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아함경 제43권
165. 온천림천경(溫泉林天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에 노닐으시면서 죽림 가란다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에 존자 삼밋디[三彌提]도 또한 왕사성에 노닐면서 온천림(溫泉林)에 머물러 있었다. 존자 삼밋디는 먼동이 트는 새벽에 방을 나와 온천으로 가서, 언덕 위에서 옷을 벗고 온천에 들어가 목욕한 뒤에 다시 나와 몸을 닦고 옷을 입었다.
그 때에 몸은 지극히 아름답고 얼굴이 의젓한 어떤 하늘은 먼동이 트는 새벽에 존자 삼밋디에게 가서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물러나 한쪽에 서 있었다. 그 하늘 얼굴은 위엄스럽고 극히 아름다와 광명은 온천 언덕을 두루 비추었다. 그 하늘은 한쪽에 서서 존자 삼밋디에게 사뢰었다.
“비구는 바데카랏타게[跋地羅帝偈]를 받아 가지는가.”
존자 삼밋디는 그 하늘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바데카랏타게를 받아 가지지 않는다.”
그는 그 하늘에게 도로 물었다.
“너는 바데카랏타게를 받아 가지는가.”
그 하늘은 대답하였다.
“나도 바데카랏타게를 받아 가지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바데카랏타게를 받아 가지는가.”
“세존께서 이 왕사성에 노닐으시면서 죽림 가란다 동산에 계시는데, 그분은 바데카랏타게를 받아 가지신다. 비구여, 너는 가서 세존에게 직접 바데카랏타게를 잘 받아 가져 외우라. 무슨 까닭인가. 바데카랏타게는 법이 있고 뜻이 있어 범행의 근본이 되며,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족성자(族姓子)로서 지극한 믿음으로 집을 버리어 집이 없이 도를 배우는 자는 마땅히 바데카랏타게를 잘 받아 가지어 외워야 한다.”
그 하늘은 이렇게 말한 뒤 존자 삼밋디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 돌고는 거기서 사라졌다.
이에 존자 삼밋디는 하늘이 사라진 지 오래지 않아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오늘 먼동이 트는 새벽에 방에서 나와 저 온천에 가서, 언덕 위에서 옷을 벗고 온천에 들어가 목욕한 뒤에, 곧 언덕에 나와 몸을 닦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몸은 지극히 아름답고 얼굴이 의젓한 어떤 하늘은 먼동이 트는 새벽에 저에게 와서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물러나 한쪽에 섰었습니다. 그 하늘은 얼굴이 위엄스럽고 극히 아름다와 그 광명은 온천 언덕을 두루 비추었었나이다. 그 하늘은 한쪽에 서서 제게 ‘비구는 바데카랏타게를 받아 가지느냐.’고 하기에, 저는 그 하늘에게 ‘바데카랏타게를 받아 가지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나이다. 저는 도로 그 하늘에게 ‘너는 바데카랏타게를 받아 가지는가.’고 물었나이다. 그 하늘은 ‘나도 또한 바데카랏타게를 받아 가지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나이다. 저는 다시 그 하늘에게 ‘누가 바데카랏타게를 받아 가지느냐’고 물었을 때에 그 하늘은 ‘세존께서 이 왕사성에 노닐으시면서 죽림 가란다 동산에 계시는데, 그 분은 바데카랏타게를 받아 가지신다. 비구여, 너는 가서 세존에게 직접 바데카랏타게를 잘 받아 가져 외워라. 무슨 까닭인가. 바데카랏타게는 뜻이 있고 법이 있어 범행의 근본이 되며,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족성자로서 지극한 믿음으로 집을 버리어 집이 없이 도를 배우는 자는 마땅히 바데카랏타게를 잘 받아 가지어 외워야 한다.’고 말하고, 제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 돌고는 거기서 사라졌나이다.”
세존께서는 물으시었다.
“삼밋디여, 너는 그 하늘이 어디서 왔으며, 그 이름은 무엇인지 아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그 하늘이 어디서 왔으며, 그 이름이 무엇인지 또한 알지 못하나이다.”
“삼밋디여, 그 천자(天子)는 이름이 정전(正殿)으로서 삼십 삼천의 장군이니라.”
이에 존자 삼밋디는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 때입니다. 만일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바데카랏타게를 말씀하시면, 모든 비구들은 세존에게서 그 말씀을 듣잡고 잘 받아 가질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삼밋디여,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나는 너를 위하여 설명하리라.”
존자 삼밋디는
“예, 그러하겠나이다.”
하고 여쭙고 모든 비구들은 분부대로 듣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부디 과거를 생각지 말고
또한 미래를 원하지 말라.
과거의 일은 이미 멸했고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나니
현재에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나니
어느 것도 단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라.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아느니라.
만일 성인의 행을 행하는 이라면
누가 죽음의 근심을 근심하리
나는 결코 그것을 만나지 않으리니.
큰 고통, 재앙은 여기서 끝나리라.
이와 같이 꾸준히 힘써 행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게으르지 말지니
그러므로 이 바데카랏타게를
언제나 마땅히 설(設)해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고요히 앉으시었다. 이에 모든 비구들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했다.
부디 과거를 생각지 말고
또한 미래를 원하지 말라.
과거의 일은 이미 멸했고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나니
현재에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나니
어느 것도 단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라.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아느니라.
만일 성인의 행을 행하는 이라면
누가 죽음의 근심을 근심하리
나는 결코 그것을 만나지 않으리니.
큰 고통, 재앙은 여기서 끝나리라.
이와 같이 꾸준히 힘써 행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게으르지 말지니
그러므로 이 바데카랏타게를
언제나 마땅히 설해야 하느니라.
이렇게 이 가르침을 간략히 말씀하시고 널리 분별하시지 않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가 고요히 앉으시었다.’
그들은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다.
‘누가 능히 아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널리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다.
‘존자 큰 가전연은 언제나 세존 및 모든 지혜로운 범행인들의 칭찬을 받는다. 존자 큰 가전연은 능히 아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널리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 같이 존자 큰 가전연에게 가서 그 뜻을 설명하기를 청하자. 만일 존자 큰 가전연이 분별하거든 우리는 마땅히 잘 그것을 받아 가지자.’
이에 모든 비구들은 존자 큰 가전연에게 가서 문안을 드리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사뢰었다.
“존자 큰 가전연이여, 세존께서는
부디 과거를 생각지 말고
또한 미래를 원하지 말라.
