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아함경 제24권
97. 대인경(大因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쿠루우수[拘樓瘦]에 노닐으시면서 쿠루우수의 도읍인 캄마싯담마[劒磨瑟曇]에 계시었다. 그 때에 존자 아아난다는 한가히 홀로 있으면서 고요히 앉아 깊이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연기(緣起)는 매우 기이하여 지극히 깊고 알기도 또한 매우 어렵다 한다. 그런데, 내 관찰로는 매우 옅다’ 이에 존자 아아난다는 연좌에서 일어나, 부처님 계시는 곳으로 나아가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나 한쪽에 서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한가히 홀로 있으면서 고요히 앉아 깊이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나이다. ‘이 연기는 매우 기이하여 지극히 깊고 알기도 또한 매우 어렵다. 그런데, 내 관찰로는 매우 옅도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아아난다야, 너는 그런 생각을 말라. ‘이 연기는 매우 옅다’고. 무슨 까닭인가. 이 연기는 지극히 깊고 알기도 또한 매우 어렵느니라.
아아난다야, 이 연기를 참다이 알지 못하고 실다이 보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 중생들은 베틀이 서로 얽매는 것 같고 넝쿨풀이 어지러운 것 같으며, 바쁘고 부산하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고,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며, 갔다 왔다 하면서 생사(生死)를 뛰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라.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이 연기는 지극히 깊고 분명하며, 매우 깊은 줄을 아느니라.
아아난다야, 만일 어떤 이가 ‘늙고 죽음에 연(緣)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늙고 죽음에는 연이 있다’고. 또 어떤 이가 ‘늙고 죽음에는 연이 있다’고. 또 어떤 이가 ‘늙고 죽음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생(生)에 인연한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어떤 이가 ‘생에 연(緣)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생에도 또한 연이 있다’고. 만일 어떤 이가 ‘생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유(有)에 인연한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어떤 이가 ‘유(有)에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유에도 또한 연이 있다’고. 만일 어떤 이가 ‘유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수(受)에 인연한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어떤 이가 ‘수에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수에도 또한 연이 있다’고. 만일 어떤 이가 ‘수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애(愛)에 인연한다’고. 아아난다야, 이것을 ‘애를 인연하여 수(受)가 있고, 수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으며, 유를 인연하여 생(生)이 있고, 생을 인연하여 노, 사(老死)가 있으며, 노, 사를 인연하여 걱정과 슬픔이 있고, 울음과 걱정, 괴로움, 번민은 다 노, 사를 인연하여 있다’고. 이와 같이 구족하여 오로지 큰 고음(苦陰)이 생기느니라.
아아난다야, 생(生)을 인연하여 노, 사가 있으면 이것을 ‘생을 인연하여 노, 사가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른바 생을 인연하여 노, 사가 있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생이 없다면, 고기면 고기 종자, 새면 새 종자, 모기면 모기 종자, 용(龍)이면 용 종자, 신(神)이면 신 종자, 귀신이면 귀신 종자, 하늘이면 하늘 종자, 사람이면 사람 종자, 이렇게 아아난다야, 저 중생들이 저마다 곳을 따라 생(生)이 없을 것이니, 저마다 생이 없으면 가령 생을 떠나더라도 노, 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노,사>의 원인, 노, 사의 근본, 노, 사의 인연은 곧 이 생이다고. 무슨 까닭인가. 생을 인연하므로 곧 노, 사가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유(有)를 인연하여 생이 있으면 이것을 <유>를 인연하여 생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른바 ‘<유>를 인연하여 생이 있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유>가 없으면, 고기면 고기 종자, 새면 새 종자, 모기면 모기 종자, 용이면 용 종자, 신이면 신 종자, 귀신이면 귀신 종자, 하늘이면 하늘 종자, 사람이면 사람 종자, 이렇게 아아난다야, 저 중생들이 저마다 곳을 따라 유가 없으리니, 제각기 유가 없으면 가령 유를 떠나더라도 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생의 원인, 생의 근본, 생의 인연은 곧 이 유다’라고. 무슨 까닭인가. 유를 인연하므로 곧 생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수(受)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으면 이것을 ‘<수>를 인연하여 유가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른바 ‘<수>를 인연하여 유가 있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수>가 없어 제각기 <수>가 없으면 가령 수를 떠나더라도 다시 ‘유가 있고 유가 없다’고 주장하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유>의 원인, 유의 근본, 유의 인연은 곧 이 <수>이다’라고. 무슨 까닭인가. <수>를 인연하므로 곧 <유>가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애(愛)를 인연하여 수가 있으면 이것을 ‘<애>를 인연하여 <수>가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른바 ‘<애>를 인연하여 <수>가 있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애>가 없어 제각기 애가 없으면 가령 애를 떠나더라도 다시 수가 있고 수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수의 원인, 수의 근본, 수의 인연은 곧 이 <애>이다’고. 무슨 까닭인가. <애>를 인연하므로 곧 <수>가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이것을 ‘애(愛)를 인연하여 구(求)함이 있고,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이 있으면,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이 있고,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으며,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고, 집착을 인연하여 아낌이 있으며, 아낌을 인연하여 집[家]이 있고, 집을 인연하여 지킴이 있는 것이다.’고 한다. 아아난다야, 지킴을 인연하기 때문에 곧 칼과 작대기,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이 있으며, 한량이 없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킨다. 이렇게 구족하면 오로지 큰 고음(苦陰)이 생기느니라.
