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아함경 제42권
162. 분별육계경(分別六界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마가다국에 노닐으시면서 왕사성에 나아가 묵으시게 되었다.
이에 세존께서는 어느 질그릇 만드는 집에 가서 말씀하시었다.
“도사(陶師)여, 나는 너의 저 질그릇 방에서 하룻밤 묵고자 하는데 들어주겠는가.”
“나는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비구가 먼저 그 방에 들어 있습니다. 만일 그가 들어준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때에 존자 푹쿠사티[弗迦邏娑利]가 이미 그 질그릇 방에 먼저 들어 있었다. 이에 세존께서는 도사의 집에서 나와 그 질그릇 방으로 가서, 존자 푹쿠사티에게 말씀하시었다.
“비구여, 나는 이 질그릇 방에서 하룻밤을 묵고자 하는데 너는 들어주겠는가.”
존자 푹쿠사티는 대답하였다.
“그대여, 나는 상관없다. 이 질그릇 방에는 풀자리가 이미 깔려져 있다. 그대가 묵고자 하거든 마음대로 하라.”
그 때에 세존께서는 그 질그릇 방에서 밖으로 나와 발을 씻으시고는, 도로 안으로 들어가 풀자리 위에 니사단을 펴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 밤이 새도록 잠자코 정(定)에 들어 계시었다. 그 대에 세존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시었다. ‘이 비구는 정에 머물러 있다. 참으로 기특하다. 나는 이제 저 비구에게 너의 스승은 누구며 너는 누구를 의지하여 집을 나와 도를 배우고 법을 받았는가고 물어 보리라.’ 세존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시고 곧 물으시었다.
“비구여, 너의 스승은 누구인가. 너는 누구를 의지하여 집을 나와 도를 배우고 법을 받았는가.”
존자 푹쿠사티는 대답하였다.
“현자여, 사문 고오타마라는 샤아캬족의 아들은 샤아카 종족을 버리고,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집을 버리어 집이 없이 도를 배워 위없는 정진각(正盡覺)을 얻었습니다. 그이가 내 스승입니다. 나는 그이를 의지하여 집을 나와 도를 배우고 법을 받았습니다.”
세존께서는 곧 다시 물으시었다.
“비구여, 일찍 스승을 뵈온 일이 있는가.”
“뵈옵지 못했습니다.”
“만일 스승을 뵈오면 알아보겠는가.”
존자 푹쿠사티는 대답하였다.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현자여, 나는 세존께서는 여래, 무소착, 등정각, 명행성위, 선서, 세간해, 무상사, 도법어, 천인사, 불중우라고 호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내 스승입니다. 나는 그이를 의지하여 집을 나와 도를 배우고 법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다시 이렇게 생각하시었다. ‘이 족성자(族姓子)는 나를 의지해 집을 나와 도를 배우고 법을 받았다. 나는 이제 그를 위해 설법해야 하리라.’ 세존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시고 존자 푹쿠사티에게 말씀하시었다.
“비구여, 나는 너를 위해 설법하리라. 이 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으며 마지막도 또한 좋아, 뜻도 있고 문채도 있으며, 구족하고 청정하여 범행을 나타낸다. 이른바 六계(界)를 분별하는 것이니, 너는 마땅히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존자 푹쿠사티는
“예예.”
하고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었다.
“비구여, 사람에게는 六의 계취(界趣), 六의 촉처(觸處), 十八의 의행(意行), 四의 주처(住處)가 있다. 만일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근심스럽고 슬픈 일을 듣지 않을 것이요, 근심스럽고 슬픈 일을 듣지 않은 뒤에는, 그 뜻은 곧 미워하지도 않고 근심하지도 않으며, 수고롭지도 않고 또한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그 가르침은 슬기를 방일(放逸)하게 하지 않고, 참된 진리를 지켜 보호하며, 은혜로운 보시를 키우고, 자라게 하느니라. 비구여, 마땅히 이 최상을 배우고, 지극히 고요함을 배우고, 六계를 분별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비구여, 사람에게는 六의 계취가 있으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른바 지계(地界), 수계(水界), 화계(火界), 풍계(風界), 공계(空界), 식계(識界)니라. 비구여, 사람에게 六의 계취가 있다 함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비구여, 사람에게는 六의 촉처가 있으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른바 비구여, 안촉(眼觸)은 빛깔을 보고, 이촉(耳觸)은 소리를 들으며, 비촉(鼻觸)은 냄새를 맡고, 설촉(舌觸)은 맛을 보며, 신촉(身觸)은 촉감을 깨닫고, 의촉(意觸)은 법을 아느니라. 비구여, 사람에게 六의 촉처가 있다 함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비구여, 사람에게는 十八의 의행이 있으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른바 비구여, 눈이 빛깔을 보아 빛깔의 희주(喜住)를 관찰하고, 빛깔의 우주(憂住)를 관찰하며, 빛깔의 사주(捨住)를 관찰한다. 이렇게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뜻이 법을 알아 법의 희주를 관찰하고, 법의 우주를 관찰하며, 법의 사주를 관찰한다. 비구여, 이 六의 희관(喜觀)과 六의 우관(憂觀)과 六의 사관(捨觀)을 합하여 十八행이 된다. 비구여, 사람에게 十八의 의행이 있다 함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비구여, 사람에게 四의 주처가 있으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른바 참된 진리의 주처와 슬기의 주처와 보시의 주처와 쉼의 주처니라. 비구여, 사람에게 四의 주처가 있다 함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비구여, 어떤 것이 슬기를 방일하게 하지 않는 것인가. 만일 어떤 비구가 몸의 경계를 분별하여 ‘지금 내 이 몸은 안의 지계(地界)가 있어 나면서 받았으니, 그것은 어떠한가. 이른바 머리털과 몸털, 손톱, 이, 굵고 가는 살갗, 껍질, 살, 뼈, 힘줄, 콩팥, 염통, 간, 허파, 지라, 대장, 밥통, 똥 등 이러한 것들이다. 이 몸 속에 다른 것은 안에 있어서 안에 껴잡은 것은 단단한 것으로서, 단단한 성질이 안에 머무르는데, 그것은 나면서 받은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비구여, 이것을 안의 지계라 한다. 