과거의 일은 이미 멸했고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나니
현재에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나니
어느 것도 단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라.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아느니라.
만일 성인의 행을 행하는 이라면
누가 죽음의 근심을 근심하리
나는 결코 그것을 만나지 않으리니.
큰 고통, 재앙은 여기서 끝나리라.
이와 같이 꾸준히 힘써 행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게으르지 말지니
그러므로 이 바데카랏타게를
언제나 마땅히 설해야 하느니라.
고, 이렇게 이 가르침을 간략히 말씀하시어 널리 분별하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고요히 앉으셨습니다.
우리는 곧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누가 능히 아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널리 분별할 수 있겠는가’고. 우리는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존자 큰 가전연은 언제나 세존 및 모든 지혜로운 범행인들의 칭찬을 받는다. 존자 큰 가전연은 능히 아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널리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오직 원컨대 존자 큰 가전연은 우리들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널리 그것을 설명해 주십시오.’
존자 큰 가전연을 말하였다.
“여러분, 내가 비유로 말하는 것을 들으시오. 슬기로운 사람은 비유를 들으면 곧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오. 여러분, 마치 어떤 사람이 나무심[木心]을 얻기 위하여 도끼를 가지고 숲으로 들어갔소. 그는 큰 나무가 뿌리와 줄기, 마디, 가지, 잎, 꽃 및 열매로 된 것을 보고 뿌리와 줄기, 마디, 열매는 건드리지 않고, 다만 가지와 잎만을 건드리는 것과 같이, 여러분의 말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소. 세존께서 현재에 계시는데 그 분을 두고 내게 와서 그 뜻을 묻는 것이오. 무슨 까닭인가. 여러분은 마땅히 아시오. 세존께서는 눈[眼]이요 지혜며, 이치요 법이며, 법의 주인이요 법의 장수로서, 진리의 뜻을 말씀하시고 일체의 이치를 나타내심은 오직 세존에게만 있는 것이오. 여러분은 마땅히 세존께 나아가서 ‘세존이시여, 이것은 어떠하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고 여쭈어 보시오.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시거든 여러분은 마땅히 잘 받아 가지오.”
때에 모든 비구들은 사뢰었다.
“그렇습니다, 존자 큰 가전연이여. 세존께서는 눈이요 지혜며, 이치요 법이며, 법의 주인이요 법의 장수로서, 진리의 뜻을 말씀하시고, 일체의 이치를 나타내심은 오직 세존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마땅히 세존께 나아가 ‘세존이시여, 이것은 어떠하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고 그 뜻을 여쭈어 보겠습니다.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들은 마땅히 잘 받아 가지겠습니다. 그러나, 존자 큰 가전연은 항상 세존 및 모든 지혜 있는 범행인들의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존자 가전연은 능히 아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널리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존자 큰 가전연이여, 우리를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그것을 널리 설명해 주십시오.”
존자 큰 가전연은 모든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 다 같이 내 말을 들으시오. 여러분 어떻게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는가. 여러분 비구는 실로 눈이 있어서 마음으로 좋아하는 빛깔을 보고는 빛깔을 사랑하는 욕심과 서로 어울리는 마음이 생겨 즐겨 그 근본을 움켜잡는데, 그 근본은 곧 과거인 것이오. 그는 과거를 알기 때문에 욕심에 염착(染着)하고 과거를 알아 욕심에 염착함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게 되며, 그것을 즐긴 뒤에는 곧 과거를 생각하게 되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비구는 실로 뜻이 있어서 마음으로 좋아하는 법을 알고는 법을 사랑하는 욕심과 서로 어울리는 마음이 생겨 그 근본을 움켜잡는데, 그 근본은 곧 과거인 것이오. 그는 과거를 알기 때문에 욕심에 염착하고, 욕심에 염착함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게 되며, 그것을 즐긴 뒤에는 곧 과거를 생각하게 되오. 여러분 이와 같이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오.
여러분, 어떻게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가. 비구는 실로 눈이 있어서, 마음으로 좋아하는 빛깔을 보고는 빛깔을 사랑하는 욕심과 서로 어울리는 마음이 생겨 즐겨 그 근본을 움켜잡는데, 그 근본은 곧 과거인 것이오. 그는 과거를 알고도 욕심에 염착하지 않으며, 과거를 알고도 욕심에 염착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지 않고, 그것을 즐기지 않은 뒤에는 곧 과거를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비구는 실로 뜻이 있어서, 마음으로 좋아하는 법을 알고는 법을 사랑하는 욕심과 서로 어울리는 마음이 생겨 그 근본을 움켜잡는데, 그 근본은 곧 과거인 것이오. 그는 과거를 알고도 욕심에 염착하지 않으며, 과거를 알고도 욕심에 염착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즐기지 않게 되며, 그것을 즐기지 않은 뒤에는 곧 과거를 생각하지 않게 되오. 여러분 이와 같이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오.
여러분, 어떻게 비구는 미래를 원하는가. 여러분, 비구가 만일 눈과 빛깔과 눈의 식(識)이 있어서, 그는 미래를 아직 얻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얻고자 하여 마음으로 원하게 되고, 마음으로 원함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게 되며, 그것을 즐긴 뒤에는 곧 미래를 원하게 되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비구가 만일 뜻과 법과 뜻의 식(識)이 있어서, 그는 미래를 아직 얻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얻고자 하여 마음으로 원하게 되고, 마음으로 원함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게 되며, 마음으로 원함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게 되며, 그것을 즐긴 뒤에는 곧 미래를 생각하게 되오. 여러분, 비구는 이와 같이 미래를 원하는 것이오.
여러분, 어떻게 비구는 미래를 원하지 않는가. 여러분, 비구가 만일 눈과 빛깔과 눈의 식이 있어서, 그는 미래를 얻지 못했더라도 그것을 얻으려고 마음으로 원하지 않고, 마음으로 원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지 않게 되며, 그것을 즐기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곧 미래를 원하지 않게 되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비구가 만일 뜻과 법과 뜻의 식이 있어서, 그는 미래를 아직 얻지 못했더라도 그것을 얻으려고 마음으로 원하지 않고, 마음으로 원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지 않게 되며, 마음으로 원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지 않게 되며, 그것을 즐기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곧 미래를 원하지 않게 되오. 여러분, 비구는 이와 같이 미래를 원하지 않는 것이오.
