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는 떠들기를 좋아하거나 떠들기를 즐겨하거나 떠드는 자리에 모이지 않아야 하고, 무리 짓기를 좋아하거나 무리 짓기를 즐겨하거나 무리 짓는 자리에 모이지 않아야 하며, 무리를 떠나려고 하지 않거나 멀리 떠난 곳에서 혼자 있기를 즐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어떤 비구가 떠들기를 좋아하며 떠들기를 즐겨하고 떠드는 자리에 모이며, 무리 짓기를 좋아하고 무리 짓기를 즐겨하며 무리 짓는 자리에 모이며, 무리를 떠나려 하지 않고 멀리 떠나 혼자 지내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는 이른바 생명의 즐거움 거룩한 즐거움 욕심이 없는 즐거움 떠난 즐거움 쉬는 즐거움 바르게 깨닫는 즐거움 먹음이 없는 즐거움 나고 죽지 않는 즐거움 등 이러한 즐거움을 쉽게 얻으려 하더라도 끝내 그리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난아, 만일 어떤 비구가 떠들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떠들기를 즐겨하지 않고 떠드는 자리에 모이지 않으며, 무리 짓기를 좋아하지 않고 무리 짓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무리 짓는 자리에 모이지 않고, 무리를 떠나기를 좋아하고 항상 멀리 떠난 곳에서 혼자 있기를 즐겨한다고 하자. 그는 이른바 생명의 즐거움 거룩한 즐거움 욕심이 없는 즐거움 떠나는 즐거움 쉬는 즐거움 바르게 깨닫는 즐거움 먹음이 없는 즐거움 나고 죽지 않는 즐거움 등 이러한 즐거움을 쉽게 얻으려면 반드시 그리 될 수 있느니라.
아난아, 비구는 떠들기를 좋아하거나 떠들기를 즐겨하거나 떠드는 자리에 모이지 않아야 하고, 무리 짓기를 좋아하거나 무리 짓기를 즐겨하거나 무리 짓는 자리에 모이지 않아야 하며, 무리를 떠나기를 좋아하고, 멀리 떠난 곳에서 혼자 있기를 즐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어떤 비구가 떠들기를 좋아하고 떠들기를 즐겨하며 떠드는 자리에 모이고, 무리 짓기를 좋아하고 무리 짓기를 즐겨하며 무리 짓는 자리에 모이며, 무리를 떠나려 하지 않고 멀리 떠나 혼자 지내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는 잠깐 동안의 즐거운 마음의 해탈이나,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으려 하더라도 끝내 그리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난아, 만일 어떤 비구가 떠들기를 좋아하지 않고 떠들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떠드는 자리에 모이지 않고, 무리 짓기를 좋아하지 않고 무리 짓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무리 짓는 자리에 모이지 않으며, 무리 떠나기를 좋아하고 항상 멀리 떠난 곳에서 혼자 있기를 즐겨한다고 하자. 그는 잠깐 동안의 즐거운 마음의 해탈이나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으려 하면 반드시 그리 될 수 있느니라.
왜냐 하면 나는 나를 즐겁게 하는 어떠한 색(色)도 보지 못하였다. 그 색은 무너지고 변하여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슬픔 울음 근심 괴로움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나는 이 곳이나 다른 곳에 머무르면서 바르게 깨닫고 모두 깨달았나니, 이른바 색에 대한 모든 생각을 넘어서서 바깥의 허공을 관찰하였다.
아난아, 나는 그 곳에 머무른 뒤에 기쁨이 생겼다. 나는 이 기쁨을 모두 몸으로 깨닫고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로서 기쁨이 생기고 고요함이 생기고 즐거움이 생기고 선정[定]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이 선정을 전부 몸으로 깨닫고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가 되었다. 아난아, 혹 어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함께 나를 찾아오면, 나는 곧 그들을 위하여 멀리 떠나 욕심이 없음을 즐기는 이런 마음을 쓰고, 다시 그들에게 이 법을 설명하여 그들에게 권하고 그들을 돕는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공(空)을 많이 행하려 한다면 그 비구는 마땅히 마음을 꼭 붙잡아 거기에 머물러 일정하게 하여야 한다. 그는 마음을 붙잡아 거기에 머물러 일정하게 한 뒤에 반드시 마음의 공을 생각하여야 한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나는 마음을 꼭 붙잡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일정하게 하지 않고도 마음의 공을 생각한다'고 말한다면, 그 비구는 스스로 크게 피로하기만 할 것이다.