비구여, 혹 안의 지계와 바깥의 지계가 있더라도 그 일체는 모두 지계라고 말한다. ‘그 일체는 나의 소유가 아니요, 나는 그의 소유가 아니요, 또한 신(神)도 아니다.’ 이렇게 슬기로 관찰하여 그 진실을 알아 마음이 이 지계에 집착하지 않나니, 비구여, 이것을 지혜를 방일하게 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여, 슬기를 방일하게 하지 않나니, 만일 어떤 비구가 몸의 경계를 분별하여 ‘이제 내 이 몸은 안에 수계(水界)가 있어 나면서 받았으니, 그것은 어떠한가. 이른바 골, 흘떼기, 눈물, 땀, 흐르는 눈물, 가래침, 고름, 피, 기름, 뼛속 기름, 침, 담(淡), 오줌 등 이런 것들이다. 이 몸 속에 다른 것은 안에 있어, 안을 껴잡은 것은 물로서, 물의 성질은 안을 불우는데, 그것은 나면서 받은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비구여, 이것은 안의 수계라 한다. 비구여, 혹 안의 수계와 바깥 수계가 있더라도 그 일체는 모두 수계라고 말한다. ‘그 일체는 나의 소유가 아니요, 나는 그의 소유가 아니며, 또한 신(神)도 아니다.’ 이렇게 슬기로 관찰하여 그 진실을 알아 마음이 이 수계에 집착하지 않나니, 비구여, 이것을 지혜의 방일하게 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여, 슬기를 방일하게 하지 않나니, 만일 어떤 비구가 몸의 경계를 분별하여 ‘지금 내 이 몸은 안에 화계(火界)가 있어 나면서 받았으니 그것은 어떠한가. 이른바 뜨거운 몸, 따뜻한 몸, 번민하는 몸, 온장(溫壯)한 몸이니, 곧 음식을 소화시키는 이러한 것들이다. 이 몸 속에 다른 것은 안에 있어서, 안에서 껴잡힌 것은 불로서, 불의 성질은 안을 덥게 하는데, 그것은 나면서 받은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비구여, 이것은 안의 화계라 한다. 비구여, 혹 안의 화계와 바깥 화계가 있더라도 그 일체는 모두 화계라고 말한다. ‘그 일체는 나의 소유가 아니요, 나는 그의 소유가 아니며, 또한 신도 아니다.’ 이와 같이 슬기로 관찰하여 그 진실을 알아 마음이 이 화계에 집착하지 않나니, 비구여, 이것을 슬기를 방일하게 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다시 비구여, 슬기를 방일하게 하지 않나니, 만일 어떤 비구가 몸의 경계를 분별하여 ‘지금 내 이 몸은 안에 풍계(風界)가 있어 나면서 받았으니, 그것은 어떠한가. 이른바 웃바람, 아랫바람, 옆구리 바람, 제축풍, 축풍(蹴風), 비도풍(非道風), 절절풍(節節風), 날숨 바람, 들숨 바람 등 이런 것들이다. 이 몸 속에 다른 것은 안에 있어, 안에서 껴잡힌 것은 바람의 성질은 안을 움직이는데, 그것은 나면서 받은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비구여, 이것은 안의 풍계라 한다. 비구여, 혹 안의 풍계와 바깥 풍계가 있더라도 그 일체는 모두 풍계라고 말한다. ‘그 일체는 나의 소유가 아니요, 나는 그의 소유가 아니며, 또한 신도 아니다.’ 이와 같이 슬기로 관찰하여 그 진실을 알아 마음이 이 풍계에 집착하지 않나니, 비구여, 이것을 슬기를 방일하게 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다시 비구여, 슬기를 방일하게 하지 않나니, 만일 어떤 비구가 몸의 경계를 분별하여 ‘지금 내 이 몸은 안에 공계(空界)가 있어 나면서 받았으니, 그것은 어떠한가. 이른바 눈구멍, 귀구멍, 코구멍, 목구멍, 입구멍과 목구멍이 움직여,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조용히 목구멍에 머물거나, 혹은 밑으로 내려가 나오는 등 이러한 것들이다. 이 몸 속의 남은 것은 안에 있어서, 안에서 껴잡힌 것은 공간(空間)으로서, 공간은 살이나 가죽이나 뼈나 힘줄이 덮지 않은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비구여, 이것은 안의 공계라 한다. 비구여, 혹 안의 공계와 바깥 공계가 있더라도 그 일체는 모두 공계라고 말한다. ‘그 일체는 나의 소유가 아니요, 나는 그의 소유가 아니며, 또한 신도 아니다.’ 이와 같이 슬기로 관찰하여 그 진실을 알아 마음이 이 공계에 집착하지 않나니, 비구여, 이것을 슬기를 방일하게 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여, 만일 어떤 비구가 이 五계에 대해서 그 진실을 알고, 그 진실을 안 뒤에는 마음이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해탈하면, 오직 남은 식(識)이 있나니, 그것은 어떠한 식인가. 즐거워하는 식, 괴로워하는 식, 기뻐하는 식, 근심하는 식, 버리는 식이니라. 비구여, 즐거운 갱락(更樂)으로 인하여 즐거운 감각이 생기어, 그는 즐거운 감각을 깨닫고, 즐거운 감각을 깨달은 뒤에는 곧 즐거운 감각을 깨닫는 줄을 안다. 만일 어떤 비구가 이 즐거운 갱락을 멸하고, 이 즐거운 갱락을 멸한 뒤에 혹 즐거운 갱락을 좇아 즐거운 감각을 내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도 또한 멸하고 쉬고 그치어 이미 차갑게 된 줄을 아느니라. 비구여, 괴로운 갱락으로 인하여 괴로운 감각이 생기어, 그는 괴로운 감각을 깨닫고, 괴로운 감각을 깨달은 뒤에는 곧 괴로운 감각을 깨닫는 줄을 안다. 만일 어떤 비구가 이 괴로운 갱락을 멸하고, 이 괴로운 갱락을 멸한 뒤에 혹 괴로운 갱락을 좇아 괴로운 감각을 내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도 또한 멸하고 쉬고 그치어 이미 차갑게 된 줄을 아느니라.
비구여, 기쁜 갱락으로 인하여 기쁜 감각이 생기어, 그는 기쁜 감각을 깨닫고, 기쁜 감각을 깨달은 뒤에는 곧 기쁜 감각을 깨닫는 줄을 안다. 만일 어떤 비구가 이 기쁜 갱락을 멸하고, 이 기쁜 갱락을 멸한 뒤에 혹 기쁜 갱락을 좇아 기쁜 감각을 내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도 또한 멸하고 쉬고 그치어 이미 차갑게 된 줄을 아느니라. 비구여, 근심의 갱락으로 인하여 근심의 감각이 생기어, 그는 근심의 감각을 깨닫고, 근심의 감각이 생긴 뒤에는 곧 근심의 감각을 깨닫는 줄을 안다. 만일 어떤 비구가 이 근심의 갱락을 멸하고, 이 근심의 갱락을 멸한 뒤에 혹 근심의 갱락을 좇아 근심의 감각을 내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도 또한 멸하고 쉬고 그치어 이미 차갑게 된 줄을 아느니라. 비구여, 버림의 갱락으로 인하여 버림의 감각이 생기어, 그는 버림의 감각을 깨닫고, 버림의 감각을 깨달은 뒤에는 곧 버림의 감각을 깨닫는 줄을 안다. 만일 어떤 비구가 이 버림의 갱락을 멸하고, 이 버림의 갱락을 멸한 뒤에 혹 버림의 갱락을 좇아 버림의 감각을 내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도 또한 멸하고 쉬고 그치어 이미 차갑게 된 줄을 아느니라.
