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주제별 정리/다툼과 참회ㆍ계율

계율정신 (14) 위없는 명행의 구족

다르마 러브 2013. 8. 29. 06:32

다만 聖戒를 닦아 染着하는 마음이 없이 안으로 희락을 가진다. 눈은 비록 色을 대하나 相을 취하지 않는다. 눈은 색에 얽매임이 없고 견고하고 寂然하여 탐착하는 바가 없다. 또 걱정이나 근심이 없어 모든 악에 누설시키지 않고 戒品을 굳게 가지어 眼根을 잘 보호하나니 귀, 코, 혀, 몸, 뜻도 또한 그와 같이하여 六觸을 제어하고 보호하고 항복 받아 안온을 얻게 하나니 마치 평지에 四馬의 수레를 멍에하고 좋은 마부가 채찍을 잡고 억제하여 수레바퀴가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비구도 또한 그와 같아 六根의 말을 몰고 안온하여 실수가 없다. 그는 이와 같은 聖戒를 가져 깨끗한 모든 根을 얻은 것이다. 음식은 족한 줄 알고 또한 맛을 탐하지 않으며 몸을 길러 괴로움과 근심을 없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거만하지 않고 그 몸을 그르게 하여 옛 괴로움은 없애고 새 괴로움은 나지 못하게 하며 힘은 있고 일은 없이 그 몸을 안락하게 한다. 마치 사람이 부스럼에 약을 발라 곧 부스럼을 낫게 하고 모양을 내어 스스로 잘난 체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는 이와 같이 음식은 몸을 지탱하면 족하고 교만과 방자를 부리지 않는다. 또 수레에 기름을 쳐 잘 돌아가게 하고 그래서 운전하여 갈 곳으로 가는 것과 같다. 비구도 또한 이와 같아 음식은 몸을 지탱하면 족하고 도를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납아, 비구는 이와 같이 聖戒를 성취하여 깨끗한 모든 根을 얻었다. 음식은 족한 줄 알고 저녁과 새벽에 부지런히 닦아 도를 깨닫고 또 낮에는 다니거나 앉았거나 항상 일심으로 생각하여 모든 陰蓋를 없애느니라. 그는 초저녁에도 혹은 다니거나 혹은 앉아 일심으로 모든 음개를 없애며 한밤중에 이르러서는 오른 겨드랑이로 비스듬히 눕는다. 그 때에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을 묶어 밝음에 두어 조금도 어지러움이 없다. 그래서 새벽이 되면 곧 일어나 생각한다. 혹은 다니거나 혹은 앉거나 항상 일심으로 생각하여 온갖 음개를 없앤다. 비구는 이러한 聖戒를 구족하여 깨끗한 모든 根을 얻는다. 음식의 족함을 안다. 초저녁이나 새벽에 부지런히 닦고 깨달아 항상 생각하여 일심이 되어 어지러움이 없다. 비구여, 어떤 것이 생각이 어지러움이 없는 것인가. 이러한 비구는 內身身觀을 부지런히 닦아 게으르지 않고 기억하여 잊지 않으며 세상의 탐욕과 걱정을 없앤다. 또 外身身觀, 內外身辛觀을 부지런히 닦아 게으르지 않고 기억하여 잊지 않으며 세상의 탐욕과 걱정을 버린다. 수, 의, 법(受意法)의 관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을 비구의 생각이 어지러움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일심이라 하는가. 이러한 비구는 혹은 걸어다니거나 드나들거나 좌우를 돌아보거나 몸을 굽혔다 펴거나 위를 쳐다보고 밑을 내려다보거나 옷을 입거나 바루를 가지고 음식을 받거나 대소변이나 잠자거나 깨거나 앉거나 서거나 말하거나 잠자코 있거나 일체의 때에 있어서 항상 생각하여 威儀를 잃지 않는다. 이것을 일심이라 한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대중과 함께 갈 때에 혹은 앞에서 가고 혹은 가운데나 뒤에 있어서 항상 안온함을 얻어 두려움이 없는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도 또한 이와 같아서 걸어다닐 때나 드나들 때나 말하거나 잠자코 있을 때나 항상 일심으로 생각하여 근심과 두려움이 없다.