아난아, 비구는 어떻게 마음을 꼭 붙잡고 거기에 머물러 일정하게 하는가? 비구가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그 몸을 모두 담그고 적시면 두루 충만해져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아난아, 마치 사람이 목욕하는 그릇에 가루비누를 담고 거기에 물을 섞어 환을 만들고 그 몸을 담그고 적시면 두루 충만해져 안팎에 골고루 빠진 곳이 없게 되는 것과 같다. 비구도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그 몸을 모두 담그고 적시면 두루 충만해져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되느니라.
아난아, 비구는 이와 같이 마음을 꼭 붙잡아 거기에 머물러 일정하게 한다. 그는 마음을 꼭 붙잡아 거기에 머물러 일정하게 한 뒤에는 마땅히 마음의 공(空)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나 마음의 공을 생각한 뒤에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마음의 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아난아, 만일 비구가 관찰할 때, 마음의 공을 생각하지만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마음의 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비구는 마땅히 바깥의 공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가 바깥 공을 생각한 뒤에도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바깥의 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아난아, 만일 비구가 관찰할 때, 바깥의 공을 생각하지만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고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바깥의 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비구는 마땅히 마음의 공과 바깥의 공을 함께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가 안팎의 공을 생각한 뒤에도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안팎의 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아난아, 만일 비구가 관찰할 때, 안팎의 공을 생각하지만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안팎의 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비구는 마땅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생각한 뒤에도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아난아, 만일 비구가 관찰할 때, 움직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지만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비구는 이런 저런 마음을 정(定)으로 다루고 또 다루고, 익히고 또 익히며, 부드럽고 또 부드럽게 하여 좋고 유쾌하고 온화하게 하고 멀리 떠난 즐거움을 누리게 해야 한다. 만일 이런 저런 마음을 이런 저런 정으로 다루고 또 다루고, 익히고 또 익히며, 부드럽고 또 부드럽게 하여, 좋고 유쾌하고 온화하게 되고 멀리 떠난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면, 마땅히 마음의 공을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그는 마음의 공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마음의 공을 이해하게 된다. 아난아, 이와 같이 비구가 관찰할 때, 마음의 공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마음의 공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한다.
아난아, 비구는 마땅히 바깥의 공을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그는 바깥의 공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바깥의 공을 이해하게 된다. 아난아, 이와 같이 비구가 관찰할 때, 바깥의 공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바깥의 공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한다.
아난아, 비구는 마땅히 안팎의 공을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그는 안팎의 공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안팎의 공을 이해하게 된다. 아난아, 이와 같이 비구가 관찰할 때, 안팎의 공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안팎의 공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마땅히 움직이지 않음을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그는 움직이지 않음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아난아, 이와 같이 비구가 관찰할 때, 움직이지 않음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움직이지 않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한다.
아난아, 그 비구가 이 곳에 머무르면서 만일 그 마음이 거닐고자 하면, 그 비구는 선실(禪室)에서 나와 바깥의 선실 그늘을 거닐며, 모든 근을 안에 머물게 하고 마음이 밖으로 향하지 않게 하며 뒤에도 앞의 생각을 계속해야 한다. 이와 같이 거닌 뒤 마음 속에 탐욕과 슬픔과 착하지 않은 악법이 생기지 않으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그 비구가 이 곳에 머물면서 만일 그 마음이 앉아서 선정에 들려고 하면, 그 비구는 거닐기를 그만두고 거니는 길 머리로 가서 니사단을 펴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야 한다. 이와 같이 앉아서 선정에 든 뒤 탐욕과 슬픔과 착하지 않은 악법이 생기지 않으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한다.