아아난다야, 만일 지킴이 없어 제각기 지킴이 없으면, 가령 지킴을 떠나더라도 칼과 막대기,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이 있고 한량이 없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키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칼과 작대기,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이 있고, 한량이 없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키는 원인과 근본과 인연은 곧 이 지킴이라고. 무슨 까닭인가. 지킴을 인연하기 때문에 곧 칼과 작대기,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이 있고 한량이 없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구족하면 오로지 큰 고음이 생기느니라.
아아난다야, 만일 집을 인연하여 지킴이 있으면 이것을 ‘집을 인연하여 지킴이 있다’고 말한다. 아아난다야, 만일 집이 없어 제각기 집이 없으면 가령 집을 떠나더라도 지킴이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지킴의 원인과 지킴의 근본과 지킴의 인연은 곧 이 집이다’고. 무슨 까닭인가. 집을 인연하기 때문에 곧 지킴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아낌을 인연하여 집이 있으면 이것을 ‘아낌을 인연하여 집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른바 ‘아낌을 인연하여 집이 있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아낌이 없어 제각기 아낌이 없으면 가령 아낌을 떠나더라도 집이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집의 인과 집의 원인과 집의 근본과 집의 인연은 곧 이 아낌이다’라고. 무슨 까닭인가. 아낌을 인연하기 때문에 곧 집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집착을 인연하여 아낌이 있으면 이것을 ‘집착을 인연하여 아낌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른바 ‘집착을 인연하여 아낌이 있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집착이 없어 제각기 집착이 없으면 가령 집착을 떠나더라도 아낌이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아낌의 원인과 아낌의 근본과 아낌의 인연은 곧 이 집착이다’고. 무슨 까닭인가. 집착을 인연하기 때문에 곧 아낌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으면 이것을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른바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욕심이 없어 제각기 욕심이 없으면 가령 욕심을 떠나더라도 집착이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집착의 인과 집착의 원인과 집착의 근본과 집착의 인연은 곧 이 욕심이다’고. 무슨 까닭인가. 욕심을 인연하므로 집착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으면 이것을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른바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분별이 없어 제각기 분별이 없으면 가령 분별을 떠나더라도 집이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욕심의 원인과 욕심의 근본과 욕심의 인연은 곧 이 분별이다’라고. 무슨 까닭인가. 분별을 인연하므로 곧 욕심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이 있으면 이것을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른바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이 있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이익이 없어 제각기 이익이 없으면 가령 이익을 떠나더라도 분별이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분별의 원인과 분별의 근본과 분별의 인연은 곧 이 이익이다’라고. 무슨 까닭인가. 이익을 인연하므로 곧 분별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이 있으면 이것을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른바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이 있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구함이 없어 제각기 구함이 없으면 가령 구함을 떠나더라도 이익이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이익의 원인과 이익의 근본과 이익의 인연은 곧 이 구함이다’라고. 무슨 까닭인가. 구함을 인연하기 때문에 곧 이익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애(愛)를 인연하여 구함이 있으면 이것을 <애>를 인연하여 구함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른바 ‘<애>를 인연하여 구함이 있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애>가 없어 제각기 <애>가 없으면 가령 <애>를 떠나더라도 구함이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구함의 원인과 구함의 근본과 구함의 인연은 곧 이 <애>다’라고. 무슨 까닭인가. <애>를 인연하기 때문에 곧 구함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욕애(欲愛)와 유애(有愛)의 이 二법(法)은 각(覺)을 인(因)하고 각을 연(緣)하여 오는 것이니라.
아아난다야, 만일 어떤 사람이 ‘<각>에도 또한 연이 있다’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각>에도 또한 연이 있다’고. 만일 어떤 사람이 ‘각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갱락(更樂)을 인연한다’고. 마땅히 알라. 이른바 ‘<갱락>을 인연하여 <각>이 있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눈에 갱락이 없어 제각기 눈의 갱락이 없으면, 가령 눈의 갱락을 떠나더라도 눈의 갱락을 인연하여 낙각(樂覺), 고각(苦覺), 불고불락각(不苦不樂覺)을 낼 수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만일 귀, 코, 혀, 몸, 뜻의 <갱락>이 없어 제각기 뜻의 <갱락>이 없으면, 가령 뜻의 갱락을 떠나더라도 뜻의 갱락을 인연하여 낙각, 고각, 불고불락각을 낼 수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각의 인과 각의 원인과 각의 근본과 각의 인연은 곧 이 갱락이다’라고. 무슨 까닭인가. <갱락>을 인연하므로 곧 <각>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만일 어떤 사람이 ‘<갱락>에도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갱락에도 연이 있다’고. 만일 어떤 사람이 ‘갱락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명색(名色)을 인연한다’고. 마땅히 알라. 이른바 ‘<명색>을 인연하여 갱락이 있다’고. 아아난다야, 행하는 바와 연(緣)하는 바에 명신(名身)이 있다. 이 행을 떠나고 이 연을 떠나더라도 상대가 있는 갱락이 있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행하는 바와 연하는 바에 색신(色身)이 있다. 이 행을 떠나고 이 연을 떠나더라도 <증어갱락(增語更樂)>이 있는가.”
