 말고 그르다고도 말하지 말라. 그리고 마땅히 그 비구에게 말하라. ‘어떤가 비구여, 내 글귀는 이러하고 너의 글귀는 이러하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만일 그 비구가 곧 대답하되 ‘내 글귀는 이러하고 네 글귀는 이러하다. 네 글귀가 낫다.’

그 비구는 이렇게 말할 때 비구는 또한 말하기를 ‘이것은 옳다고 할 수 없고 그르다고도 할 수 없다’하고, 마땅히 그 비구를 충고하고 꾸짖어 그치게 하고 마땅히 함께 연구하라. 이렇게 다 함께 화합할 것이요, 서로 싸움질을 하지 말라. 동일한 스승의 제자는 동일한 물과 젖이다. 여래의 정법 가운데서 마땅히 자기 등불로 유쾌한 안락을 얻어야 하고 안락을 얻어 마쳐야 한다.

만일 어떤 비구가 설법할 때에 그 중에 어떤 비구가 있어 이렇게 말했다 하자. ‘저이가 말하는 글귀는 바르지마는 뜻은 바르지 않다.’고 한다면 비구는 그 말을 듣거든 옳다고도 말하지 말고 그르다고도 말하지 말라. 마땅히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라. ‘어떤가 비구여, 내 뜻은 이러하고 너의 뜻은 이러하다. 너의 뜻이 이겼다’고 하거든 그 비구가 이렇게 말할 때 또한 그것을 옳다고도 말하지 말고 그르다고도 말하지 말라. 마땅히 그 비구를 충고하고 꾸짖고 그치게 하고 또 마땅히 함께 바른 것을 찾도록 하라. 이렇게 비구는 다 함께 화합하여 싸움질을 하지 말라. 동일한 스승의 제자는 동일한 물과 젖이다. 여래의 정법 가운데서 마땅히 자기 등불로 유쾌한 안락을 얻어야 하고 안락을 얻어 마쳐야 한다. 또 어떤 비구가 설법할 때에 그 중에 어떤 비구가 있어 이렇게 말했다 하자. ‘저이의 말하는 글귀도 바르고 뜻도 또한 바르다.’고 하거든 비구는 그 말을 듣고 그 말을 그르다고 하지 말고 마땅히 그를 칭찬해 말하라. ‘네 말이 옳다, 네 말이 옳다’고.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十二부경(部經)에 대하여 자기 몸소 진리를 얻어 마땅히 널리 흘러 퍼뜨리라. 一은 관경(貫經) 二는 기야경(祇夜經) 三은 수기경(手記經) 四는 게경(偈經) 五는 법구경(法句經) 六은 상응경(相應經) 七은 본연경(本緣經) 八은 천본경(天本經) 九는 광경(廣經) 十은 미증유경(未曾有經) 十一은 비유경(譬喩經) 十二는 대교경(大敎經)이다. 마땅히 이것을 잘 받아 가지고 헤아리고 관찰하여 널리 펴서 분포하라.

모든 비구들이여, 내가 제정한 옷이 혹은 무덤 사이의 옷, 혹은 장자의 옷, 혹은 추하고 천한 옷, 이 옷들은 추위와 더위 모기나 등에를 막기에 넉넉하고 몸뚱이를 가리기에 넉넉하다. 모든 비구들이여, 내가 제정한 음식이 혹은 빌어먹기, 혹은 거사의 음식, 이 음식이면 스스로 족하다. 만일 몸이 괴로워 여러 가지 병이 부닥쳐 와서 드디어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 음식을 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족한 줄 알면 그만인 것이다. 모든 비구들이여, 내가 제정한 주처(住處)가 혹은 나무 밑에 있고 혹은 한 데 있으며 혹은 방안에 있고 혹은 누각 위에 있으며 혹은 굴속에 있고 혹은 그 밖의 여러 곳에 있다. 이 주처들은 추위 더위와 바람 비와 모기 등에를 막기에 족하며 한적하고 게으를 때 쉴 곳이 된다. 모든 비구들이여, 내가 제정한 약은 대소변, 소, 유, 흑석밀(黑石蜜) 등이니 이런 약이면 스스로 족하다. 혹은 몸의 고통이 생기고 뭇 병이 닥쳐와서, 드디어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 약을 쓰는 것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혹 어떤 외도(外道)의 범지가 와서 ‘사문 석자(釋子)는 온갖 즐거움으로 스스로 즐긴다’고 말하거든 너희들은 이렇게 대답하라. ‘너희들은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사문 석자는 온갖 즐거움으로서 스스로 즐긴다. 무슨 까닭인가. 즐거움으로써 스스로 즐기는 데는 여래의 꾸짖는 것이 있고 즐거움으로써 스스로 즐기는 데는 여래의 칭찬하는 것이 있다’고 하라. 만일 외도 범지가 다시 묻기를 ‘어떤 즐거움을 즐기는 것을 고오타마는 꾸짖는가’ 하거든 너희들은 마땅히 대답하라. ‘五욕의 공덕은 사랑할 만하고 즐길 만한 것으로서 사람의 탐착하는 바다. 어떤 것이 五인가. 눈은 빛을 본다. 그것은 사랑할 만하고 즐길 만한 것으로서 사람의 탐착하는 것이다.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혀는 맛을 알고 몸은 촉감을 안다. 그것은 사랑할 만하고 즐길 만 한 것으로서 사람의 탐착하는 것이다. 여러분이여, 五욕의 인연은 희락(喜樂)을 낸다. 이것이 여래, 지진, 등정각의 꾸짖으시는 것이다.