여러분, 어떻게 비구는 현재의 법에 집착하는가. 여러분, 비구가 만일 눈과 빛깔과 눈의 식이 있어서 그는 현재를 알기 때문에 욕심에 염착하고, 현재를 알아 욕심에 염착함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게 되며, 그것을 즐긴 뒤에는 곧 현재의 법에 집착하게 되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만일 뜻과 법과 뜻의 식이 있어서, 그는 현재를 알기 때문에 욕심에 염착하고, 현재를 알아 욕심에 염착함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게 되며, 그것을 즐긴 뒤에는 곧 현재의 법에 집착하게 되오. 여러분, 비구는 이와 같이 현재의 법에 집착하는 것이오.
여러분, 어떻게 비구는 현재의 법에 집착하지 않는가. 여러분, 비구가 만일 눈과 빛깔과 눈의 식이 있어서, 그는 현재를 알더라도 욕심에 염착하지 않고 현재를 알고도 욕심에 염착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지 않게 되며, 그것을 즐기지 않은 뒤에는 곧 현재의 법에 집착하지 않게 되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만일 뜻과 법과 뜻의 식이 있어서, 그는 현재를 알더라도 욕심에 염착하지 않고, 현재를 알고도 욕심에 염착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지 않게 되며, 그것을 즐기지 않은 뒤에는 곧 현재의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오. 여러분, 비구는 이와 같이 현재의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오.
여러분, 이것이 이른바 세존께서 이 가르침을 간략히 말씀하시어 널리 분별하시지 않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연좌(宴坐)하신 것이오.
‘부디 과거를 생각지 말고
또한 미래를 원하지 말라.
과거의 일은 이미 멸했고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나니
현재에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나니
어느 것도 단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라.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아느니라.
만일 성인의 행을 행하는 이라면
누가 죽음의 근심을 근심하리
나는 결코 그것을 만나지 않으리니.
큰 고통, 재앙은 여기서 끝나리라.
이와 같이 꾸준히 힘써 행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게으르지 말지니
그러므로 이 바데카랏타게를
언제나 마땅히 설해야 하느니라.’
이렇게 이 가르침을 간략히 말씀하시어 널리 분별하시지 않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시어 고요히 앉으신 것이오. 이렇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시어 널리 분별하시지 않은 것을 나는 이런 글귀와 이 글로써 널리 설명한 것이 이와 같소. 여러분, 부처님께 나아가 자세히 여쭈어 보시오.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신 이치와 같거든 여러분들은 마땅히 받아 가지시오.”
이에 모든 비구들은 존자 큰 가전연의 말을 들어 잘 받아 외우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존자 큰 가전연을 세 번 돌고 떠났다. 그들은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아까 이 이치를 간략히 말씀하시어 널리 분별하시지 않으시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시어 고요히 앉으셨나이다. 존자 큰 가전연은 이러한 글귀와 이러한 글로써 그것을 널리 분별하였나이다.”
세존께서는 들으시고 찬탄하시었다.
“착하고 착하다. 그는 내 제자 중에서 눈이 있고 지혜가 있으며, 법이 있고 이치가 있는 사람이다. 무슨 까닭인가. 스승이 제자들을 위해 이 이치를 간략히 말해 널리 분별하지 않은 것을 그 제자는 이런 글귀와 이런 글로서 그것을 널리 설명하였다. 가전연의 설명한 것과 같이 너희들은 마땅히 받아 가져라. 무슨 까닭인가. 이 관찰의 뜻을 설명한 것이 응당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166. 석중선실존경(釋中禪室尊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에 노닐으시면서 승림 급고독원에 계시었다. 그 때에 존자 로마삭캉기야[盧夷强耆]는 석중(釋中)에 노닐면서 일이 없는 선실(禪室)에 있었다. 그 때에 존자 로마삭캉기야는 먼동이 트는 새벽에 그 선실에서 나와 선실 그늘 한데에 있는 노끈평상 위에 니사단을 펴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 때에 몸은 지극히 아름답고 얼굴이 의젓한 어떤 하늘은 먼동이 트는 새벽에 존자 로마삭캉기야에게 가서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물러나 한쪽에 서 있었다. 그 하늘 얼굴은 위엄스럽고 극히 아름다와 광명은 온천 언덕을 두루 비추었다. 그 하늘은 선실의 한쪽에 서서 존자 로마삭캉기야에게 여쭈었다.
“비구여, 비구는 바데카랏타게[跋地羅帝偈]와 그 뜻을 받아 가지는가.”
존자 로마삭캉기야는 그 하늘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바데카랏타게와 그 뜻을 받아 가지지 않는다.”
그는 그 하늘에게 도로 물었다.
“어찌하여 바데카랏타게는 받아 가지면서 그 뜻은 받아 가지지 못했는가.”
그 하늘은 대답하였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에 노닐으시면서 죽림 가란다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을 위해 다음의 바데카랏타게를 말씀하시었다.
‘부디 과거를 생각지 말고
또한 미래를 원하지 말라.
과거의 일은 이미 멸했고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나니
현재에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나니
어느 것도 단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라.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아느니라.
만일 성인의 행을 행하는 이라면
누가 죽음의 근심을 근심하리
나는 결코 그것을 만나지 않으리니.
큰 고통, 재앙은 여기서 끝나리라.
이와 같이 꾸준히 힘써 행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게으르지 말지니
그러므로 이 바데카랏타게를
언제나 마땅히 설해야 하느니라.’
비구여, 나는 이와 같이 바데카랏타게는 받아 가졌어도 그 뜻은 받아 가지지 못했다.”
존자 로마삭캉기야는 다시 그 하늘에게 물었다.
“누가 바데카랏타게와 그 뜻을 받아 가지는가.”
하늘은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노닐으시면서 승림 급고독원에 계시는데, 그 분은 바데카랏타게와 그 뜻을 받아 가지신다. 비구여, 너는 가서 세존에게 직접 바데카랏타게와 그 뜻을 잘 받아 가져 외워라. 무슨 까닭인가. 바데카랏타게와 그 뜻은 뜻이 있고 법이 있어 범행의 근본이 되며,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큰 족성(族姓)의 아들로서 지극한 믿음으로 집을 버리어 집이 없이 도를 배우는 자는 마땅히 바데카랏타게와 그 뜻을 잘 받아 가져 외워야 한다.”
그 하늘을 이렇게 말한 뒤 존자 로마삭캉기야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 돌고는 거기서 사라졌다.