비구여, 그러저러한 갱락 때문에 그러저러한 감각이 생기고, 그러저러한 갱락이 멸한 뒤에는 그러저러한 감각도 또한 멸한다. 그는 이 감각은 갱락을 따르고, 갱락이 근본이요, 갱락이 원인이며, 갱락을 좇아 나고, 갱락이 우두머리가 되며, 갱락을 의지하여 행하는 줄을 안다. 비구여, 마치 불씨는 찬(鑽)과 사람의 방편으로 말미암아 열(熱)이 서로 합하기 때문에 불어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비구여, 저 많은 나무가 서로 떠나 흩어져 있으면 혹 거기서 불을 내려 하여도 낼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비구여, 그러저러한 갱락 때문에 그러저러한 감각이 생기고, 그러저러한 갱락이 멸한 뒤에는 그러저러한 감각도 또한 멸한다. 그는 이 감각은 갱락을 따르고, 갱락이 근본이요, 갱락이 원인이며, 갱락을 좇아 나고, 갱락이 우두머리가 되며, 갱락을 의지하여 행하는 줄을 안다.
만일 비구가 이 三각(覺)에 물들지 않고 그래서 해탈하면 그 비구는 오직 버림을 두어 지극히 청정할 것이다. 비구여, 그 비구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 청정한 버림은 한량이 없는 공처(空處)로 옮겨 들어가고, 이러한 마음을 닦아서 그것을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거기에서 서고, 그것을 인연하며, 그것에 얽매인다. 나의 이 청정한 버림은 한량이 없는 식처(識處)와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로 옮겨 들어가 이러한 마음을 닦아서 그것을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에서 서고, 그것을 인연하여, 그것에 얽매인다’고.
비구여, 마치 쇠붙이를 단련하기에 공교하고 묘한 사람이 불로 쇠붙이를 달구어 극히 엷게 만들고, 또 화람으로서 자꾸 쇠붙이를 더해 익히고 단련하여 조촐하게 하며, 지극히 부드럽고 연해 광명이 나게 하는 것과 같나니, 비구여, 이 쇠붙이는 그 장인(匠人)에게서 자꾸 불기운을 더해 익히고 단련하여 조촐하게 되고, 지극히 부드럽고 연해 광명이 있게 된 뒤에는, 그 장인은 자기가 만들고 싶은 대로 혹은 五색 비단을 잇고, 새옷을 꾸미며, 가락지, 팔찌, 영락, 보만(寶鬘) 등 자기 마음대로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여, 그 비구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의 이 청정한 버림은 한량이 없는 공처로 옮겨 들어가, 이러한 마음을 닦아서 그것을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거기에서 서고, 그것을 인연하며, 그것에 얽매인다.
나의 이 청정한 버림은 한량이 없는 식처, 무소유처, 비유상비무상처로 옮겨 들어가, 이러한 마음을 닦아서 그것을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거기에서 서고, 그것을 인연하며, 그것에 얽매인다.’고 하느니라.
그 비구는 다시 ‘나의 이 청정한 버림이 한량이 없는 공처를 의지한다면 이것은 원래 유위(有爲)다. 만일 그것이 유위라면 그것은 곧 항상됨이 없는 것이요, 만일 그것이 항상됨이 없다면 그것은 곧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것이 괴로운 것이라면 곧 괴로운 것인 줄 알 것이요, 괴로운 것인 줄 안 뒤에는 그는 다시는 이 버림을 옮겨 한량이 없는 공처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이 청정한 버림이 한량이 없는 식처, 무소유처, 비유상비무상처를 의지한다면 이것은 원래 유위다. 만일 그것이 유위라면 그것은 곧 항상됨이 없는 것이요, 만일 그것이 항상됨이 없다면 그것은 곧 괴로운 것이다.’라고. 만일 그것이 괴로운 것이라면 곧 괴로운 것인 줄 알 것이요, 괴로운 것인 줄 안 뒤에는 그는 다시는 이 버림을 옮겨 한량이 없는 식처, 무소유처, 비유상비무상처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비구여, 만일 어떤 비구가 이 네 곳을 슬기로 관찰하여 그 진실을 알아 마음이 성취하지 않고, 옮겨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는 그 때에는 다시는 유위가 아니요, 또한 있고 없음을 생각하는 바도 없을 것이다. 그는 몸을 받아 최후로 깨달았으면 곧 몸을 받아 최후로 깨달은 줄을 알 것이요, 목숨을 받아 최후로 깨달았으면 곧 목숨을 받아 최후로 깨달은 줄을 알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 수명을 이미 마친 뒤에는, 그의 깨달은 바는 일체가 멸하고 쉬고 그치어 차갑게 된 줄을 알 것이다. 비구여, 비유컨대 등불을 켜매 기름과 심지를 의지하나니, 만일 기름을 계속해서 더해 주지 않고, 심지를 이어 주는 사람이 없으면, 먼저 것은 이미 다하고, 뒤의 것은 계속 피지 않아 다시 받을 것이 없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이 비구가 몸을 받아 최후로 깨달았으면 곧 몸을 받아 최후로 깨달은 줄을 알고, 목숨을 받아 최후로 깨달았으면 곧 목숨을 받아 최후로 깨달은 줄을 알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 수명을 이미 마친 뒤에는 그의 깨달은 바는 일체가 멸하고 쉬고 그치어 차갑게 된 줄을 안다. 비구여, 이것을 비구의 제일의 바른 슬기라 한다. 이른바 마지막까지 멸한 데 이른 것이니, 누(漏)가 다한 비구는 그것을 성취하여 제일의 바른 슬기의 곳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비구여, 그는 그 제일의 참다운 진리의 곳을 성취하는 것이다. 비구여, 그 비구는 보시를 베푸나니, 혹 옛날의 원수가 있더라도 그는 그때에는 그것을 버리고 배앝고 떠나서 해탈하고 없애어 다한다. 비구여, 이것을 비구의 제일의 바른 은혜의 보시라 한다. 이른바 일체의 세간을 모두 버리고 욕심이 없으며, 멸하고 쉬고 그치나니 비구여, 그것을 성취하면 제일의 은혜의 보시의 곳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비구여, 그 비구의 마음이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더럽혀지면 해탈을 얻지 못하나니, 이 일체의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해 욕심이 없으면, 멸하고 쉬고 그치면 제일의 쉼을 얻게 되나니, 비구여, 그것을 성취하면 제일의 쉼의 곳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비구여, <나(我)>란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다. <나>가 있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요, <나>는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라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며, <나>는 빛이 있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요, <나>는 빛깔이 없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요, <나>는 빛깔이 있는 것도 아니요 빛깔이 없는 것도 아니라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요, <나>는 생각[想]이 없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며, <나>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니, 이것은 뽐내는 것이요, 이것은 교만이며, 이것은 방일(放逸)이다. 비구여, 만일 이 일체의 자랑과 뽐냄과 교만과 방일이 없으면 그것을 뜻의 쉼이라 하느니라.