“없나이다.”
“가령 명신(名身)과 색신(色身)을 떠나더라도 갱락이 있어 갱락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갱락의 원인과 갱락의 근본과 갱락의 인연은 곧 이 <명색>이다’라고. 무슨 까닭인가. <명색>을 인연하기 때문에 곧 <갱락>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만일 어떤 사람이 ‘<명색>에도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명색에도 연이 있다’고. 만일 어떤 사람이 ‘명색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식(識)을 인연한다’고. 마땅히 알라. 이른바 <식>을 인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식>이 어머니 태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명색이 있어 이 몸을 이루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만일 <식>이 태에 들어갔다가 곧 나오면 명색이 정(精)을 만나겠는가.”
“만나지 못하나이다.”
“아아난다야, 만이 어떤 소년과 소녀의 <식>이 처음부터 끊어지고 부서져서 있지 않으면 명색이 더 자라겠는가.”
“아닙니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명색의 원인과 명색의 근본과 명색의 인연은 곧 이 식이라고. 무슨 까닭인가. <식>을 인연하므로 곧 <명색>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만일 어떤 사람이 ‘<식>에도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식에도 또한 연이 있다’고. 만일 어떤 사람이 ‘식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명색>을 인연한다’고. 마땅히 알라. 이른바 ‘명색을 인연하여 식이 있다’고. 아아난다야, 만일 식이 명색을 얻지 못하고 만일 식이 명색에 서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으면, 식은 과연 남[生]이 있고 늙음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괴로움이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식의 원인과 식의 근본과 식의 인연은 곧 이 명색이다’라고. 무슨 까닭인가. 명색을 인연하므로 곧 <식>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이것을 ‘명색을 인연하여 식이 있고, 식을 인연하여 또한 명색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말을 보태고 거듭 말을 보태어 설명해 전(傳)하며, 전해 설명하여 마련해야 하나니, 곧 ‘식과 명색은 함께 있다’고. 아아난다야, 어떻게 어떤 사람은 신(神)이 있다고 보는가.”
존자 아아난다는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 되시고, 세존께서는 법의 주인이 되시며, 법은 세존을 좇아 나오나이다. 오직 원하옵건대 그것을 해설하여 주소서. 저는 이제 그것을 들은 뒤에는 널리 그 뜻을 알게 되겠나이다.”
부처님께서는 곧 말씀하시었다.
“아아난다야, 자세히 듣고 그것을 잘 기억하여라. 나는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하리라.”
존자 아아난다는 분부를 받고 듣고 있었다.
“아아난다야, 어떤 사람은 각(覺)을 신(神)이라 보고, 또 어떤 사람은 각을 신이라 보지 않으면서, 신은 능히 깨닫고 또 신법(神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며, 어떤 사람은 각을 신이라 보지 않고, 또한 신은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
아아난다야, 만일 어떤 사람이 ‘각은 신이다’라고 보거든 마땅히 그에게 물어야 한다.
‘三각 곧 낙각, 고각, 불고불락각이 있다. 너는 이 三각에서 어느 각을 신이라고 보는가.’고. 아아난다야, 마땅히 다시 그에게 말해야 한다. ‘만일 낙각을 깨달으면 그 때에 그는 二각 곧 고각, 불고불락각은 멸하고 다만 낙각만을 깨닫는다. 낙각은 무상(無常)의 법이요 괴로움의 법이며 멸의 법이다. 만일 낙각이 이미 멸해 버리며, 그는 신이 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아아난다야, 만일 다시 一각 곧 고각이 있으면, 그는 그 때에는 二각 곧 낙각, 불고불락각은 멸하고 다만 고각만을 깨닫는다. 고각은 무상의 법이요 괴로움의 법이며 멸의 법이다. 만일 고각이 이미 멸해 버리면 그는 신이 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만일 다시 一각 곧 불고불락각이 있으면, 그는 그 때에는 二각 곧 낙각, 고각은 멸하고 다만 불고불락각만을 깨닫는다. 불고불락각은 무상의 법이요 괴로움의 법이며 멸의 법이다. 만일 불고불락각이 이미 멸해 버리면 그는 신이 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고.
아아난다야, 그는 이와 같은 무상의 법에서 다만 괴로움과 즐거움을 떠나고서 다시 각을 신이라고 보겠는가.”
“아닙니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은 무상의 법에서 다만 괴로움과 즐거움을 떠나고서 다시 각을 신이라고 보지 못할 것이다.
아아난다야,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각을 신이라고 보지 않으면서도, 신은 능히 깨닫고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거든 마땅히 그에게 말해야 한다. ‘네가 만일 각이 없으면 깨달을 수가 없어 응당 이것은 내 소유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아아난다야, 그가 다시 이렇게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면서도 신은 능히 깨닫고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이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면서 신은 능히 깨닫고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아아난다야,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각을 신이라고 보지 않고, 또한 신은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보거든 마땅히 그에게 말해야 한다.
‘네가 만일 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신이 각을 떠나면 응당 신은 청정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아아난다야, 그가 다시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고, 또한 신은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보겠는가.”
“아닙니다.”