비구는 이와 같은 聖戒를 가져 깨끗한 모든 根을 얻는다. 음식은 止足을 알고 저녁이나 새벽이나 정근하고 깨달아서 항상 생각하기를 일심으로 하여 錯亂이 없느니라. 고요한 곳이나 나무 밑이나 무덤 사이에 있기를 즐겨 하고 혹은 산굴에 혹은 한데 및 거름 무데기 사이에 있으면서 때가 되면 걸식하고 돌아와서는 손발을 씻는다. 가사와 바루를 정돈해 두고 가부좌로 앉아 몸을 단정히 하고 뜻을 바루어 생각을 묶어 앞에 둔다. 간탐하는 마음을 없애어 함께 하지 않고 성내는 마음을 없애서 怨結이 없다. 마음은 청정에 머물러 항상 자비를 품고 수면을 제거하여 생각을 매여 밝음에 있어 생각에 어지러움이 없고 掉戱心을 끊어 없애어 함께 하지 않는다. 안으로 寂滅을 행하고 도희심을 없애며 의혹을 끊어 없애고 의심의 그물을 넘어 그 마음이 전일하여 착한 법에 있다. 비유하면 아이 종이 양반의 성을 받고 안온하고 해탈하여 종의 고역을 벗어나 그 마음이 환희 하여 다시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남의 돈을 빌어 장사하여 큰 이익을 얻고 돌아와 본 주인의 재물을 돌려주고도 남는 재산이 쓰기에 넉넉하여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원래 남의 돈을 빚내어 뜻대로 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이제 이익을 얻고 돌아와 본 주인에게 돈을 돌려주고도 남은 재산이 쓰기에 족하다.’하고 다시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어 큰 환희심을 내는 것과 같다.

또 사람이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병이 나아 음식이 소화도 잘되고 원기도 완전히 회복되었을 때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병을 앓다가 이제 병이 나았다. 음식 소화도 잘되고 원기도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하고 다시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어 크게 기뻐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감옥에 갇히었다가 무사히 옥에서 나왔을 때에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아까는 구속되었다가 이제는 이미 해탈했다.’고 하고 다시는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이 크게 기뻐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많은 재보를 가지고 큰 광야을 지날 때 도둑을 만나는 일이 없이 안온히 지났다. 그는 생각하기를 ‘나는 재보를 가지고 이 험난한 곳을 지났다.’고 하고 다시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이 크게 기뻐하면서 그 마음이 안락한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가 五盖로써 스스로 덮어 항상 걱정과 두려움을 품는 것도 또한 이와 같나니 그는 빚진 사람, 오랫동안 앓는 사람, 감옥에 있는 사람, 큰 광야를 가는 사람과 같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아직 모든 음개의 마음을 떠나지 못해 덮임과 어둠에 지혜의 눈이 밝지 못함을 보고 그는 곧 정근하여 탐욕과 악함의 불선의 법을 버린다. 그리하여 覺觀을 함께 하고 離生喜樂의 初禪에 들어감을 얻는다. 그 희락이 몸에 젖어서 두루하고 가득 넘쳐 충만하지 않음이 없다. 마치 사람이 목욕 그릇에 뭇 약을 담아 물로써 그것을 부울 때 안팎이 함께 윤택하여 두루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마납아, 이것을 ‘최초의 現身으로써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이렇게 정진으로 말미암아 생각에 錯亂이 없어 고요한 것을 즐겨해 한가히 사는데서 얻은 바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覺觀을 버리고 곧 믿음을 낸다. 전념과 일심으로 覺도 없고 觀도 없어 定生喜樂으로 제 二禪에 들어간다. 그는 이미 일심의 희락에 몸을 담구어 두루하고 가득해 충만하지 않는 일이 없다. 마치 산꼭대기의 맑은 샘물은 물이 가운데서 나와 밖에서 나오지 않으며 곧 이 못 가운데서 청정한 물을 내어 도로 스스로 부으며 두루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도 이와 같아 제 二선에 들어가 정생희락이 충만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을 ‘제 二의 현신으로써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 한다.

