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주제별 정리/전법교육

사리불의 교화 사례 3. 60명 비구의 해탈

다르마 러브 2013. 8. 27. 16:1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둘레가 50유순(由旬)이요 깊이 또한 그와 같은 어떤 못이 있는데 거기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과 같다. 어떤 장부[士夫]가 털이나 풀이나 혹은 손톱으로 그 물을 뜬다면 모든 비구들아, 너희들 생각에는 어떠냐? 그 장부가 뜬 물이 많으냐, 못 물이 많으냐?"

비구들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 장부가 털이나 풀이나 손톱으로 뜬 물이 적습니다. 적다고 말할 것도 없으니, 그 못 물은 엄청나게 많기가 백천만 배나 되어 견줄 수도 없습니다."

"그와 같이 모든 비구들아, 진리를 본 사람이 끊은 온갖 괴로움도 그 못 물과 같으니라. 그리고 그것은 미래에도 영원히 다시 나지 않느니라."

그 때 세존께서는 이 법을 말씀하신 뒤 방으로 들어가 좌선하셨다. 이 때 존자 사리불이 대중 가운데 앉아 있다가 세존께서 방으로 들어가신 뒤에 모든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세존께서 오늘 못에 비유해 하신 말씀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거룩한 제자가 진리를 완전하게 본다면 빈틈없는 한결같음[無間等]을 그 과보로 얻기 때문입니다. 혹 어떤 범부는 삿된 소견인 신견(身見)․근본신견(根本身見)․집신견(集身見)․생신견(生身見)이 일어나, 이른바 근심하고 기가 죽거나 기뻐하고 아끼며 나[我]를 말하고, 중생을 말하며, 기특한 일과 자랑스러운 일을 말합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삿된 소견을 모두 없애버리고 그 근본을 끊으면 마치 다라 나무를 자른 것과 같아 미래에 다시는 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비구들이여, 이른바 '진리를 본 거룩한 제자들은 위의 여러 가지 사특한 소견을 끊어 미래에 영원히 다시 나지 않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은 '색은 나다. 나와 다르다. 나는 색 안에 있다. 색은 나 안에 있다'고 보며, '수․상․행도 마찬가지이며, 식은 나다. 나와 다르다. 나는 식 안에 있다. 식은 나 안에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색(色)은 곧 나[我]다'라고 보는가? 일체는 땅이라고 관찰하는 삼매[地一切入處正受]를 얻어 관찰한 뒤에는 '땅은 곧 나요, 나는 곧 땅이다. 나와 땅은 오직 하나요, 둘이 없으며, 다르지도 않고, 나눌 수도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일체는 물․불․바람․파랑․노랑․빨강․하양이라고 관찰하는 삼매를 얻어 관찰한 뒤에는 '행(行)은 곧 나요, 나는 곧 행이다. 그것들은 오직 하나요 둘이 없으며, 다르지도 않고, 나눌 수도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입처(入處)에 대해서 낱낱이 나라고 헤아리나니, 이것이 '색은 곧 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색(色)은 나[我]와 다르다'고 보는가? 만일 그가 수(受)를 곧 나[我]라고 본다면, 그는 수를 곧 나라고 본 뒤에는 색(色)을 곧 내 것[我所]이라고 보며, 혹은 상․행․식을 곧 나라고 보고 색(色)을 곧 내 것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나 안에 색이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수(受)를 곧 나라고 보고는 색(色)은 나 안에 있다고 보며, 혹은 상․행․식을 곧 나라고 보고는 색은 나 안에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색 안에 나가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수(受)가 곧 나로서 색 안에 머무르고, 색에 들어가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며, 상․행․식이 곧 나로서 색 안에 머무르고 온몸에 두루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색 안에 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수(受)는 곧 나[我]다'라고 보는가? 이른바 6수신(受身)이니, 눈으로 부딪쳐 생기는 수와 귀․코․혀․몸․뜻으로 부딪쳐 생기는 수입니다. 이 6수신에 그 하나 하나가 곧 나요, 나는 곧 수라고 보나니, 이것이 '수는 곧 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수는 나와 다르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을 곧 나라고 보고는 수를 내 것이라고 보며, 상․행․식을 곧 나라고 보고는 수를 내 것이라고 보나니, 이것이 '수는 나와 다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안에 수가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을 곧 나라고 보고는 수는 그 안에 있다고 보며, 상․행․식을 곧 나라고 보고는 수는 그 안에 있다고 보나니, 이것이 '나 안에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수 안에 나가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이 곧 나로서 수 안에 머무르고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며, 상․행․식이 곧 나로서 수 안에 머무르고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나니, 이것이 '수 안에 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상(想)은 곧 나[我]다'라고 보는가? 이른바 6상신(想身)이니, 눈으로 부딪쳐 생기는 상과 귀․코․혀․몸․뜻으로 부딪쳐 생기는 상입니다. 이 6상신 하나하나를 곧 나라고 보나니 이것이 '상은 곧 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상은 나와 다르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을 곧 나라고 보고는 상은 곧 내 것이라 보며, 식(識)을 곧 나라고 보고는 상을 곧 내 것이라고 보나니, 이것이 '상은 나와 다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안에 상이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은 곧 나로서 상은 그 안에 머무른다고 보며, 수․행․식이 곧 나로서 상은 그 안에 머무른다고 봅니다.