비구여, 만일 그 뜻이 쉬면 곧 미워하지도 않고 근심하지도 않으며, 괴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그 비구는 법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다시 미움을 말할 것이 없느니라. 만일 미워하지 않으면 걱정하지 않을 것이요, 걱정하지 않으면 시름하지 않을 것이며, 시름하지 않으면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요, 괴로워하지 않으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곧 열반을 얻게 될 것이니, 그래서 생(生)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목숨을 받지 않는다는 진실을 알 것이니라.”
이렇게 설법하시어 마치자, 존자 푹쿠사티는 티끌을 멀리 하고 때[垢]를 여의어 모든 법눈이 생기었다.
이에 존자 푹쿠사티는 법을 봐 법을 얻고, 희고 깨끗한 법을 깨달아 의심을 끊고, 의혹을 넘어 다시는 달리 높일 이 없고, 다시 남을 의지할 것 없어, 아무 망설임 없이, 이미 과증(果證)에 머물러 세존의 법에서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며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나는 회개하나이다. 선서시여, 나는 고백하나이다. 미련한 사람처럼, 미친 사람처럼, 정신이 돈 사람처럼, 바보처럼 좋은 밭을 알아보지 못해 스스로 능히 알지 못하였나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여래, 무소착, 등정각을 일컬어 ‘그대’라고 불렀기 때문이옵니다. 원컨대 세존이시여, 나의 회개를 받아들여 주소서. 나는 이제 회개한 뒤에는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나이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비구여, 너는 진실로 미련하고 미쳤으며, 너는 진실로 정신이 돌고 바보이었다. 너는 여래, 무소착, 등정각을 일컬어 ‘그대’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비구여, 만일 네가 스스로 회개하고 알고는 드러내며, 조심해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다면 비구여, 그와 같이 한다면 곧 거룩한 법률에 있어서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능히 스스로 회개하고 알고는 드러내며, 조심하여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존자 푹쿠사티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163. 분별육처경(分別六處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에 노닐으시면서 승림 급고독원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설법하리라. 그것은 처음도 묘하고 중간도 묘하며, 마지막도 또한 묘하다. 뜻도 있고 문채도 있고, 구족하고 청정하여 범행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른바 분별육처경(分別六處經)이니,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때에 모든 비구들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가르치심을 받겠나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너희들은 마땅히 六처(處)의 안을 알아야 하고, 六갱락처(更樂處)의 안을 알아야 하며, 十八의행(意行)의 안을 알아야 하고, 三十六도(刀)의 안을 알아야 하며, 그 중에서 그것을 끊고, 이것을 성취하고, 한량이 없는 설법에서 마땅히 안을 알아야 한다.
三의지(意止)란 이른바 성인(聖人)이 익히는 바요, 성인이 익힌 뒤에는 대중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니라. 위없는 조어사(調御士)는 사람들을 다루어 일체의 방위(方位)로 나아가게 하나니, 이것을 분별육처경(分別六處經)의 일이라 하느니라.
마땅히 六처의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른바 안처(眼處)와 이(耳), 비(鼻), 설(舌), 의처(意處)이니, 마땅히 六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마땅히 六갱락처의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른바 눈의 갱락은 빛깔을 보기 때문이요, 귀의 갱락은 소리를 듣기 때문이며, 코의 갱락은 냄새를 맡기 때문이요, 혀의 갱락은 맛을 맛보기 때문이며, 몸의 갱락은 닿음을 깨닫기 때문이요, 뜻의 갱락은 법을 알기 때문이니, 六갱락처의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마땅히 十六의행의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비구는 눈으로 빛깔을 본 뒤에는 빛깔의 희주(喜住)를 분별하고, 빛깔의 우주(憂住)를 분별하며 빛깔의 사주(捨住)를 분별한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도 또한 그러하며, 뜻이 법을 안 뒤에는 법의 희주를 분별하고, 법의 우주를 분별하며, 법의 사주를 분별한다. 이것을 六희(喜)를 분별하고, 六우(憂)를 분별하며, 六사(捨)를 분별하는 것이라 하고, 모두 말해 十八의행이라 한다. 마땅히 十八의행의 안을 알야야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마땅히 三十六도(刀)의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六희가 집착을 의지하는 일도 있고, 六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일도 있으며, 六우가 집착을 의지하는 일도 있고, 六우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일도 있으며, 六사가 집착을 의지하는 일도 있고, 六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일도 있다. 어떤 것이 六회가 집착을 의지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六회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이 빛깔을 보고는 기쁨을 내는 데에 二종이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것이 기쁨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이 빛깔을 보고 사랑스럽다 하여 마음으로 생각하고 빛깔을 사랑하며, 욕심과 어울리는 즐거움이 있어 아직 얻지 못한 것은 얻고자 하고, 이미 얻은 것은 기억하여 기뻐하나니, 이러한 기쁨을 집착에 의지하는 기쁨이라 한다. 어떤 것이 기쁨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빛깔은 항상됨이 없어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두 욕심이 없이 멸하고 쉬어져, 과거나 현재의 일체의 빛깔은 항상됨이 없고, 괴로움이며 멸하는 법으로서 그것을 기억하고는 기쁨을 내나니, 이러한 기쁨을 기쁨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니라. 뜻이 법을 알고 기쁨을 내는 데에도 二종이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것이 기쁨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뜻이 법을 알고 사랑스럽다 하여 마음으로 생각하고 법을 사랑하며, 욕심과 어울리는 즐거움이 있어 아직 얻지 못한 것은 얻고자 하고, 이미 얻은 것은 기억하고 기뻐하나니, 이러한 기쁨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것이 기쁨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법은 항상됨이 없어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두 욕심이 없이 멸하고 쉬어져, 과거나 현재의 일체의 법은 항상됨이 없고 괴로우며 멸하는 법으로서 그것을 기억하고는 기쁨을 내나니, 이러한 기쁨을 기쁨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六우가 집착을 의지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六우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이 빛깔을 보고는 근심하는 데에 二종이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집착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것이 근심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으로 빛깔을 보고 사랑스럽다 하여 마음으로 생각하고 빛깔을 사랑하며, 욕심과 어울리는 즐거움이 있지마는 아직 얻지 못한 것은 얻지 못하고, 이미 얻은 것은 과거로 흩어져 무너지고 멸하고 변하고 바뀜으로 근심하나니, 이러한 근심을 집착을 의지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근심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빛깔은 항상됨이 없어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두 욕심이 없이 멸하고 쉬어져, 과거나 현재의 일체의 빛깔은 항상됨이 없고 괴로우며 멸하는 법으로서 그것을 기억하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저기서 성취하여 노닐 수 있을까. 이른바 <저기>란 모든 성인들이 성취하여 노닌 곳이다.’라고. 이것을 상구촉원(上具觸願)하고 두려워하며, 괴로움의 근심을 알아 근심한다고 하는 것이니, 이러한 근심을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니라.