마치 그것은 어떤 사람이 중생을 죽이는 것으로써 스스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다. 이것은 여래, 지진, 등정각의 꾸짖으시는 것이다. 또 마치 어떤 사람이 가만히 도둑질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다. 이것은 여래의 꾸짖으시는 것이다. 또 마치 어떤 사람이 범행(梵行)을 범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다. 이것은 여래의 꾸짖으시는 것이다. 또 마치 어떤 사람이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다. 이것은 여래의 꾸짖으시는 것이다. 또 마치 어떤 사람이 마음대로 방탕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여래의 꾸짖으시는 것이다. 또 마치 어떤 사람이 여래의 말씀하신 바른 행이 아닌 다른 고행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다. 이것은 여래의 꾸짖으시는 것이다.

모든 비구여, 여래는 사람의 탐착하는 바의 五욕의 공덕을 꾸짖으시는 것이다. 어떤 것이 五인가. 눈은 빛을 본다. 그것은 사랑할 만하고 즐길 만한 것으로써 사람의 탐착하는 것이다.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알고 혀는 맛을 알고 몸은 촉감을 안다. 그것은 사랑할 만하고 즐길 만 한 것으로써 사람의 탐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즐거움에도 사문 석자에게는 이러한 즐거움이 없다. 마치 어떤 사람이 일부러 중생을 죽이는 것으로써 즐거움을 삼으나 사문 석자에게는 그러한 즐거움은 없는 것과 같다. 마치 어떤 사람이 공공연하게 도둑질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즐거움을 삼지만 사문 석자에게는 그러한 즐거움은 없는 것과 같다. 마치 어떤 사람이 범행을 범하는 것으로서 스스로 즐거움을 삼지만 사문 석자에게는 그러한 즐거움이 없는 것과 같다. 마치 어떤 사람이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즐거움을 삼거니와 사문 석자에게는 그러한 즐거움은 없는 것과 같다. 마치 어떤 사람이 마음대로 방탕 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즐거움을 삼되 사문 석자에게는 그러한 즐거움이 없는 것과 같다. 마치 어떤 사람이 다른 고행을 행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즐거움을 삼는 이 있지만 사문 석자에게는 그러한 즐거움은 없는 것과 같다’.

만일 어떤 외도 범지가 ‘어떤 즐거움을 즐기는 것을 사문 고오타마는 칭찬하시는가.’고 묻거든 모든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마땅히 대답하라. ‘여러분, 五욕의 공덕은 사랑할 만하고 즐길 만하여 사람의 탐착하는 바다. 어떤 것이 五인가. 눈은 빛을 알고 내지 마음은 법진(法塵)을 알아 그것은 사랑할 만하고 즐길 만하여 사람의 탐착하는 것이다. 여러분, 五욕을 인연하여 생기는 즐거움은 마땅히 빨리 멸해 없애야 한다. 마치 그것은 어떤 사람이 일부러 중생을 죽임으로써 스스로 즐거워하지만 그러한 즐거움은 마땅히 빨리 멸해 없애야 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사람이 있어 공공연히 도둑질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워하지만 그러한 즐거움은 빨리 없애야 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사람이 있어 범행을 범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워하지만 그러한 즐거움은 빨리 없애야 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어떤 사람이 일부러 거짓말을 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워하지만 그러한 즐거움은 빨리 없애야 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어떤 사람이 마음대로 방탕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워하지만 그러한 즐거움은 빨리 없애야 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어떤 사람이 외도의 고행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워하지만 그러한 즐거움은 빨리 없애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있어 탐욕을 버리고 다시 악법이 없어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으면서도 이생희락(離生喜樂)으로 초선(初禪)에 들어가면 그러한 즐거움은 부처님의 칭찬하시는 바이니라. 또 어떤 사람이 각(覺)과 관(觀)을 없애고 안으로 기쁜 한 마음이어서 각도 없고 관도 없어 정생희락(定生喜樂)인 제 二선(禪)에 들어간다면 그런 즐거움은 부처님의 칭찬하시는 바이니라. 또 어떤 사람이 기쁨을 버리고 사(捨)에 들어가 스스로 몸의 즐거움을 알고 성현이 구하는 바의 호념일심(護念一心)인 제 三선에 들어간다면 그러한 즐거움은 부처님의 칭찬하시는 바이니라. 즐거움도 다하고 괴로움도 다하고 걱정과 기쁨이 먼저 없어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호념청정(護念淸淨)인 제 四선에 들어간다면 그러한 즐거움은 부처님의 칭찬하시는 바이니라’고 하라.