“아아난다야, 그러므로 그는 응당 이와 같이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고, 또한 신은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아아난다야,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보는 것이라 하느니라.
아아난다야, 어떻게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보지 않는가.”
존자 아아난다는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 되시고, 세존께서는 법의 주인이 되시며, 법은 세존을 좇아 나오나이다. 오직 원하옵건대 그것을 말씀하여 주소서. 저는 그것을 들은 뒤에는 널리 그 뜻을 알게 되겠나이다.”
부처님께서는 곧 말씀하시었다.
“아아난다야, 자세히 듣고 그것을 잘 기억하여라. 나는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하리라.”
존자 아아난다는 분부를 받고 듣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각을 신이라 보지 않고, 또한 신은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또한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도 보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보지 않은 뒤에는 곧 이 세간을 받아들이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은 뒤에는 곧 피로하지 않으며, 피로하지 않은 뒤에는 곧 열반에 든다. 그래서 내 생(生)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뜻을 안다.
아아난다야, 이것을 ‘거듭 말을 보태고 말을 보태어 설명해 전하며, 전해 설명하여 <유(有)>를 주장해야 한다.’고 하느니라. 이것을 알면 곧 받아들임이 없을 것이다. 아아난다야, 만일 비구가 이렇게 바르게 해탈하면, 이것은 다시 여래는 마지막이라고 보거나 여래는 마지막이 아니라고 보거나 여래는 마지막이면서 마지막이 아니라고 보거나 여래는 마지막도 아니요 마지막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보는 일이 없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아아난다야, 어떻게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는가.”
존자 아아난다는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 되시고, 세존께서는 법의 주인이 되시며, 법은 세존을 좇아 나오나이다. 오직 원하옵건대 그것을 말씀하여 주소서. 저는 그것을 들은 뒤에는 널리 그 뜻을 알게 되겠나이다.”
부처님께서는 곧 말씀하시었다.
“아아난다야, 자세히 듣고 그것을 잘 기억하여라. 나는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하리라.
아아난다야, 어떤 사람은 소색(小色)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은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무량색(無量色)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소무색(小無色)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은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소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무량무색(無量無色)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아아난다야, 만일 어떤 사람이 소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지금 소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요, 신이 있어 만일 소색을 떠날 때에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 보아, 집착하고 또 집착하느니라.
아아난다야,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무량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지금 무량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요, 신이 있어 만일 무량색을 떠날 때에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아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나니, 이와 같이 무량색을 신이라 보아 집착하고 또 집착하느니라.
아아난다야,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지금 소무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요, 신이 있어 만일 소무색을 떠날 때에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을 신이라 보아 집착하고 또 집착하느니라.
아아난다야, 만일 어떤 사람이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소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무량무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요, 신이 있어 만일 무량무색을 떠날 때에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아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을 신이라 보아 집착하고 또 집착하느니라.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고 하느니라.
아아난다야, 어떻게 어떤 사람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는가.”
존자 아아난다는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 되시고, 세존께서는 법의 주인이 되시며, 법은 세존을 좇아 나오나이다. 오직 원하옵건대 그것을 말씀하여 주소서. 저는 그것을 들은 뒤에는 널리 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곧 말씀하시었다.
“아아난다야, 자세히 듣고 그것을 잘 기억하여라. 나는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하리라.
아아난다야, 어떤 사람은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소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아아난다야, 만일 어떤 사람이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지금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이렇게 말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요, 신이 있어 만일 소색을 떠날 때에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보지 않아, 집착하고 또 집착하느니라.
아아난다야,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지금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이렇게 말하지 않고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요, 신이 있어 만일 무량색을 떠날 때에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나니, 이와 같이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보지 않아 집착하고 또 집착하느니라.
아아난다야,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소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소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이렇게 말하지 않고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요, 신이 있어 만일 소무색을 떠날 때에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보지 않아 집착하고 또 집착하느니라.
아아난다야,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무량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지금 무량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이렇게 말하지 않고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요, 신이 있어 만일 무량무색을 떠날 때에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보지 않아 집착하고 또 집착하느니라.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고 하느니라.
다시 아아난다야, 七식주(識住)와 二처(處)가 있다. 어떤 것이 七식주인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약간의 몸에 약간의 생각[想]이 있으니, 곧 사람과 욕천(欲天)이다. 이것을 제 一식주라 한다.
다시 또 아아난다야,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약간의 몸에 한 생각이 있으니, 곧 범천(梵天)이 처음 나서 오래 살지도 않고 일찍 죽지도 않는다. 이것을 제 二식주라 한다. 다시 아아난다야,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한 몸에 약간의 생각이 있으니, 곧 황욱천(晃昱天)이다.
이것을 제 三식주라 한다. 또 아아난다야,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한 몸에 한 생각이 있으니, 곧 변정천(遍淨天)이다. 이것을 제 四식주라 한다. 다시 아아난다야, 어떤 빛깔이 없는 중생은 일체의 빛깔이라는 생각을 건너고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약간의 생각도 없어, 한량이 없는 공처(空處)로서 이 공처에서 성취하여 노니나니, 곧 무량공처천(無量空處天)이다. 이것을 제 五식주라 한다.