뜻이 법을 알고 근심하는 데에도 二종이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것이 근심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뜻이 법을 알고 사랑스럽다 하여, 마음으로 생각하고 법을 사랑하며, 욕심과 어울리는 즐거움이 있지마는 아직 얻지 못한 것은 얻지 못하고, 이미 얻은 것은 과거로 흩어져 무너지고 멸하며 변하고 바뀜으로 근심하나니, 이러한 근심을 집착을 의지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거시 근심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법은 항상됨이 없어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두 욕심이 없이 멸하고 쉬어져, 과거나 현재의 일체의 법은 항상됨이 없고 괴로우며 멸하는 법으로서 그것을 기억하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저기>서 성취하여 노닐 수 있을까. 이른바 <저기>란 모든 성인들이 성취하여 노닌 곳이다.’라고. 이것을 상구촉원하고 두려워하며, 괴로움의 근심을 알아 근심하나니, 이러한 근심을 욕심 없음을 의지한 것이라 한다.
어떤 것이 六사가 집착을 의지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六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이 빛깔을 보고 버리는 데에 二종이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것이 버림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이 빛깔을 알고는 그것을 버린다. 그는 평등하여 많이 듣지 않고,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범부의 빛깔을 위하여 버림이 있으나 빛깔을 떠나지 않나니, 이것을 버림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것이 버림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빛깔은 항상됨이 없어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고, 모두 욕심이 없이 멸하고 쉬어져, 과거나 현재의 일체의 빛깔은 항상됨이 없고 괴로우며 멸하는 법으로서 그것을 기억하고는 버림에 머무르며, 만일 지극한 뜻이 있으면 버림을 닦아 익히나니, 이것을 버림의 욕심의 없음을 의지하는 것이라 한다.
뜻이 법을 알고는 그것을 버리는 데에도 二종이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것이 버림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뜻이 법을 알고는 그것을 버린다. 그는 평등하여 많이 듣지 않고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범부의 법을 위하여 버림이 있으나 법을 떠나지 않나니, 이것을 버림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것이 버림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뜻은 법이 항상됨이 없어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고, 모두 욕심이 없이 멸하고 쉬어져, 과거나 현재의 일체의 법은 항상됨이 없고 괴로우며 멸하는 법으로서 그것을 기억하고는 버림에 머무른다. 만일 지극한 뜻이 있으면 버림을 닦아 익히거나 이것을 버림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이것을 六희가 집착을 의지하고, 六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며, 六유가 집착을 의지하고, 六우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며, 六사가 집착을 의지하고, 六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이라 하나니, 모두 말하며 三十六도요, 마땅히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 때문에 말한 것이니라.
그 중에서 그것을 끊고 이것을 성취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른바 이 六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이것을 취(取)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르고, 이른바 이 六우가는 집착을 의지하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렇게 그것을 끊는 것이다. 이른바 이 六유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르고, 이른바 이 六유가 집착을 의지하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렇게 그것을 끊는 것이다. 이른바 이 六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르고, 이른바 이 六사가 집착을 의지하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렇게 그것을 끊는 것이다.
이른바 이 六우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르고, 이른바 이 六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렇게 그것을 끊는 것이다. 이른바 이 六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르고, 이른바 이 六우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렇게 그것을 끊는 것이다.
버림에는 한량이 없는 갱락과 몇 가지의 갱락이 있고, 버림에는 한 갱락이 있어 몇 가지의 갱락이 아니다. 어떻게 버림에는 한량이 없는 갱락과 몇 가지의 갱락이 있는가. 만일 버림이 빛깔을 위하고, 소리를 위하며, 냄새를 위하고, 맛을 위하며, 닿음을 위하는 것이면, 이 버림은 한량이 없는 갱락과 몇 가지의 갱락이다. 어떻게 버림에 한 갱락이 있어 몇 가지의 갱락이 아닌가. 이른바 버림은 혹은 한량이 없는 공처를 의지하고, 혹은 한량이 없는 식처를 의지하며, 혹은 무소유처를 의지하고, 혹은 비유상비무상처를 의지한다. 이 버림은 한 갱락으로서 몇 가지의 갱락이 아니다.
이른바 이 버림이 한 갱락이 있고 몇 가지 갱락이 아니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르고, 이른바 이 버림이 한량이 없는 갱락과 몇 가지의 생각이 있으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렇게 그것을 끊는 것이다. 한량이 없음을 취하고, 한량이 없음에 의지하며, 한량이 없음에 머무르나니, 이른바 이 버림이 한 갱락이 있고 몇 가지의 갱락이 아니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르고, 이른바 이 버림이 한량이 없는 갱락과 몇 가지의 갱락이 있으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렇게 그것을 끊는 것이다. 그 중에서 그것을 끊고 이것을 성취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마땅히 한량이 없는 설법의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여래에게는 네 제자가 있으니, 그들은 왕성한 행이 있으며, 왕성한 뜻이 있고, 왕성한 생각(念)이 있으며, 왕성한 슬기가 있다. 변재가 있어서 제일가는 변재를 성취하였으며, 수명은 백 세이니라. 여래는 그들을 위하여 백 년 동안을 설법하였으니, 다만 음식을 먹을 때와 대소변을 볼 때와 잠잘 때 및 모임이 있을 때를 제한다. 그들은 여래가 말씀하는 법의 문구와 법의 글귀에 대해서 그 뜻을 관찰하는 데 슬기로써 얼른 그 뜻을 관찰하고, 다시는 여래의 법을 묻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의 설법은 끝이 없고, 그 법을 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구와 법구(法句)의 뜻을 관찰하다가 끝내 네 제자는 목숨을 마치게 되었다. 마치 활 잘 쏘는 네 사람이 활줄을 세게 당겨 화살을 함께 쏠 때 잘 배우고 잘 알고 또 방편이 없어 걸림이 없고 빨리 지나가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여래에게는 네 제자가 있으니, 그들은 왕성한 행이 있으며, 왕성한 뜻이 있고, 왕성한 생각이 있으며, 왕성한 슬기가 있다. 변재가 있어서 제일가는 변재를 성취하였으며, 수명은 백 세이니라. 여래는 그들을 위하여 백 년 동안을 설법하였으니, 다만 음식을 먹을 때와 대소변을 볼 때와 잠잘 때 및 모임이 있을 때를 제한다. 그들은 여래가 말씀하는 문구와 법의 글귀에 대해서 슬기로써 얼른 그 뜻을 관찰하고, 다시는 여래의 법을 묻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의 설법은 끝이 없고, 그 법을 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마땅히 한량이 없는 설법의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三의지(意止)는 이른바 성인의 익히는 바요, 성인이 익힌 뒤에는 대중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란 무슨 말인가. 만일 여래가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할 때에 가엾이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이치 및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며, 자비심을 내나니, 이것은 요익을 위함이요, 쾌락을 위함이며, 요익의 즐거움을 위함이니, 혹 그 제자들이 공경하지 않고, 또한 순종하여 행하지 않으며, 지혜를 세우지 않고, 그 마음이 법과 다음의 법으로 향해 나아가지 않으며, 바른 법을 받지 않고, 세존의 가르침을 어기어 정(定)을 얻지 못하더라도 세존은 그로서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나니, 다만 세존은 그것을 버리고 하는 바가 없이 예사로운 생각[念]과 예사로운 지혜일 뿐이다. 이것이 제일의 의지로서 이른바 성인의 익히는 바요, 성인이 익힌 뒤에는 대중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니라.