아난아, 그 비구가 이 곳에 머물면서 만일 그 마음이 무엇을 생각하고자 하면, 그 비구는 만일 그것이 욕심 성냄 해침의 세 가지 착하지 않은 악한 생각이면 그 세 가지 착하지 않은 악한 생각을 생각하지 말고, 만일 그것이 욕심이 없고 성냄이 없으며 해침이 없는 세가지 착한 생각이면 그 세 가지 착한 생각을 마땅히 생각하여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뒤 마음 속에 탐욕과 슬픔과 착하지 않은 악법이 생기지 않으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한다.
아난아, 그 비구가 이 곳에 머물면서 그 마음이 만일 무엇을 말하고자 하면, 그 비구는 만일 그 이야기가 거룩하지 않은 이야기로서 이치와 서로 걸맞지 않는 이른바 왕론(王論) 적론(賊論) 투쟁론(鬪爭論) 음식론(飮食論) 의복론(衣服論) 부인론(婦人論) 동녀론(童女論) 음녀론(淫女論) 세간론(世間論) 사도론(邪道論) 해중론(海中論)과 같은 여러 가지 축생론(畜生論)이면 논하지 말고, 만일 그 이야기가 거룩한 논으로서 이치와 서로 걸맞아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모든 음개(陰蓋)가 없는 이른바 시론(施論) 계론(戒論) 정론(定論) 혜론(慧論) 해탈론(解脫論) 해탈지견론(解脫知見論) 점손론(漸損論) 불회론(不會論) 소욕론(少欲論) 지족론(知足論) 무욕론(無欲論) 단론(斷論) 멸론(滅論) 연좌론(燕坐論) 연기론(緣起論)과 같은 사문의 이야기이면 논하여야 한다. 이렇게 논한 뒤 마음 속에 탐욕과 슬픔과 착하지 않은 악법이 생기지 않으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하느니라.
또 아난아, 즐거워할 만하고 마음으로 생각할 만하며 애욕과 서로 걸맞는 5욕(欲)의 공덕(功德)이 있다. 그것은 눈으로 빛깔을 지각하고 귀로 소리를 지각하며, 코로 냄새를 지각하고 혀로 맛을 지각하며, 몸으로 촉감을 지각하는 것이다. 만일 비구의 마음이 거기에 이르면 그는 '이 5욕의 공덕은 욕의 공덕에 따라 내 마음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하고 관찰하여야 한다. 왜냐 하면 이 5욕의 공덕은 앞도 없고 뒤도 없이 그 욕의 공덕을 따라 마음에서 활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관찰할 때, 이 5욕의 공덕은 그 욕의 공덕을 따라 마음에서 활동하는 것임을 안다면, 그 비구는 이런 저런 욕의 공덕을 항상됨이 없다고 관찰하고 쇠해서 없어지는 것이라 관찰하며, 욕심낼 것이 없다고 관찰하고 끊어 없애야 할 것이라 관찰하며, 끊어 버리고 떠나야 할 것이라고 관찰할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이 5욕의 공덕에 욕심이 생기고 물듦이 있으면, 그는 곧 그것을 없애버릴 것이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이렇게 관찰할 때, 이 5욕의 공덕에 탐욕이 있고 물듦이 있는 줄 알아 그것을 이미 끊었다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하느니라.
다시 아난아, 5성음(盛陰)이 있으니 색성음(色盛陰)과 각(覺) 상(想) 행(行) 식(識)의 성음(盛陰)이다. 이른바 비구는 '이것은 색(色)이요, 이것은 색의 원인[色集]이요, 이것은 색의 멸[色滅]이다. 각 상 행도 또한 그러하며, 이것은 식(識)이요, 이것은 식의 원인[識集]이요, 이것은 식의 멸[識滅]이다'라고 이와 같이 흥하고 쇠함을 관찰한다. 만일 이 5성음에 아만(我慢)이 있으면 그는 곧 그것을 없앤다. 아난아, 만일 어떤 비구가 이와 같이 관찰할 때, 5음(陰)에 아만이 이미 없어진 줄을 알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이 법은 한결같이 옳고 한결같이 즐거우며 한결같이 생각해야 할 것으로서, 번뇌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악마도 이르지 못하고 악도 이르지 못하며, 모든 착하지 않은 악법과 더러움과 미래 생명의 근본과 번거롭고 극심한 괴로움의 과보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원인이 되는 것도 또한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 이것이 이른바 방일하지 않음을 성취한 것이다. 왜냐 하면 이 방일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모든 여래 무소착 등정각은 깨달음을 얻었고, 방일하지 않은 근(根)으로 인하여 한량없는 착한 법이 나고, 혹은 도품(道品)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마땅히 이렇게 배워야 하니, '나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을 성취하리라'고 그렇게 배워야 한다. 아난아, 믿음이 있는 제자가 무슨 까닭으로 목숨이 다하도록 세존을 따라 행하고 받들어 섬기느냐?"