다시 아아난다야, 어떤 빛깔이 없는 중생은 일체의 무량공처를 건너 한량이 없는 식처(識處)로서 이 식처에서 성취하여 노니나니, 곧 무량식처천(無量識處天)이다. 이것을 제 六식주라 한다. 다시 아아난다야, 어떤 빛깔이 없는 중생은 일체의 무량식처를 건너 무소유처(無所有處)로서 이 무소유처에서 성취하여 노니나니, 곧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이다. 이것을 제 一식주라 한다.
아아난다야, 어떤 것이 二처(處)인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생각[想]도 없고 감각도 없으니, 무상천(無想天)이다. 이것을 제 一처라 한다. 다시 아아난다야, 어떤 빛깔이 없는 중생은 일체의 무소유처를 건너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로서 이 비유상비무상처에서 성취하여 노니나니, 곧 비유상비무상처천(非有想非無想處天)이다. 이것을 제 二처라 하느니라.
아아난다야, 제 一식주란 것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약간의 몸에 약간의 생각이 있으니, 곧 사람과 욕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원인을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에 집착하고 그 식주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아아난다야, 제 二식주란 것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약간의 몸에 한 생각이 있으니, 곧 범천이 처음 나서 오래 살지도 않고 일찍 죽지도 않는 것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원인을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에 집착하고 그 식주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아아난다야, 제 三식주란 것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한 몸에 약간의 생각이 있으니, 곧 황욱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원인을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에 집착하고 그 식주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아아난다야, 제 四식주란 것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한 몸에 한 생각이 있으니, 곧 변정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원인을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에 집착하고 그 식주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아아난다야, 제 五식주란 것은 빛깔이 없는 중생으로서 일체의 빛깔이란 생각을 건너고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약간의 생각도 없어, 한량이 없는 공처로서 이 공처에서 성취하여 노니나니, 곧 무량공처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원인을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에 집착하고 그 식주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아아난다야, 제 二식주란 것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약간의 몸에 한 생각이 있으니, 곧 범천이 처음 나서 오래 살지도 않고 일찍 죽지도 않는 것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원인을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에 집착하고 그 식주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아아난다야, 제 七식주란 것은 어떤 빛깔이 없는 중생으로서 일체의 한량이 없는 식처를 건너 무소유처로서 이 무소유처에서 성취하여 노니나니, 곧 무소유처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원인을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에 집착하고 그 식주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아아난다야, 제 一처란 것은 빛깔이 있는 중생으로서 생각도 없고 감각도 없나니, 곧 무상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곳[處]을 알고 그 곳의 원인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곳에 집착하고 그 곳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아아난다야, 제 二처란 것은 빛깔이 없는 중생으로서 일체의 무소유처를 건너는 비유상비무상처로서 이 비유상비무상처에서 성취하여 노니나니, 곧 비유상비무상처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곳을 알고 그 곳의 원인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곳에 집착하고 그 곳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아아난다야, 만일 어떤 비구가 저 七식주와 二처에 대해서 그 참뜻을 알고 마음에 집착하지 않아 해탈을 얻으면, 이것을 비구 아라한으로서 <슬기의 해탈>이라 부르느니라.
아아난다야, 八해탈이 있으니, 어떤 것이 八인가. 안의 색(色)의 생각이 밖의 색(色)을 관찰하나니, 이것을 제 一해탈이라 한다. 다시 안으로 색상(色想)이 없이 밖으로 색을 관찰하나니, 이것을 제 二해탈이라 한다. 다시 깨끗한 해탈을 몸으로 증득(證得)하여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제 三해탈이라 한다.
다시 일체의 빛깔이라는 생각을 건너고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약간의 생각도 없어, 한량이 없는 공처로서 이 공처에서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제 四해탈이라 한다.
다시 일체의 한량이 없는 공처를 건너 한량이 없는 식처로서 이 한량이 없는 식처에서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제 五해탈이라 한다. 다시 일체의 한량이 없는 식처를 건너 무소유처로서 이 무소유처에서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제 六해탈이라 한다.
다시 일체의 무소유처를 건너 비유상비무상처로서 이 비유상비무상처에서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제 七해탈이라 한다. 다시 다음에는 일체의 비유상비무상처를 건너 멸해탈(滅解脫)을 몸으로 증득하여 성취하여 노니는 줄을 알고, 슬기로 관찰하여 모든 누(漏)가 다한 줄을 아나니, 이것을 제 八해탈이라 하느니라.
아아난다야, 만일 어떤 비구가 저 七식주와 二처에 대해서 그 참뜻을 알고 마음에 집착하지 않아 해탈을 얻고, 또 이 八해탈을 순(順)으로 역(逆)으로 몸으로 증득하여 성취하여 노닐며, 또한 슬기로 관찰하여 모든 누(漏)가 다하면, 이것을 비구 아라한으로서 <구해탈(俱解脫)>이라 부르느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존자 아아난다와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98. 염처경(念處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쿠루우수에 노닐으시면서 쿠루우수의 도읍인 캄마싯담마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한 도(道)가 있어 중생을 깨끗하게 하고 걱정과 두려움을 건지며, 고뇌를 없애고 슬픔을 끊고 바른 법을 얻게 하나니, 곧 四념처(念處)이니라. 과거의 모든 여래, 무소착, 등정각은 다 五개(蓋)의 마음의 더러움과 슬기의 파리함을 끊고 마음을 세워 바로 四념처에 머무르고, 七각지(覺支)를 닦아 위없는 정진(正盡)의 깨달음을 얻었다.