만일 외도 범지가 있어 묻기를 ‘너희들은 그 즐거움에서 얼마 마한 공덕의 과(果)를 구하느냐.’고 하거든 마땅히 그들에게 대답하라. ‘이 즐거움에는 七과(果)의 공덕이 있다. 어떤 것이 七인가. 현세에서 도증(道證)을 이룰 것이다. 만일 현세에서 이루지 못하면 목숨을 마칠 때 이룰 것이요, 만일 목숨을 마칠 때에도 이루지 못하면 반드시 五하결(下結)을 다해 중간반열반(中間般涅槃), 생피반열반(生彼般涅槃), 행반열반(行般涅槃), 무행반열반(無行般涅槃), 상류아가니타반열반(上流阿迦尼咤般涅槃)을 얻을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이 즐거움의 七공덕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 만일 비구가 학지(學地)에 있어 위로 안온처(安穩處)를 구하고자 하나 아직 五개(蓋)를 없애지 못했다 하자. 어떤 것이 五인가. 탐욕개(貪慾蓋), 진에개, 수면개(睡眠蓋), 도희개(掉戱蓋), 의개(疑蓋)가 그것이다. 저 학지에 있는 비구로서 위로 안온처를 구하고자 하면서 아직 五개를 없애지 못하고 四념처(念處)에 정근하지 못하고 七각의(覺意)에 정근하지 못하고는 상인(上人)의 법과 현성의 지혜의 증성(增盛)을 얻으려 하여 알고자 하고 보고자 하더라도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 학지 비구로서 위로 안온처를 구하고자 하여 능히 탐욕개, 진에개, 수면개, 도희개, 의개 등의 五개를 없애고 또 四념처에 있어서 능히 정근하고 七각의에 있어서 여실히 수행하여 상인의 법과 현성의 지혜의 증성을 얻고자 하여 알고자 하고 보고자 하기를 구한다면 그것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혹은 어떤 비구가 있어 번뇌가 다한 아라한으로서 해야 할 일을 이미 다하고 무거운 짐을 버리고 스스로 자기의 이익을 거두고, 모든 유(有)의 번뇌를 다하고, 바른 지혜로써 해탈하여 九사(事)를 행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것이 九인가. 一은 생생하지 않고 二는 도둑질하지 않으며 三은 간음하지 않고 四는 거짓말하지 않으며 五는 도(道)를 버리지 않고 六은 욕심을 따르지 않으며 七은 성냄을 따르지 않고 八은 두려움을 따르지 않으며 九는 어리석음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치고 무거운 짐을 버리고 스스로 자기의 이익을 거두고 모든 유(有)의 번뇌를 다해 바른 지혜로써 해탈하고 九사(事)를 멀리 떠난다고 하는 것이다’고 하여라.

