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주제별 정리/전법교육

여래의 설법에 있어 위되는 것

다르마 러브 2013. 8. 27. 10:37

사리불은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는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마음 가운데의 생각하는 것을 능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일반적인 법은 저는 능히 알고 있습니다. 여래는 저를 위하여 설법하시는데 그것은 갈수록 높고 갈수록 묘합니다. 검고 흰 법과 인연이 있고 인연이 없는 법과 비침이 있고 비침이 없는 법을 말씀하시어 여래의 설법은 갈수록 높고 갈수록 묘합니다. 저는 그 법을 듣고 낱낱의 법을 알아 그 법을 끝까지 압니다. 저는 여래 지진 등정각을 믿고 여래의 법은 잘 분별해야 할 것을 믿으며 여래는 모든 괴로움을 멸하여 성취한 것을 믿습니다. 모든 선법 가운데서 이것은 최상이 되는 것입니다. 세존의 지혜는 남김이 없고 신통은 남김이 없어 모든 세간에 있는 사문 바라문은 능히 여래와 더불어 같은 이가 없거늘 하물며 그 위에 빼어나고자 하겠나이까.”

세존의 설법에는 다시 위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제법(制法)이라 한다. 제법이란 四념처, 四정근(正勤), 四신족, 四선(禪), 五근(根), 五력(力), 七각의(覺意), 八현성도(賢聖道)를 말한다. 이것은 위없는 제(制)가 되는 것이다. 지혜는 남김이 없고 신통도 남김이 없어 모든 세간에 있는 사문 바라문은 다 여래와 같은 자도 없거늘 하물며 그 위에 빼어나고자 하겠는가.

세존의 설법에는 또 위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모든 입(入)을 제어함을 말하는 것이다. 제입(諸入)이란 눈의 빛, 귀의 소리, 코의 냄새, 혀의 맛, 몸의 촉감, 뜻의 법을 말하는 것이다. 과거의 여래, 지진, 등정각과 같은 분들도 또한 이 입(入)을 제어했으니 이른바 눈의 빛 내지 뜻의 법이요, 미래의 여래, 지진, 등정각도 또한 이 입을 제어하시니 이른바 눈의 빛 내지 뜻의 법이다. 이 법은 위가 없어 능히 지내 갈 자가 없다. 지혜는 남김이 없고 신통도 남김이 없어 모든 세간의 사문 바라문은 능히 여래와 더불어 같은 자가 없거늘 하물며 그 위에 빼어나고자 하겠는가.

세존의 설법에는 또 위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식입태(識入胎)라는 것이다. 입태란 一은 난입태(亂入胎), 난주(亂住), 난출(亂出)이요 二는 불란입하나, 난주, 난출이요 三은 불란입, 불란주하나 난출이요 四는 불란입, 불란주, 불란출이다. 저 불란입, 불란주, 불란출은 입태에 있어서 상등이다. 이 법이 위없는 법으로서 지혜는 남김이 없고 신통도 남김이 없어 모든 세간의 사문 바라문은 능히 여래와 더불어 같은 자가 없거늘 하물며 그 위에 빼어나고자 하겠는가.

여래의 설법에는 다시 위되는 것이 있으니 이른바 도(道)다. 이른바 도란 모든 사문 바라문이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혜의(定慧意) 삼매(三昧)에 들어가고 삼매의 마음을 따라 염각의(念覺意)를 닦을 때 욕(欲)을 의지하고 이(離)를 의지하고 멸진(滅盡)을 의지하고 출요(出要)를 의지하는 것이다. 정진(精進), 희(喜), 의, 정(定), 사각의(捨覺意)도 욕을 의지하고 이를 의지하고 멸진을 의지하고 출요를 의지한다. 이 법이 최상으로서 지혜는 남김이 없고 신통도 남김이 없어 모든 세간의 사문 바라문은 능히 여래와 더불어 같은 자가 없거늘 하물며 그 위에 빼어나고자 하겠는가.

여래의 설법에는 다시 위되는 것이 있다. 이른 바 멸(滅)이다. 멸이란 이른바 고멸지득(苦滅遲得)으로서 둘이 다 비루한 것이요, 고멸속득(苦滅涑得)으로서 다만 괴로움만이 비루한 것이요, 낙멸지득(樂滅遲得)으로서 오직 지(遲)만이 비루한 것이요, 낙멸속득(樂滅速得)으로서 그러나 널리 퍼지지 않나니 널리 퍼지지 않기 때문에 비루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지금의 여래 같은 분은 낙멸속득으로서 널리 퍼지고 내지 하늘과 사람이 그 신통 변화를 보는 것이다.”