어떻게 '상 안에 나가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이 곧 나로서 상 안에 머무르고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나니15), 이것이 '상 안에 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행(行)은 곧 나[我]다'라고 보는가? 이른바 6사신(思身)이니, 눈으로 부딪쳐 생기는 의도[思]와 귀․코․혀․몸․뜻으로 부딪쳐 생기는 의도입니다. 이 6사신 하나하나를 곧 나라고 보나니 이것이 '행은 곧 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행은 곧 나와 다르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을 곧 나라고 보고는 행은 곧 내 것이라고 보며, 수․상․식을 곧 나라고 보고는 행은 곧 내 것이라고 보나니, 이것이 '행은 곧 나와 다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안에 행이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은 곧 나로서 행이 그 안에 머무른다고 보며, 수․상․행16)․식이 곧 나로서 행은 그 안에 머무른다고 보나니, 이것이 '나 안에 행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행 안에 나가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이 곧 나로서 행 안에 머물러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며, 이른바 수․상․식이 곧 나로서 행 안에 머물러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나니 이것이 '행 안에 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식(識)은 곧 나[我]다'고 보는가? 이른바 6식신(識身)이니, 안식과 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입니다. 이 6식신 하나하나를 곧 나라고 보나니 이것이 '식은 곧 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식은 나와 다르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을 곧 나라고 보고는 식은 곧 내 것이라고 보며, 수․상․행을 곧 나라고 보고는 식은 곧 내 것이라고 보나니, 이것이 '식은 곧 나와 다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안에 식이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을 곧 나라고 보고는 식은 그 안에 머무른다고 보며, 수․상․행을 곧 나라고 보고는 식은 그 안에 머무른다고 보나니, 이것이 '나 안에 식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식 안에 나가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이 곧 나로서 식 안에 머무르고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며, 수․상․행이 곧 나로서 식 안에 머무르고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나니, 이것이 '식 안에 나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거룩한 제자들은 네 가지 진리를 보아 빈틈없는 한결같음[無間等]을 얻고, 모든 삿된 소견을 끊어 미래에도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색은 과거에 속한 것이건 미래에 속한 것이건 현재에 속한 것이건, 안에 있는 것이건 밖에 있는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아름답건 추하건, 멀리 있는 것이건 가까이 있는 것이건, 그것은 한결같이 쌓이고 모인 것이니 다음과 같이 관찰합니다. 즉 '일체는 무상하다. 일체는 괴롭다. 일체는 공이다. 일체는 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사랑하고 즐거워하여 거두어 받아들이거나, 보호하며 지키지 말아야 한다. 수․상․행․식에 있어서도 또한 그것을 사랑하고 즐거워하여 거두어 받아들이거나, 보호하며 지키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관찰합니다.

이렇게 관찰한 뒤에는 마음을 잘 잡아매고 법에 어리석지 않으며 다시 관찰하고 정진하여 모든 게으른 마음을 떠나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어, 몸과 마음이 고요히 쉬고 고요함과 평정에 머무릅니다. 그래서 모든 도품(道品)을 갖추고 수행이 만족하여 길이 모든 악을 여읩니다. 태우지 않은 것이 없고 소멸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소멸해 일어나지 않고, 감해서 더하지 않으며, 끊어서 나지 않고, 나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열반을 깨달아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압니다."

사리불이 이 법을 설명했을 때, 60명의 비구들은 모든 번뇌를 받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였다.

毛端經 대정장 2/34 상~35 상; 한글대장경 잡아함경 인터넷판, pp. 180~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