그 하늘이 사라진 지 오래지 않아 이에 존자 로마삭캉기야는 석중(釋中)에 노닐면서 일이 없는 선실에 있었나이다. 저는 그 때에 먼동이 트는 새벽에 선실에서 나와 선실 그늘 한데에 있는 노끈평상 위에 니사단을 펴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나이다. 그 때에 몸이 지극히 아름답고 얼굴이 의젓한 어떤 하늘은 먼동이 트는 새벽에 존자 로마삭캉기야에게 가서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물러나 한쪽에 섰었나이다. 그 하늘 얼굴은 위엄스럽고 극히 아름다와 광명은 온천 언덕을 두루 비추었나이다. 그는 선실의 한쪽에 서서 제게 ‘비구여, 바데카랏타게와 그 뜻을 받아 가지는냐.’고 묻기에 저는 그 하늘에게 ‘바데카랏타게와 또한 그 뜻도 받아 가지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나이다. 저는 도로 그 하늘에게 ‘너는 바데카랏타게와 그 뜻은 받아 가지느냐.’고 물었나이다. 그 하늘은 ‘나는 바데카랏타게는 받아 가지지마는 그 뜻은 받아 가지지 못했다.’고 대다하였나이다. 저는 다시 ‘어찌하여 바데카랏타게는 받아 가지면서 그 뜻은 받아 가지지 못했느냐.’고 그 하늘에게 물었나이다. 그 하늘은 제게 대답하기를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에 노닐으시면서 죽림 가란다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을 위해 다음의 바데카랏타게를 말씀하시었다.
부디 과거를 생각지 말고
또한 미래를 원하지 말라.
과거의 일은 이미 멸했고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나니
현재에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나니
어느 것도 단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라.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아느니라.
만일 성인의 행을 행하는 이라면
누가 죽음의 근심을 근심하리
나는 결코 그것을 만나지 않으리니.
큰 고통, 재앙은 여기서 끝나리라.
이와 같이 꾸준히 힘써 행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게으르지 말지니
그러므로 이 바데카랏타게를
언제나 마땅히 설해야 하느니라.
비구여, 나는 이와 같이 바데카랏타게는 받아 가졌어도 그 뜻은 받아 가지지 못했다.’고 하였나이다. 저는 다시 그 하늘에게 물었나이다. ‘누가 바데카랏타게와 그 뜻을 받아 가지는냐’고. 그 하늘은 제게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노닐으시면서 승림 급고독원에 계신다. 그 분은 바데카랏타게와 그 뜻을 받아 가지신다. 비구여, 너는 가서 세존에게 직접 바데카랏타게와 그 뜻을 잘 받아 가져라. 무슨 까닭인가. 바데카랏타게와 그 뜻은 뜻이 있고 법이 있어 범행의 근본이 되며,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큰 족성의 아들로서 지극한 믿음으로 집을 버리어 집이 없이 도를 배우는 자는 마땅히 바데카랏타게와 그 뜻을 잘 받아 가져 외워야 한다.’고 대답하였나이다. 그 하늘을 이렇게 말한 뒤 제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 돌고는 거기서 사라졌나이다.”
이에 세존께서는 존자 로마삭캉기야에게 물으시었다.
“너는 그 하늘은 어디서 왔으며, 그 하늘 이름은 무엇인지 아느냐.”
“세존이시여, 저는 그 하늘이 어디서 왔으며, 또한 그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나이다.”
“캉기야여, 그 하늘 남자의 이름이 찬다나로서 삼십 삼천의 군사의 장군이니라.”
그 때에 존자 로마삭캉기야는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 때입니다. 선서시여, 지금이야말로 그 때입니다. 만일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바데카랏타게를 말씀하시면 모든 비구들은 세존의 말씀을 듣자온 뒤에 마땅히 잘 받아 가지겠나이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캉기야여,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나는 마땅히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널리 설명하리라.”
존자 로마삭캉기야는 여쭈었다.
“예에, 분부대로 듣잡겠나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부디 과거를 생각지 말고
또한 미래를 원하지 말라.
과거의 일은 이미 멸했고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나니
현재에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나니
어느 것도 단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라.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아느니라.
만일 성인의 행을 행하는 이라면
누가 죽음의 근심을 근심하리
나는 결코 그것을 만나지 않으리니.
큰 고통, 재앙은 여기서 끝나리라.
이와 같이 꾸준히 힘써 행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게으르지 말지니
그러므로 이 바데카랏타게를
언제나 마땅히 설해야 하느니라.
“캉기야여, 어떻게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느냐. 만일 비구가 과거의 색(色)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서 머무르며, 과거의 각(覺), 상(想), 행(行), 식(識)을 즐겨하고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서 머무르면, 이와 같이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느니라.
캉기야여, 어떻게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가. 만일 비구가 과거의 색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서 머무르지 않으며, 과거의 각, 상, 행, 식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서 머무르지 않으면, 이와 같이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느니라.
캉기야여, 어떻게 비구는 미래를 원하느냐. 만일 비구가 미래의 색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서 머무르며, 미래의 각, 상, 행, 식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서 머무르면, 이와 같이 비구는 미래를 원하느니라.
캉기야여, 어떻게 비구는 미래를 원하지 않느냐. 만일 비구가 미래의 색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서 머무르지 않으며, 미래의 각, 상, 행, 식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서 머무르지 않으면, 이와 같이 비구는 미래를 원하지 않느니라.
캉기야여, 어떻게 비구는 현재의 법을 받아들이느냐. 만일 비구가 현재의 색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서 머무르며, 현재의 각, 상, 행, 식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서 머무르면, 이와 같이 비구는 현재의 법을 받아들이느니라.
캉기야여, 어떻게 비구는 현재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느냐. 만일 비구가 현재의 색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서 머무르지 않으며, 현재의 각, 상, 행, 식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서 머무르지 않으면, 이와 같이 비구는 현재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존자 로마삭캉기야와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167. 아난설경(阿難說經)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승림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존자 아난은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밤에 강당에 모여 발지라제(跋地羅帝)14)의 게송과 그 뜻을 설명하였다. 그 때 어떤 비구가 밤이 지나 이른 아침에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 존자 아난이 모든 비구들을 위해 밤에 강당에 모여 발지라제의 게송과 그 뜻을 설명하였습니다."
이에 세존께서는 그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난 비구에게 가서 '아난아, 세존께서 너를 부르신다'고 말하라".
그 비구는 세존의 분부를 받들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머리를조아려 예를 올리고 세 번 돌고 나서 떠났다. 그는 아난에게 가서 말하였다.
"세존께서 존자 아난을 부르십니다."
존자 아난은 곧 부처님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섰다. 세존께서는 물으셨다.