다시 여래가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할 때에 가엾이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이치 및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며, 자비심을 내나니, 이것은 요익을 위함이요, 쾌락을 위함이며, 요익의 즐거움을 위함이니, 혹 그 제자들이 공경하고, 또한 순종하여 행하며, 지혜를 세우고, 그 마음이 법과 다음의 법으로 향해 나아가며, 바른 법을 받아 가지고 세존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아, 능히 정을 얻더라도 세존은 그로서 기뻐하지 않나니, 다만 세존은 그것을 버리고, 하는 바가 없이 예사로운 생각과 예사로운 지혜일 뿐이다. 이것이 제 二의 의지로서 이른바 성인의 익히는 바요, 성인이 익힌 뒤에는 대중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니라.
다시 여래가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할 때에 가엾이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이치와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며, 자비심을 내나니, 이것은 요익을 위함이요, 쾌락을 위함이며, 요익의 즐거움을 위함이니, 혹 어떤 제자가 공경하지 않고 또한 순종하여 행하지 않으며, 지혜를 세우지 않고, 그 마음이 법과 다음의 법으로 향해 나아가지 않으며, 바른 법을 받지 않고, 세존의 가르침을 어기어 정을 얻지 못하더라도, 또 혹 어떤 제자는 공경하고 순종하여 행하며, 지혜를 세우고, 그 마음이 법과 다음의 법으로 향해 나아가며, 바른 법을 받아 가지고, 세존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아 능히 정을 얻더라고 세존은 그로서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나니, 다만 세존은 그것을 버리고 하는 바가 없이 예사로운 생각과 예사로운 지혜일 뿐이니라. 이것이 제 三의 의지로서 이른바 성인의 익히는 바요, 성인이 익힌 뒤에는 대중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니라. 三의지는 이른바 성인이 익히는 바요, 성인이 익힌 뒤에는 대중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니라.
위없는 조어사(調御士)는 사람들을 다루어 일체의 방위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조어사는 사람들을 다루어 일방(一方)으로 나아가게 하나니, 혹은 동방, 남방, 서방, 북방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코끼리를 다루는 사람은 코끼리를 다루어 일방으로 나아가게 하나니, 혹은 동방, 남방, 서방, 북방이요, 말을 다루는 사람은 말을 다루어 일방으로 나아가게 하나니, 혹은 동방, 남방, 서방, 북방이며, 소를 다루는 사람은 소를 다루어 일방으로 나아가게 하나니, 혹은 동방, 남방, 서방, 북방이요, 이와 같이 위없는 조어사는 사람들을 다루어 일체의 방위로 나아가게 한다.
그 중의 방위란 빛깔이 빛깔을 관찰하나니, 이것을 제일의 방위라 하고, 안으로 빛깔이란 생각[想]이 없고 밖으로 빛깔을 관찰하나니, 이것을 제 二의 방위라 하며, 깨끗하게 해탈하여 몸의 촉감을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제 三의 방위라 하고, 일체의 빛깔이란 생각을 넘어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없애고 약간의 생각도 생각[念]하지 않으며, 한량이 없는 공(空)인 이 한량이 없는 공처(空處)를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제 四의 방위라 하며, 일체의 한량이 없는 공처를 넘어 한량이 없는 식(識)인 이 한량이 없는 식처(識處)를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제 五의 방위라 하고, 일체의 한량이 없는 식처를 넘어 무소유(無所有)인 이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제 六의 방위라 하며, 일체의 무소유처를 넘어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인 이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를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제 七의 방위라 하고, 일체의 비유상비무상처를 넘어 상지(想知)가 멸해 다한 몸의 촉감을 성취하여 노닐며, 슬기로 관찰하고 누(漏)가 다하고 지혜를 끊나니, 이것을 제 八의 방위라 한다. 위없는 조어사가 사람들을 다루어 일체의 방위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164. 분별관법경(分別觀法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에 노닐으시면서 승림 급고독원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설법하리니, 그것은 처음도 묘하고 중간도 묘하며, 마지막도 또한 묘하다. 뜻도 있고 문채도 있으며, 구족하고 청정하며 범행을 나타낸다. 이른바 분별관법경(分別灌法經)이니,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때에 모든 비구들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가르침을 받잡겠나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비구들이여, 이러이러하게 관찰하라. 곧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관찰해 보아, 마음이 밖으로 나가 흩어지고, 마음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는가고 이렇게 관찰하라.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이러이러하게 관찰하라. 곧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관찰해 보아,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마음이 안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아서 두려워하지 않는가고 이렇게 관찰하라. 이렇게 하면 다시는 생, 노, 병, 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고통의 끝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시어 고요히 앉으시었다.
이에 모든 비구들은 곧 이렇게 생각하였다.
‘여러분,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 이러이러하게 관찰하라. 곧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관찰해 보아, 마음이 밖으로 나가 흩어지고, 마음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는가고 이렇게 관찰하라.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이러이러하게 관찰하라. 곧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관찰해 보아,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마음이 안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아서 두려워하지 않는가고 이렇게 관찰하라. 이렇게 하면 다시는 생, 노, 병, 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고통의 끝이라 하느니라>고. 이렇게 이 이치를 간략히 말씀하시어, 널리 분별하시지 않으시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시어 고요히 앉으시었다.’
그들은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다.
‘여러분, 누가 능히 아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널리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다.
‘존자 큰 가전연(迦旃延)은 항상 부처님의 칭찬과 모든 지혜 있는 범행인(梵行人)들의 칭찬을 받고 있다. 존자 큰 가전연은 능히 아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널리 분별할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다 같이 존자 큰 가전연에게 가서 이 뜻을 설명하기를 청하고, 만일 존자 큰 가전연이 그것을 분별하거든 우리들은 그것을 잘 받아 가지자.’
이에 모든 비구들은 존자 큰 가전연에게 가서 문안드리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사뢰었다.
“존자 큰 가전연이여, 세존께서는 간략히 이 이치를 말씀하시어 널리 분별하시지 않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시어 고요히 앉으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러이러하게 관찰하라. 곧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관찰해 보아, 마음이 밖으로 나가 흩어지고, 마음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는가고 이렇게 관찰하라.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이러이러하게 관찰하라. 곧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관찰해 보아,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마음이 안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아서 두려워하지 않는가고 이렇게 관찰하라. 이렇게 하면 다시는 생, 노, 병, 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고통의 끝이라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은 곧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 누가 능히 아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널리 분별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존자 큰 가전연은 항상 부처님의 칭찬과 모든 지혜 있는 범행인들의 칭찬을 받고 있다. 존자 큰 가전연은 능히 아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널리 분별할 것이다.’라고. 원컨대 존자 큰 가전연이여, 우리를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그것을 널리 설명해 주십시오.”
그 때에 존자 큰 가전연을 말했다.