또 어떤 외도 범지가 있어 말하기를 ‘사문 석자(釋子)는 머무르지 않는 법이 있다’고 하거든 너희들은 대답해 말하라. ‘여러분,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사문 석자는 부주법이 있다고. 무슨 까닭인가. 사문 석자는 그 법이 항상 머물러 동전(動轉)할 수 없다. 마치 그것은 문지방은 항상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사문 석자도 또한 그와 같아서 그 법은 항상 머물러 이동하지 않는다’고. 또 어떤 외도 범지가 있어 말하기를 ‘사문 고오타마는 과거 세상의 일은 다 알지마는 미래의 일은 모른다’한다면, 그 이학(異學) 범지는 지혜도 다르고 지혜의 관(觀)도 또한 달라 그의 말은 허망한 것이다. 여래는 과거 세상의 일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알고 보지 못하는 것이 없고 미래 세상에 있어서도 도(道)의 지혜를 낸다. 또 과거 세상의 일이 허망하고 진실하지 못하여 즐거워할 것이 못되고 이익될 것이 없으면 부처님은 곧 기억하지 않으신다. 혹은 과거의 일이 진실하기도 하고 즐거워할 만하기도 하나, 이익 되는 바가 없으면 부처님은 또한 기억하지 않으신다. 만일 과거의 일이 진실하기도 하고 즐거워할 만하며 또 이익되는 바도 있으면 여래는 그것을 다 알고 그리고 기억하신다. 미래와 현재에도 또한 그러하다. 여래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있어서 마땅히 시어(時語), 실어(實語), 의어(義語), 이어(利語), 법어(法語), 율어(律語)로서 허망함이 없다.

부처님은 초저녁에 최정각(最正覺)을 이루시고 새벽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말씀하신 것은 다 여실하다. 그러므로 여래라 이름한다. 다시 여래의 말씀은 사실과 같고 사실은 말씀과 같다. 그러므로 여래라 이름한다. 어떤 이유로 등정각(等正覺)이라 이름하는가. 부처님의 알고 보는 바 멸한 바 깨달은 바를 부처님은 다 깨달아 알으신다. 그러므로 등정각이라 이름한다.

또 어떤 외도 범지가 있어 말한다. ‘세간은 항상 있다. 오직 이것이 진실한 것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것이다.’ 혹은 또 말한다. ‘이 세상은 항상 됨이 없다. 오직 이것이 진실한 것이요 그 외의 것은 허망하다’고. 혹은 또 말한다. ‘세간은 항상 있기도 하고 항상 됨이 없기도 하다. 오직 이것이 진실한 것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고. 혹은 또 말한다. ‘이 세간은 항상 있는 것도 아니요 항상 됨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직 이것은 진실한 것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고. 혹은 또 말한다. ‘이 세간은 갓[邊]이 있다. 오직 이것이 진실한 것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 혹은 또 말한다. ‘이 세간은 갓이 없다. 오직 이것이 진실한 것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 혹은 또 말한다. ‘이 세간은 갓이 있기도 하고 갓이 없기도 하다. 오직 이것이 진실한 것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 혹은 또 말한다. ‘이 세간은 갓이 있는 것도 아니요 갓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직 이것이 진실한 것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고.

혹은 말한다. ‘이 목숨과 이 몸은 이것만이 진실하고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 혹은 또 말한다. ‘목숨도 아니요 몸도 아니다. 이것은 진실하고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 혹은 또 말한다. ‘명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 이것이 진실하고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 혹은 또 말한다. ‘다른 목숨도 아니요 다른 몸이 아니다. 이것은 진실하고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 혹은 또 말한다. ‘여래는 마침이 있다. 이것은 진실하고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 혹은 또 말한다. ‘여래는 마치지 않는다. 이것은 진실하고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 혹은 또 말한다. ‘여래는 마침도 아니요 마치지 않음도 아니다. 이것은 진실하고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