또 미래의 모든 여래, 무소착, 등정각도 다 五개의 마음의 더러움의 슬기와 파리함을 끊고 마음을 세워 바로 四념처에 머무르고, 七각지를 닦아 위없는 정진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나는 지금 현재의 여래, 무소착, 등정각이다. 나도 또한 五개의 마음의 더러움과 슬기의 파리함을 끊고 마음을 세워 바로 四념처에 머무르고, 七각지를 닦아 위없는 정진의 깨달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것이 四인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염처니, 이와 같이 각(覺)을 관찰하기를 각과 같이 하며, 마음을 관찰하기를 마음과 같이 하고,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는 염처이니라.
어떤 것을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염처라 하는가. 비구는 다니면 다니는 줄을 알고, 머무르면 머무는 줄 알며, 앉으면 앉는 줄 알고, 누우면 눕는 줄 알며, 자면 자는 줄 알고, 깨면 깨는 줄 알며, 자다 깨면 자가 깨는 줄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그리고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바르게 드나듦을 알아 잘 관찰하고 분별하며, 굽히고 펴기나 낮추고 높이는 몸가지는 거동과 질서가 있으며, 승가리(僧伽梨)와 모든 옷 입기와 바루 가지는 것, 다니고 머무르기나 앉고 눕기나, 자고 깨기나, 말하고 잠잠하는 것을 다 바로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그리고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한 생각이 나면 착한 법의 생각으로써 다스려 끊고 멸하여 그치게 하나니, 마치 목수나 목수의 제자가 먹줄을 가지고 나무에 퉁기면 곧 날카로운 도끼로 쪼아 곧게 다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생각이 나면 착한 법의 생각으로써 다스려 끊고 멸하여 그치게 한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아래윗니를 서로 붙이고 혀를 윗잇몸 천장에 붙이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려, 다스려 끊고 멸하여 그치게 하나니, 마치 두 역사(力士)가 한 약한 사람을 붙잡고 여러 곳으로 끌고 다니며 마음대로 두드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아래윗니를 서로 붙이고 혀를 윗잇몸 천장에 붙이고 마음으로서 마음을 다스려, 다스려 끊고 멸하여 그치게 한다.
이렇게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들숨을 생각하여 곧 들숨을 생각하는 줄을 알고, 날숨을 생각하여 곧 날숨을 생각하는 줄을 알며, 들숨이 길면 곧 들숨이 긴 줄을 알고, 날숨이 길면 곧 날숨이 긴 줄을 알며, 들숨이 짧으면 곧 들숨이 짧은 줄을 알고, 날숨이 짧으면 곧 날숨이 짧은 줄을 알며, 온 몸에 숨이 드는 것을 깨닫고 온 몸에 숨이 나는 것을 깨달으며, 몸의 행을 그치어 숨을 들이쉬기를 배우고, 입의 행을 그치어 숨을 내쉬기를 배운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욕(欲)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몸을 적시고 불우되 두루하고 충만하여 이 몸 가운데 있어서 욕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나니, 마치 어떤 목욕하는 사람이 그릇에 콩가루를 담고 물을 타서 덩이를 만들어 물에 적시고 불우되 두루 하고 충만하여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욕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몸을 적시고 불우되 두루 하고 충만하여 이 몸 가운데 있어서 욕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은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정(定)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몸을 적시고 불우되 두루 하고 충만하여 이 몸 가운데 있어서 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은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나니, 마치 산의 샘물이 청정하여 흐리지 않고 충만하고 흘러 넘쳐 사방에서 물이 와도 들어갈 길이 없나니, 곧 그 샘 밑의 물이 스스로 솟아나 밖으로 흘러 넘쳐 산을 적시고 불우되 두루 하고 충만하여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몸을 적시고 불우되 두루 하고 충만하여 이 몸 가운데 있어서 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은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기쁨이 없는 데서 생기는 즐거움이 몸을 적시고 불우되 두루 하고 충만하여 이 몸 가운데 있어서 기쁨이 없는 데서 생기는 즐거움은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나니, 마치 푸른 하늘 연꽃이나 붉고 빨갛고 흰 연꽃이 물에서 나고 물에서 자라 물밑에 있으면, 그 뿌리와 줄기와 꽃과 잎이 모두 젖고 붇되 두루 하고 충만하여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기쁨을 떠나는 데서 생기는 즐거움은 몸을 적시고 불우되 두루 하고 충만하여 이 몸 가운데 있어서 기쁨이 없는 데서 생기는 즐거움은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이 몸 가운데 있어서 청정한 마음으로 해득하기를 두루 하고 충만하여 성취하여 노닌다. 마치 어떤 사람이 七주(肘)되는 옷이나 八주되는 옷을 입어 머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그 몸을 싸지 않은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이 몸 가운데 있어서 청정한 마음으로서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광명상(光明想)을 생각[念]하여 잘 받아 가지고 생각한 바를 잘 기억하여, 앞에와 같이 뒤에도 또한 그러하고 뒤에와 같이 앞에도 또한 그러하며, 낮에와 같이 밤에도 또한 그러하고 밤에와 같이 낮에도 또한 그러하며, 아래와 같이 위에도 또한 그러하고 위에와 같이 아래도 또한 그러하나니, 이렇게 뒤바뀌지 않고, 다음에는 얽매임이 없이 광명심(光明心)을 닦아 마음은 마침내 어두움에 덮이지 않는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관찰하는 모습을 잘 받아들이고 생각한 바를 잘 기억하나니, 마치 어떤 사람이 앉아서 누운 사람을 관찰하고, 누워서 앉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관찰하는 모습을 잘 받아들이고 생각한 바를 잘 기억한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다시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이 몸은 어디 있거나 좋거나 밉거나 머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온갖 더러운 것이 충만해 있다고 관찰한다.