또 그는 기쁨을 버리고 머물러 보호하여 생각이 착란하지 않으며 몸에 쾌락 받는 것은 聖人의 말씀과 같다. 그래서 護念의 즐거움을 일으켜 제 三선에 들어간다. 그의 몸은 기쁨은 없고 즐거움으로서 젖어 두루하고 가득해 충만하지 않음이 없다. 비유하면 우발라꽃, 발두마꽃, 구두마꽃, 분타리꽃이 처음으로 진흙에서 나와 아직 물밖에 나오지 못할 적에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물 속에 잠기어 두루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도 이와 같아 제 三선에 들어가 기쁨을 떠나 즐거움에 머물러 몸을 적셔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을 ‘제 三의 현신으로써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 한다.

또 그는 희락을 버리고 걱정을 없애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생각을 보호해 청정하여 제 四선에 들어간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청정하고 갖추고 가득하여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 마치 사람이 목욕하고 청결하여 새로운 흰 천으로 그 몸을 덮어 온 몸이 청정한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도 또한 이와 같아 제 四선에 들어가면 그 마음의 청정한 것이 몸에 충만하여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 또 제 四선에 들어가면 마음에 더하고 덜함이 없고 또 기울거나 움직이지도 않으며 사랑도 미움도 없는 움직임이 없는 땅에 머무른다. 마치 비밀한 방 안팎을 바르고 굳게 문을 닫아 風塵이 없고 그 안에는 등불을 흔드는 자도 없고 그 등불의 불꽃이 타오르더라도 고요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도 또한 이와 같아 제 四선에 들어가면 마음대로 더함도 덜함도 없고 또 기울거나 움직임도 없으며 사랑도 미움도 없는 움직임이 없는 땅에 머무른다. 이것을 ‘제 四의 현신으로써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정근하여 게으르지 않아 생각이 착란하지 않고 고요한 것을 즐겨해 한가히 사는 데서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定한 마음을 얻어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으며 부드럽고 길들어 움직임이 없는 땅에 머무른다.

스스로 그 몸 속에 변화하는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다른 몸을 化作하여 支節이 구족하고 모든 根이 빠짐이 없다. 그는 이렇게 觀한다. ‘이 色身은 四大로서 저 몸을 이루었다. 이 몸과 저 몸은 다르다. 그러나 이 몸을 쫓아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저 몸을 化成하매 모든 근은 구족하고 지절은 빠짐이 없다’고.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칼집에서 칼을 뺄 때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칼집과 칼은 다르다. 그러나 칼은 칼집에서 나왔다’고. 또 사람이 있어 삼실을 꼬아 노끈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삼과 노끈은 다르다. 그러나 노끈은 삼에서 나왔다’고. 또 어떤 사람이 상자에서 뱀을 잡아내는 것과 같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상자와 뱀은 다르다. 그러나 뱀은 상자에서 나왔다’고. 또 어떤 사람이 상자에서 옷을 내는 것과 같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상자와 옷은 다르다. 그러나 상자에서 옷이 나왔다’고. 마납아, 비구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은 최초의 얻은 바 乘法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정진으로 생각이 착란하지 않고 고요한 것을 즐겨 한가히 사는 데서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定心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부드럽고 다루어져 움직임이 없는 땅에 산다.