이러한 모든 소견이 있는데 이것을 본생본견(本生本見)이라 이름한다. 이제 너를 위하여 기록한다. ‘이른바 이 세상이 항상 있다. 내지 여래는 마침도 아니요 마치지 않음도 아니다. 이것은 진실하고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는 것은 본견본생인데 너를 위해 기록한다. 이른바 미견미생(未見未生)도 나는 또 기록하나니 어떤 것이 미견미생으로서 내가 기록하는 것인가. ‘색(色)은 <나>다. 상(想)을 쫓아 마침이 있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허망하다.’ ‘색이 없는 것이 <나>다. 상을 쫓아 마침이 있다.’ 또 색이 있기도 하고 또 색이 없기도 한 것이 <나>다. 상을 쫓아 마침이 있다. ‘색이 있지도 않고 색이 없지도 않은 것이 <나>다. 상을 쫓아 마침이 있다. <나>는 갓이 있다. <나>는 갓이 없다. <나>는 갓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나>는 갓이 있는 것도 아니요 갓이 없는 것도 아니다. 상을 쫓아 마침이 있다. 나는 즐거움이 있다. 상을 쫓아 마침이 있다. 나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다. 상을 쫓아 마침이 있다. 나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다. 상을 쫓아 마침이 있다. 한 상이 <나>다. 상을 쫓아 마침이 있다. 갖가지 상이 나다. 상을 쫓아 마침이 있다. 적은 상이 나다. 상을 쫓아 마침이 있다. 무량한 상이 나다. 상을 쫓아 마침이 있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허망하다.’는 이것이 삿된 소견의 본견본생으로써 내가 기록하는 것이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러한 주장과 이러한 소견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은 항상 있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허망하다. 내지 무량한 상(想)은 <나>로서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허망하다.’ 또 ‘이러한 주장과 이러한 소견을 가지는 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허망하다.’ 너희들은 마땅히 그에게 대답하라. ‘너는 참으로 그러한 주장을 하는데 어찌하여 이 세상은 항상 있으며 그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허망하다 하는가. 그러한 말을 부처님은 허락하시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소견 가운데에는 각각 번뇌가 있다. 나는 이치로써 미루어 볼 때 모든 사문 바라문 중에는 나와 짝할 이가 없다. 하물며 거기서 지나가고자 함이랴. 이 모든 삿된 소견은 다만 말이 있을 뿐 족히 함께 의논할 것이 없다. 내지 무량한 생각이 <나>라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런 말을 한다. ‘이 세간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라고. 또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 세간은 남이 만든 것이다’고. 혹은 다시 말한다.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한다’고. 혹은 또 말한다.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요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갑자기 있어진 것이다’고. 저 사문 바라문이 세간은 스스로 지어진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모두 촉(觸)의 인연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만일 촉의 인연을 떠나 말한다면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六입(入)을 말미암기 때문에 촉을 내고, 촉을 말미암기 때문에 수(受)를 내고, 수를 말미암기 때문에 애(愛)를 내고, 애를 말미암기 때문에 취(取)를 내고, 취를 말미암기 때문에 유(有)를 내고, 유를 말미암기 때문에 생(生)을 내고, 생을 말미암기 때문에 노, 사, 우, 비, 고, 뇌(老, 死, 憂. 悲, 苦, 惱)의 환(患)의 덩어리가 있는 것이다. 만일 六입이 없으면 촉이 없고, 촉이 없으면 수가 없고, 수가 없으면 애가 없고, 애가 없으면 취가 없고, 취가 없으면 유가 없고, 유가 없으면 생이 없고, 생이 없으면 노, 사, 우, 비, 고, 뇌의 큰 환의 음집(陰集)이 없을 것이다. 또 말하기를 ‘이 세간은 남이 만들었다’하고, 또 말하기를 ‘이 세간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요 남이 만든 것이 아니다. 갑자기 있는 것이다’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 촉을 말미암아 있는 것으로서 촉이 없으면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이러한 모든 사악(邪惡)한 소견을 없애려고 하거든 四념처(念處)에 있어서 마땅히 三행(行)을 닦아라. 어떤 것이 비구가 모든 악을 없애려고 四념처에 있어서 三행을 닦는 것인가. 비구여, 내신신관(內身身觀)을 부지런히 닦아 게으르지 않고, 기억하여 잊지 않아 세상의 탐욕과 걱정을 없애는 것이다. 또 외신신관(外身身觀)을 부지런히 닦아 게으르지 않고, 기억하고 잊지 않아 세상의 탐욕과 걱정을 없애는 것이다. 또 내외신신관을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않아 세상의 탐욕과 걱정을 없애는 것이다. 수, 의, 법(受, 意, 法)의 관(觀)도 또한 그와 같이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악법을 멸하기 위하여 四념처에 있어서 三종의 행을 닦는 것이다. 또 八해탈(解脫)이 있다. 어떤 것이 八인가. 색(色)이 색을 관(觀)하는 것은 초해탈이요, 안에 색상(色想)이 있어 밖으로 색을 관하는 것은 二해탈이요, 정(淨)해탈은 三해탈이요, 색상을 건너 건넜다는 생각을 없애고 공처(空處)에 머무르는 것은 四해탈이요, 공처를 버리고 식처(識處)에 머무르는 것은 五해탈이요, 식처를 버리고 불용처(不用處)에 머무르는 것은 六해탈이요, 불용처를 버리고 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에 머무르는 것은 七해탈이요, 멸진정(滅盡定)은 八해탈이다.”

그 때에 아난은 세존의 뒤에서 부채로 부처님께 부채질을 하고 있다가 곧 오른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붙이고 손을 깍지끼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매우 기이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은 청정하고 미묘하기 제일입니다. 마땅히 무어라 이름하고 어떻게 받들어 가져야 하겠나이까.”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은 청정(淸淨)이라 이름하고 너는 마땅히 청정하게 이것을 가져라.”

아난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환희 하여 받들어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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