"아난아, 네가 정녕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밤에 강당에 모여 발지라제의 게송과 그 뜻을 설명하였느냐?"
"예, 그렇습니다."
"아난아, 너는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발지라제의 게송과 그 뜻을 어떻게 설명하였느냐?"
존자 아난이 곧 말씀드렸다.
부디 과거를 생각지 말고
또한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의 일은 이미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느니라.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法]
그것 또한 이렇게 생각해야 하나니
어느 것도 견고하지 못함을 기억하라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아느니라.
만일 성인의 행을 실천하는 이라면
어찌 죽음을 근심하리.
나는 결코 그것을 만나지 않으리니
큰 고통과 재앙 여기서 끝나리라.
이와 같이 열심히 힘써 행하며
밤낮으로 쉬지 말고 게으르지 말지니
그러므로 이 발지라제의 게송을
언제나 마땅히 설해야 하느니라.
세존께서 다시 물으셨다.
"아난아, 어떻게 비구가 과거를 생각하게 되느냐?"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비구가 과거의 색(色)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에 머루르며, 과거의 각(覺) 상(想) 행(行) 식(識)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서 머문다면, 이와 같은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게 됩니다."
세존께서 다시 물으셨다.
"아난아, 어떻게 비구가 과거를 생각하지 않게 되느냐?"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가 과거의 색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과거의 각 상 행 식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세존께서는 다시 물으셨다.
"아난아, 어떻게 비구가 미래를 원하게 되느냐?"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가 미래의 색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미래의 각 상 행 식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에 머문다면, 이와 같은 비구는 미래를 원하게 됩니다."
세존께서 다시 물으셨다.
"아난아, 어떻게 비구는 미래를 바라지 않게 되느냐?"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가 미래의 색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미래의 각 상 행 식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비구는 미래를 바라지 않게 됩니다."
세존께서는 다시 물으셨다.
"아난아, 어떻게 비구가 현재의 법을 받아들이게 되느냐?"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가 현재의 색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현재의 각 상 행 식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에 머문다면, 이와 같은 비구는 현재의 법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세존께서 다시 물으셨다.
"아난아, 어떻게 비구가 현재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느냐?"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가 현재의 색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현재의 각 상 행 식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비구는 현재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밤에 강당에 모여 발지라제의 게송과 그 뜻을 설명하였습니다."
이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내 제자는 안목이 있고 지혜가 있으며, 이치가 있고 법이 있다. 왜냐 하면 내 제자는 스승 앞에서 이런 글귀와 이런 글로써 그 이치를 자세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이니라. 진실로 아난 비구의 설명과 같다. 너희들은 마땅히 그와 같이 받아 가져라. 왜냐 하면 내가 이치를 살펴 설명한다고 해도 응당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존자 아난과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168. 의행경(意行經)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승림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설법하리라. 이 법은 처음도 묘하고 중간도 묘하며 마지막도 또한 묘하다. 뜻도 있고 문채도 있으며, 구족하고 청정하여 범행(梵行)을 나타낸다. 이 경의 이름은 분별의행경(分別意行經)이고, 의행(意行)15)대로 태어나는 것을 설한 것이니,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그때 모든 비구들은 분부대로 경청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의행대로 태어나는 것인가? 혹 어떤 비구는 욕심을 여의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의어, 각(覺)도 있고 관(觀)도 있으며,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이 있는 초선(初禪)16)을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定]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범신천(梵身天)에 태어나게 된다. 모든 범신천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며,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며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데, 이 두 가지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離生喜樂]'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범신천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선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고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범신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意行)대로 태어나느니라.
또 비구는 각과 관이 이미 쉬고 안으로 고요히[內靜] 한마음이 되어[一心], 각도 없고 관도 없으며,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이 있는 제 2 선(第二禪)17)을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황욱천(晃昱天)18)에 태어나게 된다. 모든 황욱천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며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며 제 2 선에 들어가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데, 이 두 가지 '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定生喜樂]'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황욱천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선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며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황욱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意行)대로 태어나느니라.
또 비구는 기쁨의 욕심[喜欲]을 여의고, 평정하여 구함 없이 노닐며,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로 몸에 즐거움을 깨닫는다. 이른바 저 성인께서 말씀하신 성인의 평정[捨] 생각[念] 즐거움에 머묾[樂住] 공(空)19)이 있는 제 3 선(禪)20)을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변정천(遍淨天)에 태어나게 된다. 모든 변정천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며 기쁨도 없고 즐거움도 없게 되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며 제 3 선에 들어가 기쁨도 없고 즐거움도 없게 되는데, 이 두 가지 '기쁨도 없고 즐거움도 없음[無喜樂]'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변정천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선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며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변정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대로 태어나느니라.
비구는 즐거움이 멸하고 괴로움도 멸하는데, 기쁨과 걱정의 뿌리는 이미 멸한 상태이며,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며 평정[捨] 기억[念] 청정(淸淨)이 있는 제 4 선(禪)21)을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과실천(果實天)에 태어나게 된다. 과실천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 며 평정과 기억과 청정의 즐거움을 누리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면서 제 4 선에 들어가 평정과 기억과 청정의 즐거움을 누리는데, 이 두 가지 '평정[捨]과 기억[念]과 청정의 즐거움[淸淨樂]'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과실천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선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며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과실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대로 태어나느니라.
또 비구는 일체의 빛깔에 대한 생각을 벗어나,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약간의 생각[想]도 기억[念]하지 않는 한량없는 공(空)이 되고, 이 한량없는 공처[無量空處]를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定]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무량공처천(無量空處天)에 태어나게 된다. 모든 무량공처천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며 한량없는 공처의 생각을 누리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며 한량없는 공처의 생각을 누리는데, 이 두 가지 '한량없는 공처의 생각[無量空處想]'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공처천(空處天)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며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무량공처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대로 태어나느니라.
또 비구는 한량없는 공처를 벗어나 한량없는 식(識)이 되고, 이 한량없는 식처[無量識處]를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무량식처천(無量識處天)에 태어나게 된다. 모든 무량식처천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며 한량없는 식처의 생각을 누리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며 한량없는 식처의 생각을 누리는데, 이 두 가지 '한량없는 식처의 생각[無量識處想]'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식처천(識處天)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선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며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무량식처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대로 태어나느니라.
또 비구는 한량없는 식처를 벗어나 무소유가 되고, 이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무소유처천에 태어나게 된다. 모든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며 무소유처의 생각을 누리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며 무소유처의 생각을 누리는데, 이 두 가지 '무소유처의 생각[無所有處想]'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선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며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무소유처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대로 태어나느니라.