“여러분, 내가 비유로 말하는 것을 들으시오. 슬기로운 사람은 비유를 들으면 곧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오. 여러분, 마치 어떤 사람이 나무심[木心]을 구하기 위하여 도끼를 가지고 숲으로 들어갔소. 그는 큰 나무가 뿌리와 줄기, 마디, 가지, 잎, 꽃 및 열매로 된 것을 보고 뿌리와 줄기, 마디, 열매는 건드리지 않고 다만 가지와 잎만을 건드리는 것과 같이, 여러분의 말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소. 세존께서 현재에 계시는데 그 분을 두고 내게 와서 그 뜻을 묻는 것이오. 무슨 까닭인가. 여러분은 마땅히 아시오. 세존께서는 눈[眼]이요 지혜며 이치요 법이며, 법의 주인이요 법의 장수로서, 진리의 뜻을 말씀하시고, 일체의 이치를 나타내심은 오직 세존에게만 있는 것이오. 여러분은 마땅히 세존께 나아가서 ‘세존이시여, 이것은 어떠하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고 이 뜻을 여쭈어 보시오.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시거든 여러분은 마땅히 잘 받아 가지시오.”
때에 비구들은 사뢰었다.
“그렇습니다, 존자 큰 가전연이여. 세존께서는 눈이요 지혜며, 이치요 법이며, 법의 주인이요 법의 장수로서, 진리의 뜻을 말씀하시고, 일체의 이치를 나타내심은 오직 세존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마땅히 세존께 나아가 ‘세존이시여, 이것은 어떠하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고 그 뜻을 여쭈어 보겠습니다.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들은 마땅히 잘 받아 가지겠습니다. 그러나, 존자 큰 가전연은 항상 세존 및 모든 지혜 있는 범행인들의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존자 가전연은 능히 아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널리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존자 큰 가전연이여, 우리를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그것을 널리 설명해 주십시오.”
존자 큰 가전연은 모든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 모두 내 말을 들으시오. 여러분, 어떻게 비구의 마음이 밖으로 나가 흩어지는가. 여러분, 비구가 눈으로 빛깔을 보면 식(識)은 빛깔 모양을 먹고, 식은 빛깔의 즐거운 모양에 집착하며, 식은 빛깔의 즐거운 모양에 묶이어, 그 빛깔 모양의 맛은 마음을 결박해 밖으로 나가 흩어지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뜻으로 법을 알면 식은 법의 모양을 먹고, 식은 법의 즐거운 모양에 집착하며, 식은 법의 즐거운 모양에 묶이어 그 법의 모양의 맛은 마음을 결박해 밖으로 나가 흩어지오. 여러분, 이렇게 하여 비구의 마음은 밖으로 나가 흩어지는 것이오.
여러분, 어떻게 비구의 마음이 밖으로 나가 흩어지지 않는가. 비구가 눈으로 빛깔을 보아도 식은 빛깔 모양을 먹지 않고, 식은 빛깔의 즐거운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며, 식은 빛깔의 즐거운 모양에 묶이지 않으므로 그 빛깔 모양의 맛은 마음을 결박하지 않아 밖으로 나가 흩어지지 않는 것이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뜻으로 법을 알아도 식은 법의 모양을 먹지 않고, 식은 법의 즐거운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며, 식은 법의 즐거운 모양에 묶이지 않으므로 그 법의 모양의 맛은 마음을 결박하지 않아 밖으로 나가 흩어지지 않는 것이오. 여러분, 이렇게 하여 비구의 마음은 밖으로 나가 흩어지지 않는 것이오.
여러분, 어떻게 비구 마음이 안에 머무르지 않는가. 여러분, 비구는 욕심을 떠나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떠났으나,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어 욕계(欲界)의 악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初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니오. 그러나, 그의 식은 악을 떠나는 맛에 집착해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을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하오. 다시 여러분, 비구는 각과 관이 이미 쉬고, 안이 고요하고, 한마음이 되어 각도 없고 관도 없으나, 정(定)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이선(第二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니오. 그러나, 그의 식은 정의 맛에 집착해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을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하오.
다시 여러분, 비구는 기쁨의 욕심을 떠나 버리고 구함이 없는 데서 노닐며, 바른 생각[念]과 바른 지혜이지마는 몸으로 즐거움을 느끼나니, 이른바 저 성인의 말씀하신 바의 성인의 버림[捨], 생각[念], 즐거움[樂], 머무름[住], 공(空)이 있는 제삼선(第三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니오. 그러나, 그의 식은 기쁨이 없는 맛에 집착하여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에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하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즐거움도 멸하고, 괴로움도 멸하고, 나쁨과 근심은 본래 이미 멸하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 버림과 생각과 청정이 있는 제사선(第四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니오. 그러나, 그 식은 버림과 생각과 청정의 맛에 집착하여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을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하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빛깔이라는 생각을 넘고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몇 가지 생각[想]도 생각[念]하지 않으며, 한량이 없는 공(空)인 이 한량이 없는 공처(空處)를 성취하여 노니오. 그러나, 그의 식은 공(空)의 지혜의 맛에 집착하여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을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하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한량이 없는 공처를 넘어 한량이 없는 식(識)인 이 한량이 없는 식처(識處)를 성취하여 노니오. 그러나, 그의 식은 식의 지혜의 맛에 집착하여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을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하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한량이 없는 식처를 넘어 무소유(無所有)인 이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노니오. 그러나, 그의 식은 무소유의 지혜의 맛에 집착하여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을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하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무소유처를 넘어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인 이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를 성취하여 노니오. 그러나, 그의 식은 무상(無想)의 지혜의 맛에 집착하여 그것에 의지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그것을 인연하고, 그것에 묶이어 그 식은 안에 머무르지 못하오. 여러분, 이렇게 하여 비구 마음은 안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이오.
여러분, 어떻게 비구 마음이 안에 머무르는가. 여러분, 욕심을 떠나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떠났으나, 각이 있고 관이 있어 욕계의 악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니오. 그러나, 그의 식은 악을 떠나는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을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아서 그 식은 안에서 머무르오. 다시 여러분, 비구는 각과 관이 이미 쉬고 안이 고요하고 한마음이 되어, 각도 없고 관도 없으나, 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이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니오. 그러나, 그의 식은 정의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을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아서 그 식은 안에 머무르오.
