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앙예촌(鴦藝村)에서 五백의 큰 비구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너희들을 일컬어 사문이라 한다. 그래서 만일 너희들에게 '너는 사문이냐.'고 물으면 '나는 사문이다.'고 대답한다. 나는 이제 너희들에게 사문의 행과 바라문의 행을 말하리라. 너희들이 생각하고 닦아 익히면 뒤에 반드시 성취하리니, 그것은 확실하여 틀림없을 것이다. 나는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하리라. 사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즉 습행(習行) 사문과 서원(誓願) 사문이니라.
습행 사문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비구로서 가고 오기와 나아가고 그치기와 바라보기와 용모와, 가사 입고 바리 가지기가 모두 법과 같으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계율을 가지고 정진하여 비법을 범하지 않으며 모든 계율을 평등하게 배우는 것이니, 이것을 습행 사문이라 하느니라.
그 서원 사문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어떤 비구로서 위의와 계율과 나고 들기와 나아가고 그치기며, 걸음걸이와 용모와 바라보기와 그 거동이 모두 법대로 이며, 번뇌를 없애고 번뇌가 없게 되어 현재에서 몸으로 증득하여 스스로 노닌다. 그래서 생, 사가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서고 할 일을 이미 마쳐 다시는 몸을 받지 않을 줄을 여실히 아는 것이니, 이것을 서원 사문이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을 두 가지 종류의 사문이라 하느니라."
그 때에 아아난다는 세존께 사뢰었다.
"그 어떤 것이 사문의 법행이며 어떤 것이 바라문의 법행이옵니까."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이른바 비구로서 음식에 만족할 줄을 알고 밤, 낮으로 거닐며 때를 놓치지 않고 여러 가지 도의 갈래를 행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비구의 온갖 감관이 고요한 것인가. 이른바 비구로서 눈으로 빛깔을 보아도 집착하거나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안고 거기서 눈의 감관이 깨끗하게 되어, 온갖 나쁜 생각을 없애고 착하지 않은 법을 생각하지 않는가.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혀로 맛을 알고 몸으로 닿임을 알며 뜻으로 법을 알더라고 집착하거나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뜻의 감관이 청정하게 된다. 이와 같이 비구의 여섯 감관이 청정하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비구가 음식에 만족할 줄 아는 것인가. 이른바 비구로서 배를 요량해 먹고 살찌거나 희어지기를 바라지 않으며 다만 그 몸을 보존하려 할 뿐이요, 묵은 병을 고치고 새 병은 나지 않아 범행을 닦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어떤 남녀가 몸에 부스럼이 나면 때를 따라 고약을 바르는 것은 다만 부스럼을 고치려고 하는 것인 것처럼, 그 비구들도 그와 같아서 배를 요량해 먹을 뿐이다.
또 수레에 기름을 치는 것은 멀리 가려고 하는 것인 것처럼, 비구가 배를 요량해 먹는 것은 목숨을 보존하려 하는 것뿐이다. 이와 같이 비구는 음식에 만족할 줄 아느니라. 어떤 것이 비구로서 항상 깨어 있을 줄 아는 것인가. 이른바 비구로서 초저녁과 새벽에 항상 깨어 있어 서른 일곱 가지 법을 생각하고 낮에는 거닐면서 나쁜 생각과 온갖 맺음을 없애며, 초저녁과 새벽에도 거닐면서 나쁜 맺음과 좋지 못한 생각을 없애고 밤중에는 오른쪽으로 누워 다리를 포개고 다만 광명을 향하는 생각을 가지며 또 새벽에는 드나들고 거닐면서 좋지 못한 생각을 버리는 것이니, 이와 같이 비구는 때를 알아 깨어 있느니라. 아아난다야, 이것이 사문의 요긴한 행이니라. 그 어떤 것이 바라문의 요긴한 행인가. 이른바 비구로서 괴로움의 진리를 여실히 알고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사라짐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여실히 안다. 그리고는 탐욕의 번뇌, 생존의 번뇌,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의 해탈을 얻고 해탈하고는 곧 해탈하였다는 지혜를 얻는다. 그래서 생, 사가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서고 할 일을 이미 마쳐 다시는 태를 받지 않을 줄을 여실히 아는 것이니, 이것을 바라문의 요긴한 행법이라 한다.
아아난다야, 알라. 이것을 요긴한 행의 의미라 하느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는 곧 다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사문을 식심(息心)이라 하나니
온갖 악을 아주 다한 것이요
범지를 일러 청정이라 하나니
온갖 잡된 생각을 버렸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아아난다야, 사문의 법행과 바라문의 법행을 항상 생각하고 닦아 행하라. 어떤 중생이라도 이 법을 행한 뒤에라야 사문이라고 일컬을 수 있느니라. 무엇 때문에 사문이라 이름하는가. 온갖 번뇌를 아주 없앴기 때문에 사문이라 이름한다. 무엇 때문에 바라문이라 이름하는가. 어리석고, 미혹한 법을 모두 버렸기 때문에 바라문이라 이름한다. 또 크샤트리야라고도 이름하나니 무엇 때문에 크샤트리야라고 이름하는가.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었기 때문에 크샤트리야라고 이름하느니라. 또 목욕(沐浴)이라고도 이름하나니 무엇 때문에 목욕이라고 이름하는가. 스물 한 가지 번뇌를 씻었기 때문에 목욕이라 이름한다. 또 깨달음[覺]이라고도 이름하나니 무엇 때문에 깨달음이라고 이름하는가. 어리석은 법과 지혜로운 법을 밝게 깨달았기 때문에 깨달음이라고 이름한다. 또 저 언덕[彼岸]이라고도 이름하나니 무엇 때문에 저 언덕이라고 이름하는가. 이 언덕에서 저 언덕에 이르렀기 때문에 저 언덕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아아난다야, 이런 법을 능히 행하는 이라야 비로소 사문, 바라문이라 이름하나니 이것이 그 의미이니라. 부디 생각하고 받들어 행하라."
그 때에 아아난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대정장 2/801 하~802 중 ;『한글 증일아함경』2, pp. 414~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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