또 비구는 일체 무소유처의 생각을 벗어나 비유상비무상이 되고, 이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를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비유상비무상처천에 태어나게 된다. 모든 비유상비무상처천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며 비유상비무상처의 생각[非有想非無想處想]을 누리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며 비유상비무상처의 생각을 누리는데, 이 두 가지 생각[想]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비유상비무상처천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선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며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비유상비무상처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대로 태어나느니라.
또 비구는 일체 비유상비무상처를 벗어나 상(想)과 지(知:受)가 멸한 촉(觸)을 성취하여 노닐고, 혜(慧)로 모든 번뇌가 사라진 지혜[諸漏盡斷智]를 본다. 저 모든 선정[定] 가운데서 이 선정을 가장 제일이요, 가장 위대하며,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하며, 가장 묘하다고 말한다. 마치 소로 인해 젖이 있고, 젖으로 인해 낙(酪)이 있으며, 낙으로 인해 생소(生?)가 있고, 생소로 인해 숙소(熟?)가 있으며, 숙소로 인해 소정(?精)22)이 있는데, 이 소정을 가장제일이요 가장 위대하며,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하며, 가장 묘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저 모든 선정 가운데서 이 선정을 가장 제일이요 가장 위대하며,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하며, 가장 묘하다고 말한다. 이 선정을 얻어 이 선정에 의지하고 이 선정에 머무르고 나면 다시는 생 노 병 사의 괴로움을 받지 않나니, 이것을 괴로움의 끝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169. 구루수무쟁경(拘樓瘦無諍經)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바기수(婆奇瘦)24)의 도읍인 검마슬담(劍磨瑟曇)이라는 곳을 유행하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 설법하리라. 이 법은 처음도 묘하고 중간도 묘하며, 마지막도 또한 묘하다. 뜻도 있고 문채도 있으며, 구족하고 청정하여 범행(梵行)을 나타낸다. 그 이름은 분별무쟁경(分別無諍經)이니 너희들은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그 때 모든 비구들은 분부를 받고 경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극히 하천(下賤)한 업이고 범부의 행인 탐욕의 즐거움을 구하지 말고, 또한 지극히 괴롭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이치와 서로 걸맞지 않는 자신의 고행(苦行)도 구하지 말라. 이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면 곧 중도(中道)가 되나니, 그것은 눈을 이루고 지혜를 이루어 자재로이 선정[定]을 이루며,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간다. 또 칭찬하는 경우도 있고, 꾸짖는 경우도 있으며, 칭찬도 꾸짖음도 없이 사람을 위해 설법하는 경우도 있다. 재(齊)를 결정하며, 결정된 사실을 안 뒤에는 언제나 마음속의 즐거움을 구하라. 서로 끌어 들여 말하지 말고, 또한 면전에서 칭찬하지도 말며, 절도 있게 말하고 절도 없이 말하진 말라. 그 나라의 풍속과 법을 따라 옳거니 그르거니 따지지 말라. 이것이 분별무쟁경(分別無諍經)이니라.
'지극히 하천한 업이고 범부의 행인 탐욕의 즐거움을 구하지 말고, 또한 지극히 괴롭기만 하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이치와 서로 걸맞지 않는 자신의 고행을 구하지 말라' 함은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지극히 하천한 업이고 범부의 행인 탐욕의 즐거움을 구하지 말라' 함은 하나의 치우친 견해를 말한 것이고, '또한 지극히 괴롭기만 하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이치와 서로 걸맞지 않는 자신의 고행을 구하지 말라' 함은 또 다른 치우친 견해를 말한 것이다. '지극히 하천한 업이고 범부의 행인 탐욕의 즐거움을 구하지 말고, 또한 지극히 괴롭기만 하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이치와 서로 걸맞지 않는 자신의 고행을 구하지 말라' 함은 이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니라.
'이 두 가지 극단적 견해를 여의면 곧 중도로서, 눈이 되고 지혜가 되어 자재로이 선정을 이루며,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간다' 함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가?
8지성도(支聖道)가 있으니 바른 소견[正見]에서부터 나아가 바른 선정[正定]까지의 여덟 가지이다. '이 두 가지 극단적 견해를 여의면 곧 중도로서, 눈이 되고 지혜가 되어 자재로이 선정을 이루며,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간다' 함은 이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니라.
'칭찬하는 경우도 있고, 꾸짖는 경우도 있으며, 칭찬도 꾸짖음도 없이 사람을 위해 설법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했는가?
왜 칭찬하거나 꾸짖고 설법은 하지 않는가? 만일 탐욕과 서로 호응하고 기쁨 즐거움과 함께하여 지극히 하천한 업인 범부의 행을 짓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苦]이 있고 번민[煩]이 있으며, 흥분[熱]이 있고 걱정[憂]과 슬픔[]과 삿된 행[邪行]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몸소 꾸짖는다. 무슨 까닭인가? 탐욕이란 무상(無常)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닳아 없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탐욕은 무상하므로 저들 모두에게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몸소 꾸짖는 것이니라.
지극히 괴롭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서로 호응하는 어떤 이치도 없는 자신의 고행(苦行)을 하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몸소 꾸짖는다. 무슨 까닭인가? 저 사문 범지는 괴로움을 두려워하여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우는 자들이다. 그런데 저 사문 범지가 도리어 이 괴로움을 끌어안는다면 저들 모두에게는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게 될 것이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몸소 꾸짖는 것이니라.
가령 유결(有結)25)이 다하지 않은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몸소 꾸짖는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유결(有結)이 다하지 않으면 그 생명[有]도 또한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 모두에게는 번민이 있고, 흥분이 있으며,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게 된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몸소 꾸짖는 것이니라.
유결(有結)이 다한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도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이 없고, 바른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몸소 칭찬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유결이 다하면 그 생명[有]도 또한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 모두에게는 괴로움이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도 없으며, 바른 행이 있게 된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몸소 칭찬하는 것이니라.
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몸소 꾸짖는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는 자라면 또한 마음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 모두에게는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게 된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몸소 꾸짖는 것이니라.
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도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이 없으며, 바른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몸소 칭찬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는 자라면 그는 또한 마음도 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 모두에게는 괴로움도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이 없으며, 바른 행이 있게 된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몸소 칭찬한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칭찬하거나 꾸짖고 설법은 하지 않는다.