다시 여러분, 비구는 기쁨의 욕심을 떠나 버리고 구함이 없는 데서 노닐며,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이지마는 몸으로 즐거움을 느끼나니, 이른바 저 성인의 말씀하신 바의 성인의 버림, 생각, 즐거움, 머무름, 공이 있는 제삼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니오. 그러나, 그의 식은 기쁨이 없는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에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아서 그 식은 안에 머무르는 것이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즐거움도 멸하고, 괴로움도 멸하고, 나쁨과 근심은 본래 이미 멸하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 버림과 생각과 청정이 있는 제사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니오. 그러나, 그 식은 버림과 생각과 청정의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을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아서 그 식은 안에 머무르는 것이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빛깔이라는 생각을 넘고,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몇 가지 생각도 생각하지 않으며, 한량이 없는 공인 이 한량이 없는 공처를 성취하여 노니오. 그러나, 그의 식은 공의 지혜의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을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아서 그 식은 안에 머무르는 것이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한량이 없는 공처를 넘어 한량이 없는 식인 이 한량이 없는 식처를 성취하여 노니오. 그러나, 그의 식은 식의 지혜의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을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아서 그 식은 안에 머무르는 것이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한량이 없는 식처를 넘어 무소유인 이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노니요. 그러나, 그의 식은 무소유의 지혜의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을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아서 그 식은 안에 머무르는 것이오. 다시 여러분, 비구는 일체의 무소유처를 넘어 비유상비무상인 이 비유상비무상처를 성취하여 노니오. 그러나, 그의 식은 무상의 지혜의 맛에 집착하지 않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을 인연하지 않고, 그것에 묶이지 않아서 그 식은 안에 머무르는 것이오. 여러분, 이렇게 하여 비구 마음은 안에 머무르는 것이오.
여러분, 어떻게 비구는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는가. 여러분, 비구는 색염(色染)을 떠나지 않고, 색욕(色欲)을 떠나지 않으며 색애(色愛)를 떠나지 않고, 색갈(色渴)을 떠나지 않으오. 여러분, 만일 어떤 비구가 색염을 떠나지 않고, 색욕을 떠나지 않으며, 색애를 떠나지 않고, 색갈을 떠나지 않으면 그는 색을 얻고자 하여 색을 구하고, 색에 집착하며, 색에 머무르오. 그래서 색은 곧 <나[我]>요 색은 내 소유라 하오. 색을 얻고자 하여 색에 집착하고, 색에 머물러 색은 곧 <나>요 색은 내 소유라고 한 뒤에는 식(識)은 색을 움켜잡고, 식이 색을 움켜잡은 뒤에 그 색을 변하고 바꾼 때에는 식은 색으로 변하며, 식이 색으로 변한 뒤에는 그는 두려워하여 마음이 그 가운데 머무르고, 마음이 알기 못하기 때문에 곧 두려워하고 괴로워하여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는 것이오. 이와 같이 각(覺), 상(想), 행(行)도 또한 그러하오.
비구는 식염(識染)을 떠나지 않고, 식욕(識欲)을 떠나지 않으며, 식애(識愛)를 떠나지 않고 식갈(識渴)을 떠나지 않으오. 여러분, 만일 어떤 비구가 식염을 떠나지 않고, 식욕을 떠나지 않으며, 식애를 떠나지 않고, 식갈을 떠나지 않으면 그는 식(識)을 구하고자 하여 식을 구하고, 식에 집착하면 식에 머무르오. 그래서 식은 곧 <나>요 식은 내 소유라 하오. 그가 식을 얻고자 하여 식을 구하고 식에 집착하면 식에 머물러 식은 곧 <나>요 식은 내 소유라 한 뒤에는 식은 식을 움켜잡고, 식이 식을 움켜잡은 뒤에 그 식을 변하고 바꿀 때에는 식은 식으로 변하고, 식이 식으로 변한 뒤에는 그는 두려워하여 마음이 그 가운데 머무르고, 마음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곧 두려워하고 괴로워하여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는 것이오. 여러분, 이와 같이 비구는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는 것이오.
여러분, 어떻게 비구는 집착하지 않아서 두려워하지 않는가. 여러분, 비구는 색염을 떠나고, 색욕을 떠나며 색애를 떠나고, 색갈을 떠나면, 그는 색을 얻고자 하지 않아서 색을 찾지도 않고, 색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색에 머무르지도 않소. 그래서 색은 <나>가 아니요 색은 내 소유가 아니라 하오. 그는 색을 얻고자 하지 않아서 색을 구하지도 않고, 색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색에 머무르지 않아, 색은 <나>가 아니요 색은 내 소유라고 하지 않은 뒤에는 식은 색을 움켜잡지 않고, 식이 색을 움켜잡지 않은 뒤에 그 색을 변하고 바꿀 때에도 식은 색으로 변하지 않으며, 식이 색으로 변하지 않은 뒤에는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은 그 가운데 머무르지 않으며, 마음이 알기 때문에 곧 두려워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아 집착하지 않아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오. 이와 같이 각, 상, 행도 또한 그러하오.
비구는 식염을 떠나고, 식욕을 떠나며, 식애를 떠나고 식갈을 떠나오. 여러분, 만일 어떤 비구가 식염을 떠나고, 식욕을 떠나며, 식애를 떠나고, 식갈을 떠나면 그는 식을 얻고자 하지 않아 식을 구하지도 않고, 식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식에 머무르지 않아서, 식은 <나>가 아니요 식은 내 소유가 아니라 하오. 그가 식을 얻고자 하지 않아 식을 구하지도 않고 식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식에 머물지도 않아 식은 <나>가 아니요 식은 내 소유가 아니라 안 뒤에는 식은 식을 움켜잡지 않고, 식이 식을 움켜잡지 않은 뒤에 그 식을 변하고 바꿀 때에도 식은 식으로 변하지 않으며, 식이 식으로 변하지 않은 뒤에는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은 그 가운데 머무르지 않으며, 마음이 알기 때문에 곧 두려워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아 집착하지 않아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오. 여러분, 이와 같이 비구는 집착하지 않아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오.
여러분, 세존께서 ‘비구들이여, 이러이러하게 관찰하라. 곧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관찰해 보아 마음이 밖으로 나가 흩어지고, 마음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는가고 이렇게 관찰하라. 곧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관찰해 보아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마음이 안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아서 두려워하지 않는가고 이렇게 관찰하라. 이렇게 하면 다시는 생, 노, 병, 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고통의 끝이라 하느니라’고. 이렇게 세존께서는 이 이치를 간략히 말씀하시어 널리 분별하시지 않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시어 고요히 앉으시었소. 나는 이 글귀와 이 글로써 널리 설명한 것이 이와 같소. 여러분, 부처님께 나아가 자세히 여쭈어 보시오.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신 이치와 같거든 여러분들은 마땅히 받아 가지시오.”
이에 여러 비구들은 존자 큰 가전연의 말을 들어 잘 받아 외우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존자 큰 가전연을 세 번 돌고 떠났다. 그들은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아까 이 이치를 간략히 말씀하시어 널리 분별하시지 않으시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시어 고요히 앉으셨나이다. 존자 큰 가전연은 이러한 글귀와 이러한 글로써 그것을 널리 설명하였나이다.”
세존께서는 들으시고 찬탄하시었다.
“착하고 착하다. 그는 내 제자 중에서 눈이 있고 지혜가 있으며, 법이 있고 이치가 있는 사람이다. 무슨 까닭인가. 스승이 제자들을 위해 이 이치를 간략히 말해 널리 분별하지 않은 것을 그 제자는 이런 글귀와 이런 글로서 그것을 널리 설명하였다. 가전연 비구가 설명한 것과 같이 너희들은 마땅히 받아 가져라. 무슨 까닭인가. 관찰의 뜻을 설명한 것이 응당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