곧 내 이 몸 가운데에는 머리털, 터럭, 손톱, 이(齒), 추하고 곱고 엷은 살갗, 가죽, 살, 힘줄, 뼈, 심장, 콩팥, 간, 허파, 큰창자, 작은창자, 지라, 밥통, 똥, 뇌수, 눈꼽, 땀, 눈물, 가래침, 고름, 피, 기름, 골수, 침, 쓸개, 오줌이 있다고. 마치 그릇에 몇 가지 종자를 담은 것 같아서 눈이 있는 사람은 다 분명히 보나니, 곧 벼나 조 종자나 갓이나 무우나 겨자 종자와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은 어디 있거나, 좋고 밉거나 머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더러운 것이 충만하다고 관찰한다.
곧 내 이 몸 가운데에는 머리털, 터럭, 손톱, 이, 추하고 곱고 얇은 살갗, 가죽, 살, 힘줄, 뼈, 심장, 콩팥, 간, 허파, 큰창자, 작은창자, 지라, 밥통, 똥, 골, 뇌수, 눈꼽, 땀, 눈물, 가래침, 고름, 피, 기름, 골수, 침, 오줌이 있다고.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몸에 있는 모든 경계[界]를 관찰하나니, 곧 내 몸 가운데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 허공의 요소, 의식(意識)의 요소가 있다고. 마치 백정이 소를 잡아 껍질을 벗겨 땅에 펴고 그것을 여섯 동강으로 가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 있는 모든 요소를 관찰하나니, 곧 내 몸 가운데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 허공의 요소, 의식의 요소가 있다고.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저 송장이 一, 二일, 혹은 六, 七일이 되어 까마귀나 소리개에게 쪼이고 승냥이나 이리에게 먹히며, 불에 살리고 땅에 묻히어 다 썩어 문들어지는 것을 관찰한다. 관찰한 뒤에는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이 몸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법이 함께 있어서 마침내 떠날 수 없다’고.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몸의 해골은 푸른빛으로 썩어 문들어지고, 남은 반의 뼈사슬은 땅에 뒹구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하여 그것을 본 뒤에는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이 몸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법이 함께 있어서, 마침내 떠날 수가 없다’고.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몸의 가죽과 살과 피를 떠나 오직 힘줄만이 서로 이어 있는 것을 보는 것 같이 하여 그것을 본 뒤에는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이 몸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법이 함께 있어서 마침내 떠날 수가 없다’고.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몸의 뼈마디가 풀리어 여러 곳에 흩어져 발뼈, 장단지뼈, 넓적다리뼈, 허리뼈, 등뼈, 어깨뼈, 목뼈, 머리뼈들이 제각기 다른 곳에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하여 그것을 본 뒤에는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이 몸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법이 함께 있어서 마침내 떠날 수가 없다’고.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몸의 뼈는 희기는 마치 소라와 같고 푸르기는 집비둘기 같으며, 붉기는 피를 칠한 것 같이 하여 그것을 본 뒤에는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이 몸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법이 함께 있어서 마침내 떠날 수가 없다’고.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나니, 만일 비구, 비구니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면, 이것을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염처(念處)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각(覺)>을 관찰하기를 각과 같이 하는 염처라 하는가. 비구는 즐거운 감각을 깨달으면 곧 즐거운 감각을 깨닫는 줄을 알고, 괴로운 감각을 깨달을 때에는 곧 괴로운 감각을 깨닫는 줄 알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깨달을 때에는 곧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깨닫는 줄을 안다.