칭찬하거나 꾸짖지 않고 사람을 위해 설법하는 경우가 있다. 왜 칭찬하거나 꾸짖지 않고 사람을 위해 설법하는가? 만일 탐욕과 서로 호응하고 기쁨 즐거움과 함께하여 지극히 하천한 업인 범부의 행을 짓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설법한다. 왜냐 하면 '탐욕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으로서 닳아 없어지는 법이다'라고 저 사람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탐욕은 무상한 것이므로 저들 모두에게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이 법을 알지 못하여 오직 괴로운 법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설법하는 것이니라.
지극히 괴롭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서로 호응하는 어떤 이치도 없는 고행을 하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설법한다. 왜냐 하면 '지극히 괴롭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서로 호응하는 어떤 이치도 없는 고행을 하면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고 저 사람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이 법을 알지 못하므로 오직 괴로운 법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설법하는 것이니라.
유결(有結)이 다하지 않은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설법한다. 왜냐 하면 '만일 유결이 다하지 않으면 그 생명[有]도 다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 모두에게는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게 된다'고 저 사람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이 법을 알지 못하여 오직 괴로운 법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설법하는 것이니라.
유결(有結)이 다한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도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도 없으며, 바른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설법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유결이 다하면 그 생명[有]도 또한 다한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에게는 괴로움도 없고,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도 없으며, 바른 행이 있게 된다'고 저 사람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이 법은 통달하지 못하고, 그저 괴로운 법이 없고 번민이 없으며, 흥분이 없고 걱정과 슬픔이 없으며, 바른 행이 있을 뿐이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설법하는 것이니라.
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설법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으면 그는 또한 마음을 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에게는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게 된다'고 저 사람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이 법을 통달하지 못하여 오직 괴로운 법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을 뿐이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설법하는 것이니라.
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도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도 없으며, 바른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설법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면 그는 또한 마음도 구한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에게는 괴로움도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도 없으며, 바른 행이 있게 된다'고 저 사람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이 법은 통달하지 못하고, 오직 괴로운 법이 없고 번민이 없으며, 흥분이 없고 걱정과 슬픔이 없으며, 바른 행이 있을 뿐이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설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 칭찬 하거나 꾸짖지 않고 사람을 위해 설법하느니라.
'칭찬하는 경우도 있고 꾸짖는 경우도 있으며, 칭찬도 꾸짖음도 없이 사람을 위해 설법하는 경우도 있다' 함은 이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니라.
'제(齊)를 결정하고, 결정된 줄 안 뒤에는 언제나 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라' 함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가? 어떤 즐거움이 있다. 이는 성인의 즐거움이 아닌 범부의 즐거움이며 병의 근본 등창의 근본 화살이나 가시의 근본이다. 식(食)26)이 있고 나고 죽음이 있으니, 닦아서는 안 되고 익혀서도 안 되며 널리 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나는 그런 즐거움은 닦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즐거움이 있다. 이는 성인의 즐거움이며, 욕심이 없는 즐거움 악을 여읜 즐거움 마음을 쉰 즐거움 바르게 느낀 즐거움이다. 식(食)이 없고 나고 죽음이 없으니, 닦아야 할 것이요 익혀야 할 것이며 널리 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즐거움을 닦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즐거움이 있다. 이는 성인의 즐거움이 아닌 범부의 즐거움이며, 병의 근본 종기의 근본 화살이나 가시의 근본이다. 식이 있고 나고 죽음이 있으니, 닦아서는 안 되고 익혀서도 안 되며 널리 펴서도 안 된다. 왜 나는 그런 즐거움을 닦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가? 그가 만일 5욕의 공덕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낸다면, 이 즐거움은 성인의 즐거움이 아닌 범부의 즐거움이며 병의 근본 종기의 근본 화살이나 가시의 근본이다. 식이 있고 나고 죽음이 있으니, 닦아서는 안 되고 익혀서도 안 되며 널리 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나는 그런 즐거움을 닦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어떤 즐거움이 있다. 이는 성인의 즐거움이며 욕심이 없는 즐거움 악을 여읜 즐거움 마음을 쉰 즐거움 바르게 느낀 즐거움이다. 식이 없고 나고 죽음이 없으니, 닦아야 할 것이요 익혀야 할 것이며 널리 펴야 할 것이다. 왜 나는 그런 즐거움을 닦아야 한다고 말하는가? 만일 어떤 비구가 욕심을 여의고 착하지 않은 악한 법을 여의며, 나아가 제 4 선을 얻게 되어 성취하여 노닐면, 이 즐거움은 성인의 즐거움이며 욕심이 없는 즐거움 악을 여읜 즐거움 마음이 쉰 즐거움 바르게 느낀 즐거움이다. 식이 없고 나고 죽음이 없 으니, 닦아야 할 것이요 익혀야 할 것이며 널리 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즐거움을 닦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齊)를 결정하고, 결정된 줄 안 뒤에는 언제나 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라' 함은 이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니라.
'서로 끌어들여 말하지 말고 또한 면전에서 칭찬하지도 말라' 함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가? 서로 끌어들여 하는 말 중에 어떤 것은 진실하지 않고 허망하며 이치와 서로 호응하지 않고, 서로 끌어들여 하는 말 중에 어떤 것은 진실하고 허망하지는 않으나 이치와 서로 호응하지 않으며, 서로 끌어들여 하는 말 중에 어떤 것은 진실하고 허망하지 않으며 이치와 서로 호응한다.
그 중에서 만일 끌어들여 하는 말이 진실하지 않고 허망하며 이치와 서로 호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끝내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 중에서 만일 끌어들여 하는 말이 진실하고 허망하지는 않지만 이치와 서로 호응하지 않으면 그것도 또한 배우기는 하되 말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 중에서 만일 끌어들여 하는 말이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고 이치와도 서로 호응하면 그는 때를 알아 바른 지혜와 바른 생각으로 그것을 성취시켜야 한다. 면전에서 칭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서로 끌어들여 말하지 말고 또한 면전에서 칭찬하지도 말라' 함은 이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절도 있게 말하고 절도 없이 말하지 말라' 함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가? 절도 없이 말하면 몸이 번거롭고 잊어버리기 쉬우며, 마음은 지극히 피로하고, 목소리가 쉬기도 하여, 지혜로 나아가는 사람이 자재하지 못하게 된다. 절도 있게 말하면 몸이 번거롭지 않고 쉽게 잊어버리지 않으며, 마음도 피로하지 않고, 목소리도 쉬지 않아서, 지혜로 나아가는 사람이 자재하게 되느니라. '절도 있게 말하고 절도 없이 말하지 말라' 함은 이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니라.