사리불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의 설법은 미묘하기 제일이어서 밑으로 여자에 이르기까지 또한 능히 받아 가져서 유루(有漏)를 다하고 무루(無漏)를 이루어 마음이 해탈하고 지혜가 해탈하여 현재에 있어서 자신으로 증명을 얻어 그래서 생사가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서서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치어 뒷세상의 생명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래가 말씀하시는 위없는 멸(滅)입니다. 이 법은 위가 없어 지혜는 남김이 없고 신통도 남김이 없어 모든 세간의 사문 바라문은 능히 여래와 더불어 같은 자가 없거늘 하물며 그 위에 빼어나고자 하겠나이까.”

“여래의 설법에는 또 위되는 것이 있다. 이른바 말의 청정이다. 말의 청정이란 세존은 모든 사문 바라문에게 무익하고 허망한 말을 하지 않으며 말하되 이기기를 구하지 않고 또 편을 들지 않는다. 하는 말은 유화하고 때를 잃지 않으며 말을 헛되게 발하지 않나니 이것이 말의 청정이다. 이 법은 위가 없어 지혜는 남김이 없고 신통도 남김이 없어 모든 사문 바라문은 여래와 더불어 같은 자가 없거늘 하물며 그 위에 빼어나고자 하겠는가.

여래의 설법에는 다시 위되는 것이 있다. 이른바 견정(見定)이다. 지 견정이란 모든 사문과 바라문이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定意) 삼매에 들고 삼매의 마음을 따라 머리를 관(觀)하여 발에 이르고 발을 관하여 머리에 이르기까지 피부의 안팎은 다만 부정한 머리털, 털, 손톱, 발톱, 간, 허파, 창자, 밥통, 지라, 콩팥, 五장, 땀, 기름, 뼈골, 골, 똥, 오줌, 눈물의 냄새가 있어 그것은 부정(不淨)하여 하나도 남할 만한 것이 없다고 관한다. 이것이 초견정이다. 또 모든 사문 바라문이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삼매에 들고 삼매의 마음을 따라 껍질과 살등 바깥 모든 더러운 것을 없애고 오직 백골과 이빨을 관한다. 이것이 二견정이다. 또 모든 사문 바라문이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삼매에 들고 삼매의 마음을 따라 껍질과 살등 바깥 모든 더러운 것을 없애고 오직 백골과 잇발을 관한다. 이것이 二견정이다. 또 모든 사문 바라문이 갖가지 방편으로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을 따라 껍질과 살등 바깥 부정과 또 백골을 없애고 오직 심식(心識)이 어디에 있어 머무르는가를 관하여 그것은 금세에 있다, 후세에 있다, 금세에도 끊어지지 않고, 후세에도 끊어지지 않으며, 금세에도 해탈하지 못하고 후세에도 해탈하지 못하는 것을 관한다. 이것이 三견정이다.

또 모든 사문 바라문이 갖가지 방편으로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을 따라 피부와 살등 바깥 모든 부정을 없애고 또 백골을 없애고 다시 거듭 식(識)을 관찰하여 식은 후세에 있고 금세에는 있지 않고 금세에는 끊어지지마는 후세에는 끊어지지 않고 금세에는 해탈하지마는 후세에는 해탈하지 않는다고 관한다. 이것이 四견정이다. 또 모든 사문 바라문이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을 따라 피부와 살 등 바깥 부정을 없애고 또 백골을 없애고 다시 거듭 식을 관하여 그것은 금세에도 있지 않고 후세에도 있지 않아 둘을 함께 끊고 둘을 함께 해탈한다고 관한다. 이것이 五견정이다. 이 법은 위가 없어 지혜는 남김이 없고 신통도 남김이 없어 모든 세간의 사문 바라문은 여래와 더불어 같은 자가 없거늘, 하물며 그 위에 빼어나고자 하겠는가.

또 여래의 설법에는 다시 위되는 것이 있다. 이른바 상법(常法)을 말하는 것이다. 상법이란 모든 사문 바라문이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을 따라 세간의 二十의 성겁(成劫)과 패겁(敗劫)을 기억해 알아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세간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은 진실한 것이다. 그 이외는 허망하다. 무슨 까닭인가. 나의 기억하고 아는 것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 성겁과 패겁이 있는 줄을 안다. 그 밖의 과거는 나는 모른다. 미래의 성패도 나는 또한 모른다’고. 이 사람은 언제나 무지로써 말한다.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것은 첫째 상법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을 따라 四十의 성겁 패겁을 기억해 알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간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은 진실이다.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의 억식을 말미암기 때문에 성겁 패겁을 안다. 그러나 나는 다시 능히 과거의 성겁 패겁은 알지마는 나는 미래 겁의 성패는 모른다.’ 이것은 처음을 안다고는 말하지마는 마지막을 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 사람은 언제나 무지로써 말한다.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 이것이 진실이요 다른 것은 허망하다.’ 이것은 제 二의 상법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을 따라 八十의 성겁 패겁을 기억해 알고 그는 말한다. ‘이 세간은 항상되다. 다른 것은 허망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기억하고 아는 것을 말미암기 때문에 성겁 패겁이 있는 줄을 안다. 다시 과거의 성겁 패겁도 알고 또 미래 겁의 성패도 나는 다 안다.’ 이 사람은 언제나 무지로써 말한다.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다른 것은 허망이다’라고. 이것은 제 三의 상존법이다. 이 법은 위가 없어 지혜는 남김이 없고 신통도 남김이 없어 모든 세간의 모든 사문 바라문은 능히 여래와 같은 자가 없거늘 하물며 그 위에 빼어나고자 하겠는가.