이미 四대의 색신 속에서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化身을 化作하매 일체의 모든 근과 지절이 구족하다. 그는 이렇게 관한다. ‘이 몸은 四대가 모여 된 것이요, 저 몸은 변화를 쫓아 있다. 이 몸과 저 몸은 다르다. 이 마음은 이 몸 가운데 있어 이 몸에 머물다가 化身에 까지 간다.’ 비유하면 유리와 摩尼는 매우 밝고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는 것과 같다. 만일 청, 황, 적의 실로 꿰면 눈이 있는 사람은 손바닥 위에 놓고 보아 구슬과 실은 다르지마는 실은 구슬에 의지하여 이 구슬에서 저 구슬에까지 간 것을 알 것이다. 마납아, 비구는 마음을 관하여 그것은 이 몸에 의지해 머무르며 저 화신에 까지 이르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을 안다. 이것은 비구의 제 二의 승법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정근으로 생각이 착란하지 않고 홀로를 즐겨해 한가히 사는 데서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定心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부드럽고 다루어져 움직임이 없는 땅에 머무른다.

그는 또 일심으로 神通智證을 닦아 익혀 능히 갖가지로 변화한다. 한 몸을 변화해 무수한 몸이 되고 무수한 몸을 합해 한 몸이 되기도 한다. 몸은 날아다녀 석벽도 걸림이 없어 공중에 나는 새와 같고 물을 디디기 땅과 같이 한다. 몸에서는 연기와 불꽃을 내어 마치 큰 불 더미 같다. 손으로는 해와 달을 만지고 선 채로 범천에까지 이른다. 비유하면 옹기장이가 진흙을 잘 버물려 마음대로 어떤 그릇이나 만들어 이익 되는 바가 많은 것과 같다. 또 능숙한 목수가 나무를 잘 다루어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어 이익 되는 바가 많은 것과 같다. 또 牙師가 코끼리의 이빨을 다루는 것과 같고 또 金師가 眞金을 다루어 뜻대로 만들어 이익 되는 바가 많은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도 또한 이와 같아 정심이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는 땅에 머무르면서 뜻대로 변화하여 내지 손으로 해와 달을 어루만지고 서서 범천에까지 이른다. 이것은 비구의 제 三의 승법이다. 그는 정심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부드럽고 다루어져 움직임이 없는 땅에 머무른다.

그는 또 일심으로 닦아 익혀 天耳智를 證한다. 그의 하늘 귀의 깨끗함은 사람의 귀에 지나 하늘 소리와 사람 소리의 두 가지 소리를 듣는다. 마치 성내에 높고 넓고 환히 드러난 큰 강당이 있을 대 귀 밝은 사람이 그 집안에 있어 그 안에 있는 소리를 힘들이지 않고 모두 듣는 것과 같다. 비구도 이와 같아 마음이 定하기 때문에 하늘 귀가 청정하여 두 가지 소리를 듣는다. 마납아, 이것은 비구의 제 四의 승법이다. 그는 정심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기 때문에 부드럽고 다루어져 움직임이 없는 땅에 머무른다.

그는 또 일심으로 닦아 익혀 他心智를 증한다. 그는 남의 마음을 안다. 욕심의 있고 없음과 때의 있고 없음과 어리석음의 있고 없음과 마음의 넓고 좁음과 마음의 크고 작음과 마음의 정하고 어지러움과 마음이 막이고 풀림과 윗마음과 아랫마음과 위없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모두 안다. 마치 사람이 있어 맑은 물에 스스로 비추어 좋고 나쁨을 틀림없이 아는 것과 같다. 비구도 또한 이와 같이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능히 남의 마음을 안다. 마납아, 이것은 비구의 제 五의 승법이다. 그는 정심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음으로써 부드럽고 다루어져 움직임이 없는 땅에 머무른다. 일심으로 宿命智證을 닦아 익혀서 곧 능히 숙명의 무수한 갖가지 일들을 기억해 알아서 능히 일생을 기억해 무수한 생에 이르기까지 劫數의 성패와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는 것과 성명, 종족, 음식의 好惡, 수명의 장단, 받은 바의 고락 형상과 모양을 모두 기억해 안다. 비유하면 사람이 있어 자기 마을에서 다른 나라로 가는 것과 거기서 혹은 다니고 혹은 서며 혹은 말하고 혹은 잠자코 있는 것과 또 그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가는 것과 이렇게 전전하다가 다시 본토에 돌아와서 心力을 허비하지 안고 기억해 알기를 돌아다닌 모든 나라에서 기억해 알 때에 여기저기로 간 것 다니고 서고 말하고 잠잠했던 것을 모두 기억하는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도 또한 이와 같다. 능히 정심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음으로써 움직임이 없는 땅에 머무른다. 그래서 숙명지로써 능히 숙명의 무수한 겁의 일을 기억한다. 이것은 비구의 제 一勝을 얻은 것이다. 無明이 길이 멸해 大明의 법이 나고 어두움이 소멸하여 光耀의 법이 난다. 이것은 비구의 숙명지의 밝음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정근으로 말미암아 생각에 착란이 없고 홀로를 즐겨해 한가히 사는 데서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심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음으로써 부드럽고 다루어져 움직임이 없는 땅에 머무른다.