'그 나라의 풍속과 법을 따라 옳거니 그르거니 말하지 말라' 함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가? 무엇이 그 나라의 풍속과 법에 따라 혹은 옳다고 하고, 혹은 그르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런 저런 지방에서 이런 저런 사람은 이런 저런 것을 두고 혹은 사발이라 말하고, 혹은 발우라 말하며, 혹은 종지 라 말하고, 혹은 주발이라 말하며, 혹은 그릇이라 말한다. 이런 저런 지방에서 이런 저런 사람이 이런 저런 일에 대해서 혹은 사발이라 말하고, 발우라 말하며, 종지라 말하고, 주발이라 말하며, 혹은 그릇이라 말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만일 이런 저런 것에 대해 그 힘을 따라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허망하다'고 한결같이 주장한다면, 이와 같은 것은 그 나라의 풍속과 법에 따라 옳다고도 하고 또는 그르다고도 하는 것이다.
무엇이 그 나라의 풍속과 법을 따라 옳다고도 하지 않고 그르다고도 하지 않는 것인가? 이런 저런 지방에서 이런 저런 사람은 이런 저런 것을 두고 혹은 사발이라 말하고, 발우라 말하며, 종지라 말하고, 주발이라 말하며, 혹은 그릇이라 말한다. 이런 저런 지방에서 이런 저런 사람이 이런 저런 것을 두고 혹은 사발이라 말하고, 발우라 말하며, 종지라 말하고, 주발이라 말하며, 혹은 그릇이라 말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만일 이런 저런 것에 대해 그 힘을 따르지 않고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허망하다'고 한결같이 주장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것은 그 나라의 풍속과 법을 따라 옳다고 하지 않고 그르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 나라의 풍속과 법을 따라 옳거니 그르거니 말하지 말라' 함은 이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니라.
다툼[諍]이 있는 법과 다툼이 없는 법이 있다. 어떤 것이 다툼이 있는 법이며, 어떤 것이 다툼이 없는 법인가? 만일 탐욕과 서로 호응하고, 기쁨 즐거움과 함께하여 지극히 하천한 업(業)인 범부의 행을 지으면, 이 법은 다툼이 있다.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다툼이 있는가?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곧 다툼이 있다. 만일 지극히 괴롭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이치와 서로 호응하지 않는 고행을 한다면 이 법은 다툼이 있다.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다툼이 있는가?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곧 다툼이 있느니라.
이 두 가지 치우침을 떠나면 곧 중도이다. 그것은 눈이 되고 지혜가 되어 자재로이 선정을 이루며,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가나니, 이 법은 다툼이 없다. 왜 이 법은 다툼이 없는가? 이 법은 괴로움이 없고 번민이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도 없으며, 바른 행이 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곧 다툼이 없느니라.
유결(有結)이 다하지 않으면 이 법은 다툼이 있다.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다툼이 있는가?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곧 다툼이 있다. 유결이 다하면 이 법은 다툼이 없다.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다툼이 없는가? 이 법은 괴로움도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도 없으며, 바른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곧 다툼이 없느니라.
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으면 이 법은 다툼이 있다.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다툼이 있는가?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곧 다툼이 있다. 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면 이 법은 다툼이 없다.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다툼이 없는가? 이 법은 괴로움도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도 없으며, 바른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곧 다툼이 없느니라.
그 중에서 만일 어떤 즐거움이 성인의 즐거움이 아닌 범부의 즐거움이라면, 그것은 병의 근본 종기의 근본 화살이나 가시의 근본이다. 식이 있고 나고 죽음이 있으니, 닦아서는 안 되고 익혀서도 안 되며 널리 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나는 그런 즐거움은 닦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법은 다툼이 있다.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다툼이 있는가?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곧 다툼이 있다.
그 중에서 만일 어떤 즐거움이 성인의 즐거움이라면, 그것은 욕심이 없는 즐거움 악을 여읜 즐거움 마음을 쉰 즐거움 바르게 느낀 즐거움이다. 식이 없고 나고 죽음이 없으니, 닦아야 할 것이요 익혀야 할 것이며 널리 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즐거움을 닦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법은 다툼이 없다.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다툼이 없는가? 이 법은 괴로움도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도 없으며, 바른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곧 다툼이 없느니라.
그 중에서 만일 서로 끌어들여 하는 말이 진실하지 못하고 허망하며 이치와 서로 호응하지 못한다면 이 법은 다툼이 있다.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다툼이 있는가?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곧 다툼이 있다.
그 중에서 만일 서로 끌어들여 하는 말이 진실하여 허망하지는 않지만 이치와 서로 호응하지 못한다면 이 법은 다툼이 있다.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다툼이 있는가?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곧 다툼이 있다.
그 중에서 만일 서로 끌어들여 하는 말이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고 이치와 서로 호응한다면 이 법은 다툼이 없다.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다툼이 없는가? 이 법은 괴로움도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도 없으며, 바른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곧 다툼이 없느니라.
절도 없이 말하면 이 법은 다툼이 있다.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다툼이 있는가?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다툼이 있다. 절도 있게 말하면 이 법은 다툼이 없다.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다툼이 없는가? 이 법은 괴로움도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도 없으며, 바른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곧 다툼이 없느니라.
그 나라의 풍속과 법에 따라 옳다고 하고 또는 그르다고 하면 이 법은 다툼이 있다.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다툼이 있는가?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다툼이 있다. 그 나라의 풍속과 법에 따라 옳다고도 하지 않고 그르다고도 하지 않으면, 이 법은 다툼이 없다.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다툼이 없는가? 이 법은 괴로움도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도 없으며, 바른 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곧 다툼이 없느니라.
이것을 다투는 법[諍法]이라 하나니, 너희들은 마땅히 다툼이 있는 법과 다툼이 없는 법을 알라. 그리고 다툼이 있는 법과 다툼이 없는 법을 안 뒤에는 다툼이 있는 법은 버리고, 다툼이 없는 법만 닦아 익혀라. 너희들은 이렇게 배워야 하느니라."
이렇게 큰 족성의 아들 수보리(須菩提)는 다툼이 없는 도로써 뒷날에 법을 법다이 알게 되었다.
법을 진실 그대로 알아
수보리는 게송을 읊었네.
이 행은 진실한 공(空)이니라.
이것을 버리고 푹 쉬어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