존자 아난이 세존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시고 법의 주인이시며, 법은 세존으로부터 나옵니다. 원하옵건대 말씀하여 주소서. 저희들이 그것을 들으면 그 뜻을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곧 말씀하셨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그것을 잘 기억하라. 내가 너를 위해 자세히 분별해 말하리라."
존자 아난은 분부를 받고 경청하였다.
"아난아, 그 정경(正經)과 가영(歌詠)과 기설(記說) 때문에 믿음이 있는 제자가 목숨이 다하도록 세존을 따라 행하고 받들어 섬기는 것이 아니다. 아난아, 그런 법은 다만 저들이 오랫동안 자주 듣고 천 번이나 외워 익히며 마음으로 관찰하고 밝은 지혜로 깊이 통달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만일 그 논(論)이 이치와 상응하는 성인의 논으로서, 마음을 부드럽고 연하게 하며 모든 음개(陰蓋)를 없애는 이른바 시론 계론 정론 혜론 해탈론 해탈지견론 점손론 불회론 소욕론 지족론 무욕론 단론 멸론 연좌론 연기론이면 이것은 바로 사문들이 논해야 할 것이다. 이것 때문에 믿음이 있는 제자가 목숨이 다하도록 세존을 따라 행하고 받들어 섬기는 것이다.
아난아, 다음과 같이 하면 번잡한 스승이 되고, 번잡한 제자가 되며, 번잡한 범행이 된다. 아난아, 어떤 자를 번잡한 스승이라 하는가? 혹 어떤 스승은 세상에 나와 꾀하고 생각하는 일이 있어 꾀하고 생각하는 땅에 머물며, 생각하고 관찰하는 것이 잡되고,, 범인이지만 말재주는 있다. 그는 일 없는 곳[無事處 : 阿蘭若]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며,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다. 혹은 그런 곳에 살면서 악을 멀리 여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기운이 왕성한 마음을 얻어 현재에서 즐겁게 산다. 그가 악을 멀리 여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안온하고 쾌락하게 노닌 뒤에 제자를 데리고 돌아오면 범지 거사 마을의 백성들이 따른다. 그는 제자를 데리고 돌아와 범지 거사 마을의 백성들이 따른 뒤에는 곧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와 같은 자를 번잡한 스승이라 하는데, 이것은 착하지 않은 악법이요, 더러운 것으로서 미래에 존재하는 근본이 되고, 번거롭고 뜨거운 괴로움의 과보가 되며, 생 노 병 사의 원인이 되는 재앙이니, 이런 자를 번잡한 스승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어떤 자를 번잡한 제자라고 하는가? 그 스승의 제자들은 멀리 떠나기를 배운다. 그들은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서 살며,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다. 혹은 그런 곳에 살면서 멀리 떠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기운이 왕성한 마음을 얻어 현재 세상에서 즐겁게 산다. 그가 멀리 떠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안온하고 쾌락하게 노닌 뒤에 제자를 데리고 돌아오면 바라문 거사 마을의 백성들이 따른다. 그는 제자를 데리고 돌아와 바라문 거사 마을의 백성들이 따른 뒤에는 곧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와 같은 자를 번잡한 제자라고 하는데 이것은 착하지 않은 악법이 되고, 더러운 것으로서 미래 생명의 근본이 되며, 번거롭고 뜨거운 괴로움의 과보가 되고, 생 노 병 사의 원인이 되는 재앙이니, 이런 자를 번잡한 제자라 하느니라.
아난아, 어떤 것을 번잡한 범행이라 하는가? 만일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면 그는 무소착(無所著) 등정각(等正覺) 명행성위(明行成爲)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도법어(道法御) 천인사(天人師) 불중우(佛衆祐)라 불린다. 그는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다. 아난아, 여래는 무엇 때문에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가?"