그는 또 일심으로 生死를 보는 지혜를 닦아 익혀 그의 깨끗한 하늘 눈은 모든 중생의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고 저기로부터 여기서 나는 것을 본다. 형색의 좋고 추함과 선과 악의 모든 과보와 존귀하고 비천한 것과 짓는 업을 따라 報應의 인연을 모두 안다. ‘이 사람은 몸으로 악을 행하고 입으로 악을 말하고 뜻으로 악을 생각하며 현성을 비방하고 삿되고 거꾸로 된 소견을 믿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 三惡道에 떨어진다. 이 사람은 몸으로 선을 행하고 입으로 선을 말하고 뜻으로 선을 생각하며 현성을 비방하지 않고 소견이 바르고 믿음으로 행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면 천상이나 인간에 태어난다.’고 이렇게 깨끗한 하늘 눈으로써 모든 중생이 業緣을 따라 五道로 오가는 것을 본다. 비유하면 성내에 넓고 높은 다락을 지어 놓고 눈 밝은 사람이 그 위에 올라가 모든 행인을 바라보고 그들이 동서남북으로 가는 것과 그 거동의 하는 짓을 모두 보는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도 또한 이와 같아 정심의 청정함으로서 움직임이 없는 땅에 머무른다. 생사를 보는 지혜를 중하여 깨끗한 하늘 눈으로써 모든 중생이 그 지은 바의 선악의 업을 따라 生을 받아 五道를 오가는 것을 보고 그것을 다 안다. 이것은 비구의 제 二의 明을 얻은 것이다. 무명을 끊고 慧明을 내며 어둠을 버리고 지혜의 광명을 낸다. 이것은 중생의 생사를 보는 지혜의 밝음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정근하여 생각이 착란하지 않고 홀로를 즐겨해 한가히 사는 데서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심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음으로서 부드럽고 다루어져 움직이지 않는 땅에 머무른다.

일심으로 無漏智證을 닦아 익혀 그는 여실히 苦聖諦를 알고 여실히 有漏集을 알며 여실히 有漏盡을 알고 여실히 漏盡으로 나아가는 길을 안다. 그는 欲漏, 有漏, 無明漏를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아서 이 마음이 해탈을 얻어 해탈의 지혜를 얻었다. 생사가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서고 할 일을 다해 마치고 뒷세상의 목숨을 받지 않는다. 비유하면 맑은 물 속에 나무와 돌과 고기와 자라 따위의 수성(水性)의 무리들이 동서로 돌아다닐 때에 눈이 있는 사람은 환하게 이것을 보고 이것은 나무와 돌이요, 이것은 고기와 자라라고 분별하는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도 이와 같아 정심이 청정함으로서 움직임이 없는 땅에 이르러 무루지증을 얻고 내지 뒷 목숨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비구의 제 三의 明을 얻은 것이다. 무명을 끊어 없애어 혜명을 내고 어둠을 버리어 큰 지혜의 광명을 낸다. 이것을 무루智命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정근하여 생각이 착란하지 않고 홀로를 즐겨해 한가히 사는 데서 얻었기 때문이다. 마납아, 이것을 위없는 明行의 구족이라 한다.

阿摩晝經 『한글 장아함경』 pp. 308~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