즐거운 몸, 괴로운 몸,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몸과 즐거운 마음, 괴로운 마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마음과 즐거운 거리[食], 괴로운 거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거리와 즐거운 거리도 없고 괴로운 거리도 없으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거리도 없고 괴로운 거리도 없으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거리도 없고, 즐거운 욕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욕심과 즐거운 무욕각(無欲覺), 괴로운 무욕각도 또한 그러하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무욕각을 깨달을 때에는 곧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무욕각을 깨닫는 줄을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각(覺)을 관찰하기를 각과 같이 하고, 바깥 각을 관찰하기를 각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각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각을 관찰하기를 각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나니, 만일 비구, 비구니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각을 관찰하기를 각과 같이 하면, 이것을 각을 관찰하기를 각과 같이 하는 염처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마음을 관찰하기를 마음다이 하는 염처라 하는가. 비구는 욕심이 있으면 욕심이 있다는 참뜻을 알고, 욕심이 없으면 욕심이 없다는 참뜻을 알며, 성냄이 있고 성냄이 없는 것과 어리석음이 있고 어리석음이 없는 것과 더러움이 있고 더러움이 없는 것과 모임이 있고 흩어짐이 있는 것과 낮춤이 있고 높임이 있는 것과 작음이 있고 큼이 있는 것과 닦고 닦지 않음과 정(定)하고 정하지 않은 것도 또한 그러하며,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 있으면 해탈하지 않은 마음의 참뜻을 알고 해탈한 마음이 있으면 해탈한 마음의 참뜻을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마음을 관찰하기를 마음과 같이 하고, 바깥 마음을 관찰하기를 마음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마음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마음을 관찰하기를 마음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나니, 만일 어떤 비구, 비구니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관찰하기를 마음과 같이 하면, 이것을 마음을 관찰하기를 마음과 같이 하는 염처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법을 관찰하기를 법다이 하는 염처라 하는가. 눈은 빛깔을 반연하여 안의 번뇌가 생긴다. 비구는 안에 진실로 번뇌가 있으면 안에 번뇌가 있다는 참뜻을 알고, 안에 진실로 번뇌가 생기면 그 참뜻을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안의 번뇌가 멸해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 참뜻을 안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도 또한 그러하며, 뜻은 법을 반연하여 안의 번뇌가 생긴다. 비구는 안에 진실로 번뇌가 있으면 안에 번뇌가 있다는 참뜻을 알고, 안에 진실로 번뇌가 없으면 안에 번뇌가 없다는 참뜻을 알며, 만일 아직 생기지 않은 안의 번뇌가 없다는 참뜻을 알며, 만일 아직 생기지 않은 안의 번뇌가 생기면 그 참뜻을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안의 번뇌가 멸해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 참뜻을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고, 바깥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샅이 하여, 생각을 세워 법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는 염처라 하는 것이라 하나니, 곧 안의 六처(處)이니라.
비구는 법을 관찰하기를 법다이 한다. 비구는 안에 진실로 욕심이 있으면 욕심이 있다는 참뜻을 알고, 안에 진실로 욕심이 없으면 욕심이 없다는 참뜻을 알며, 만일 아직 생기지 않은 욕심이 생기면 그 참뜻을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욕심이 멸해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 참뜻을 안다.
이와 같이 성냄, 잠, 들뜸도 또한 그러하며, 안에 진실로 의심이 있으면 의심이 있는 참뜻을 알고, 안에 진실로 의심이 없으면 의심이 없다는 참뜻을 알며, 만일 아직 생기지 않은 의심이 생기면 그 참뜻을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의심이 멸해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 참뜻을 안다.
이와 같이 비구가 안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고, 바깥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법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나니, 곧 五개(蓋)이니라.
비구는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한다. 비구는 안에 진실로 염각지(念覺支)가 있으면 염각지가 있다는 참모양을 알고, 안에 진실로 염각지가 없으면 염각지가 없다는 참 모양을 알며, 만일 아직 생기지 않은 염각지가 생기면 그 참 모양을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염각지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또 쇠퇴하지도 않고 더욱 닦아 더하고 넓어지면 그 참 모양을 안다.
이와 같이 택법(擇法), 정진(精進), 기쁨, 쉼, 정(定)도 또한 그러하며, 비구는 안에 진실로 사각지(捨角支)가 있으면 사각지가 있다는 참모양을 알고, 안에 진실로 사각지가 없으면 사각지가 없다는 참모양을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사각지가 생기면 그 참모양을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사각지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쇠퇴하지도 않고, 더욱 닦아 더하고 넓어지면 그 참 모양을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고, 바깥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법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나니, 곧 七각지(覺支)이니라. 만일 어떤 비구, 비구니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면, 이것을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는 염처라 하느니라.
만일 어떤 비구, 비구니가 七년 동안 마음을 세워 바르게 四념처에 머무르면 그는 반드시 二과(果)를 얻을 것이요, 혹은 현재에서 구경(究竟)의 지혜를 얻고, 혹은 남음이 있어 아나함(阿那含)을 얻을 것이다. 七년, 六, 五, 四, 三, 二, 一년은 그만 두고, 만일 어떤 비구, 비구니가 七개월 동안이라도 마음을 세워 바르게 四념처에 머무르면 그는 반드시 二과를 얻을 것이요, 혹은 현재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고, 혹은 남음이 있어서 아나함을 얻을 것이다.
七개월, 六, 五, 四, 三, 二, 一개월은 그만 두고, 어떤 비구, 비구니가 이레 낮, 이레 밤 동안이라도 마음을 세워 바르게 四념처에 머무르면 그는 반드시 二과를 얻을 것이요, 혹은 현재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고, 혹은 남음이 있어 아나함을 얻을 것이다. 이레 낮, 이레 밤, 六, 五, 四, 三, 二는 그만두고 하루 낮, 하룻밤도 그만 두고, 만일 어떤 비구, 비구니가 잠깐 동안이라도 마음을 세워 바르게 四념처에 머물러, 그는 아침에 이렇게 행하면 저녁에는 반드시 승진(昇進)하게 될 것이요, 저녁에 이렇게 행하면 아침에는 반드시 승진하게 될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