여래의 설법에는 다시 위되는 것이 있다. 이른바 관찰이다. 관찰이란 이른바 사문 바라문이 있어 상(想)으로써 관찰하여 ‘저 마음은 어떻다. 이 마음은 어떻다.’하고. 그의 마음이 이렇게 생각할 때 혹은 허망이요 혹은 진실일 것이다. 이것을 제 一의 관찰이라 한다. 모든 사문 바라문이 상으로서 관찰하지 않고 혹은 하늘이나 귀신의 말을 듣고 그에게 말한다. ‘네 마음은 이렇고 네 마음은 이렇다’고. 이것도 또한 혹은 진실하고 혹은 허망일 것이다. 이것이 제 二의 관찰이다. 혹은 사문 바라문이 있어 상으로서도 관찰하지 않고 또 모든 하늘이나 귀신의 말도 듣지 않고, 스스로 자기 몸을 관찰하고 또 남의 말을 듣고 그에게 말하기를 ‘네 마음은 이렇고 네 마음은 이렇다’고. 이러한 관찰은 곧 진실한 것이다. 이것이 제 四의 관찰이다. 이 법은 위가 없어 지혜는 남김이 없고 신통도 남김이 없어 모든 세간의 사문 바라문은 여래와 같은 자가 없거늘 하물며 그 위에 빼어나고자 하겠는가.

여래의 설법에는 다시 위되는 것이 있다. 이른바 교계(敎誡)다. 교계란 혹 때로 사람이 있어 교계를 어기지 않아 유루(有漏)를 다하고 무루(無漏)를 이루어 마음이 해탈하고 지혜가 해탈하여 현재에 있어 몸소 증명을 얻음으로써 생사가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서고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쳐 뒷세상의 목숨을 받지 않는다. 이것을 제 一의 교계라 한다. 혹은 때로 사람이 있어 교계를 어기지 않고 五하결(下結)을 다함으로써 그는 멸도(滅度)하여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을 제 二의 교계라 한다. 때로 사람이 있어 교계를 어기지 않아 三결(結)을 다하고 간음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져서 사다함(斯陀含)을 얻어 이 세상에 돌아와 멸도를 취한다. 이것이 제 三의 교계다. 혹은 때로 사람이 있어 교계를 어기지 않아 三결을 다하고 수다원(須陀洹)을 얻어 이 세상에 七왕복을 한 뒤에는 반드시 도과(道果)를 얻어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제 四의 교계다. 이 법은 위가 없어 지혜는 남김이 없고 신통도 남김이 없어 모든 세간의 사문 바라문으로서는 여래와 더불어 같은 자가 없거늘 하물며 그 위에 빼어나고자 하겠는가.

여래의 설법에는 다시 위되는 것이 있다. 남을 위해 설법하여 계율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계율의 청정이란, 모든 사문, 바라문이 그 말하는 바는 지성이어서 두 말이 있지 않고 항상 스스로 공경하고 엄숙하여 잠을 없애고 간사와 아첨을 품지 않고 입으로는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세상 사람을 위하여 길흉을 점치지 않고 스스로 남에게서 얻은 것이라고 칭설(稱說)하여 남에게 보이어 남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좌선(坐禪)으로 지혜를 닦아 변재가 걸림이 없으며 생각을 오로지해 어지럽지 않고 부지런히 힘써 게으르지 않는다. 이 법은 위가 없어 지혜는 남김이 없고 신통도 남김이 없어 모든 세간의 사문 바라문으로는 여래와 더불어 같은 자가 없거늘 하물며 그 위에 빼어나고자 하겠는가.

여래의 설법에는 다시 위되는 것이 있다. 해탈의 지혜라는 것이다. 이른바 해탈의 지혜란 세존이 다른 인연으로 말미암아 속으로 스스로 생각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수다원, 이 사람은 사다함, 이 사람은 아나함(阿那含), 이 사람은 아라한이다’라고. 이 법은 위가 없어 지혜는 남김이 없고 신통도 남김이 없어 모든 세간의 사문 바라문으로서 여래와 더불어 같은 자가 없거늘 하물며 그 위에 빼어나고자 하겠는가.