존자 아난이 세존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시고, 법의 주인이시며, 법은 세존으로부터 나옵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설하여 주십시오. 들으면 그 뜻을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곧 말씀하셨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내가 너를 위해 두루 분별해 말하리라."
존자 아난은 분부를 받고 경청하였다.
"아난아, 여래는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고자 하고, 아직 거두지 못한 것을 거두고자 하며,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고자 하기 때문에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 것이 아니다. 아난아, 여래는 다만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 것이다. 첫째는 현재 스스로 즐겁게 살고자 함이요, 둘째는 후세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기 때문이다.
혹 후세에 태어나는 어떤 사람은 여래를 본받아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을 것이다. 아난아, 여래는 이 때문에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 것이다.
혹은 그는 그런 곳에 살면서 악을 멀리 여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기운이 왕성한 마음을 얻어 현재에 즐겁게 산다. 그가 악을 멀리 여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안온하고 쾌락하게 노닌 뒤에 범행을 지니고 돌아오면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따른다. 그는 범행을 지니고 돌아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따르더라도 교만하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아난아, 만일 그가 움직이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여 징험을 얻었다. 나는 그에게는 장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가 4증상심(增上心)을 얻어 현재 즐겁게 산다면 그것은 본래 꾸준히 힘써 방일함이 없이 노닐었기 때문이요, 거기에 혹 실수가 있더라도 그것은 제자가 많이 모였기 때문이다.
또 아난아, 그 스승의 제자들도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 것을 본받는다. 혹은 그런 곳에 살면서 멀리 떠나 정근(精勤)을 배우고 4증상심을 얻어 현재 즐겁게 산다. 그들이 멀리 떠나 꾸준히 힘써 안온하고 쾌락하게 노닌 뒤에는 범행을 지니고 돌아오면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따른다. 그러나 그들은 범행을 지니고 돌아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따르면 곧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와 같은 것을 번잡한 범행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착하지 않은 악법이고, 더러운 것으로서 미래 존재의 근본이 되며, 번거롭고 뜨거운 괴로움의 과보가 되고, 생 노 병 사의 원인이 되는 재앙이니, 이것을 번잡한 범행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번잡한 스승과 번잡한 제자보다도 이 번잡한 범행이 더 옳지 못하고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며, 사랑할 만한 것이 아니요, 가장 마음으로 생각할 것이 못 된다.
아난아, 그러므로 너희들은 나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아난아, 어떤 것이 제자가 스승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인가? 만일 스승이 제자들을 위해 설법하고, 가엾이 여겨 불쌍하게 생각하며, 진리를 구하고 요익(饒益)을 구하며, 안온과 쾌락을 구하여 자비심을 낸다면, 이것은 요익을 위하고 쾌락을 위하며 요익의 즐거움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만일 그 제자가 공경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며 지혜를 세우지 않고 그 마음이 법과 그 다음 법으로 향해 가지 않으며, 바른 법을 받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며 능히 선정[定]을 얻지 못하면, 이러한 제자는 스승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니라.
아난아, 어떤 것이 제자가 스승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인가? 만일 스승이 제자를 위해 설법하고, 가엾이 여기고 불쌍하게 생각하며, 진리를 구하고 요익을 구하며, 안온과 쾌락을 구하여 자비심을 낸다면, 이것은 요익을 위하고 쾌락을 위하며 요익의 즐거움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 제자가 공경하고 순종하여 지혜를 세우고, 그 마음이 법과 그 다음 법으로 향해 가며, 바른 법을 받아 가지고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으며 능히 선정을 얻으면, 이러한 제자는 스승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원망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아난아, 너희들은 나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왜냐 하면 나는 도공(陶工)이 기와를 만들듯이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난아, 내가 말하는 것은 지극히 엄하고 급하며, 지극히 괴로운 것이다. 만일 진실히 가지는 자라면 반드시 거기에 머무르게 될 것이니라."
大空經 대정장 1/738 상~740 하; 한글대장경 중아함경 인터넷판, pp. 1424~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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