여래의 설법에는 다시 위되는 것이 있다. 스스로 숙명을 아는 지증(智證)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이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 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을 따라 스스로 옛날의 무수한 세상일을 생각할 때 一생 二생 내지 백 천생의 성겁 패겁은 이렇게 무수한데 나는 어디서 나고 이름은 무엇이었고 성은 무엇이었으며 수명은 어떠했고 음식은 어떠했으며 고락은 어떠했다. 또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고 저기서 죽어 여기서 났다는, 약간 가지의 모양과 이렇게 스스로 숙명의 무수한 겁의 일을 기억하여 밤낮 항상 과거의 경력을 생각한다. 그래서 이것은 비무상(非無想)이라고 다 기억해 모두 안다. 이 법은 위가 없어 지혜는 남김이 없고 신통도 남김이 없어 모든 세간의 사문 바라문으로서는 여래와 더불어 같은 자가 없거늘 하물며 그 위에 빼어나고자 하겠는가.

여래의 설법에는 다시 위되는 것이 있다. 천안지(天眼智)라고 하는 것이다. 천안지란 모든 사문 바라문이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 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을 따라 모든 중생을 관할 때 죽은 사람, 산 사람, 좋은 몸, 나쁜 몸, 좋은 세계, 나쁜 세계, 혹은 잘나고 혹은 추한 것을 그 소행을 따라 다 보고 다 안다. 혹은 어떤 중생은 몸의 악행, 입의 악행, 뜻의 악행을 성취하여 현성을 비방하고 삿되고 거꾸로 된 소견을 믿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 三악도에 떨어지는 것과 혹은 어떤 중생은 몸으로 착함을 행하고 입으로 착함을 말하며 뜻으로 착함을 생각하여 현성을 비방하지 않고 소견이 바르고 믿음으로 행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 천상이나 인간에 태어나는 것을 하늘눈[天眼]의 깨끗함으로써 모든 중생을 관하여 여실히 알고 본다. 이 법은 위가 없어 지혜는 남김이 없고 신통도 남김이 없어, 모든 세간의 사문 바라문으로서는 여래와 같은 자가 없거늘 하물며 그 위에 빼어나고자 하겠는가.

여래의 설법에는 다시 위되는 것이 있다. 신족증(神足證)이라는 것이다. 신족증이란 모든 사문 바라문이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 삼매에 들어가 삼매의 마음을 따라 무수한 신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능히 한 몸을 변해 무수한 몸이 되고 무수한 몸을 합해 한 몸을 만들며 돌 벽에도 걸림이 없고 허공에서 가부좌하는 것은 마치 나는 새와 같으며 땅 속으로 출입하는 것은 마치 물에 있는 것 같고 물을 밟기는 땅과 같으며 몸으로 연기와 불꽃을 내는 것은 불 더미에 있는 것 같고 손으로 해를 만지며 선 채로 범천에 오른다. 만일 사문 바라문이 이 신족을 칭찬하면 나는 마땅히 그에게 대답하리라. ‘이 신족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신족은 비루하고 하열(下劣)하여 범부나 행할 것으로서 현성들의 닦아 익힐 것은 아니다’라고. 만일 비구가 모든 세간에 있어서 사랑하는 색(色)에 물들지 않고 이것을 떠나 정당한 것을 행동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현성의 신족이라 한다. 좋아하지 않는 색(色)에도 미워하지 않고 이것을 떠나 정당하게 행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현성의 신족이라 한다. 모든 세간에 있어서 사랑스러운 색(色)이나 사랑스럽지 않는 색(色) 두 가지를 함께 버리어 평등한 보호를 닦아 생각을 오로지해 잊지 않으면 이것을 이름해 현성의 신족이라 한다.

그것은 마치 세존의 정진하고 용맹하여 큰 지혜를 가지고, 지각(知覺)이 있어 제 一각(覺)을 얻기 때문에 등각(等覺)이라고 이름한 것과 같다. 세존은 또 탐욕을 즐기지 않고 비천한 범부들의 익힌 바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또 부지런히 애써 모든 고뇌를 받지 않는다. 세존은 만일 악한 법을 없애고자 한다면 각(覺)도 있고 관도 있으면서, 떠나서 기쁨과 즐거움을 내는 초선(初禪)에 논다. 그리하여 악한 법을 없앤다. 각도 있고 관도 있으면서 떠나서 기쁨과 즐거움을 내는 초선에 노는 것과 같이 二선, 三선, 四선도 또한 그와 같다. 그래서 정진하고 용맹하여 큰 지혜가 있고 지각이 있으면서 제 一각을 얻기 때문에 등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弊宿經 대정장 1/76 하~78 하;『한글 장아함경』 pp. 285~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