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일아함경 제 十九권
사의단품(四意斷品) 2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너는 샤아리푸트라의 사리를 받아 가지고 오너라.”
“그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아아난다는 곧 사리를 받아 세존 손에 올렸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사리를 손에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샤아리푸트라의 사리다. 그는 지혜롭고 총명하여, 높은 재주의 지혜와 여러 가지 지혜가 있어 그 지혜는 끝도 없고 밑도 없었다. 그는 빠른 지혜, 경편한 지혜, 날카로운 지혜, 매우 깊은 지혜, 자세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을 알고 한적한 곳을 즐기었으며 용맹스런 뜻이 있고 하는 일이 어지럽지 않고 겁내거나 약한 마음이 없었으며, 모든 일을 참아 나쁜 법을 없애고 성질이 부드러워 다투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항상 정진을 닦고 삼매를 행하며 지혜를 익히고 해탈을 생각하며 해탈지견의 몸을 닦았었다.
비구들이여, 알라. 나는 마치 가지가 없는 큰 나무와 같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지금 여래는 큰 나무로서 샤아리푸트라 비구가 열반한 것은 나무에 가지가 없어진 것과 같다.
만일 샤아리푸트라가 있으면 그 지방은 큰 다행이었다. 그들은 말하였다. ‘샤아리푸트라님이 우리 지방에 계신다’고. 왜 그러냐 하면 샤아리푸트라 비구는 외도와 이교도들과 변론하여 항복 받지 못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니라.”
이 때에 마하아 모옥갈라아나는 샤아리푸트라가 열반하였다는 말을 듣고 곧 신통으로 세존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서서 사뢰었다.
“샤아리푸트라 비구는 이제 열반하였나이다. 저도 지금 세존을 하직하고 열반하려 하나이다.”
세존께서는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셨다. 모옥갈라아나는 두 번 세 번 세존께 사뢰었다.
“저도 열반하려 하나이다.”
세존께서는 또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모옥갈라아나는 세존께서 잠자코 대답하시지 않는 것을 보고 곧 세존 발에 예배하고 물러나 떠났다.
그는 절에 돌아와 가사와 바루를 챙기고 라아자그리하를 떠나 출생지의 본 고장으로 떠났다. 많은 비구들은 존자의 뒤를 따랐다. 그는 비구들과 함께 마수촌으로 가서 놀다가 중한 병에 걸렸다.
그는 맨 땅에 자리를 펴고 앉아 첫째 선정에 들었다. 첫째 선정에서 일어나 둘째 선정에 들고, 둘째 선정에서 일어나 셋째 선정에 들고, 셋째 선정에서 일어나 넷째 선정에 들었다. 다시 넷째 선정에서 일어나 허공 경계에 들고 허공 경계에서 일어나 의식 경계에 들고, 의식 경계에서 일어나 아무 것도 없는 경계에 들고 아무 것도 없는 경계에서 일어나 생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경계에 들었다.
다시 생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경계에서 일어나 불빛 삼매에 들고, 불빛 삼매에서 일어나 물빛 삼매에 들고, 물빛 삼매에서 일어나 아주 사라진 선정에 들었다.
다시 아주 사라진 선정에서 일어나 물빛 삼매에 들고, 물빛 삼매에서 일어나 불빛 삼매에 들고, 불빛 삼매에서 일어나 생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선정에 들고, 생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선정에서 일어나 아무 것도 없는 경계에 들고, 아무 것도 없는 경계에서 일어나 의식 경계, 허공 경계, 넷째 선정, 셋째 선정, 둘째 선정, 첫째 선정에 들고, 첫째 선정에서 일어나 공중을 날으면서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거닐기도 하였다.
몸 위에서는 불을 내고 몸 밑에서는 물을 내며, 혹은 몸 밑에서 불을 내고 몸 위에서 물을 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열 여덟 가지 신통 변화를 나타내었다.
그 때에 존자 모옥갈라아나는 도로 내려와 자리에 나아가 가부하고 앉아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생각을 매어 앞에 두고 다시 첫째 선정에 들었다.
첫째 선정에서 일어나 둘째 선정에 들고, 둘째 선정에서 일어나 셋째 선정에 들고, 셋째 선정에서 일어나 넷째 선정에 들었다.
다시 넷째 선정에서 일어나 허공 경계에 들고, 허공 경계에서 일어나 의식 경계에 들고, 의식 경계에서 일어나 아무 것도 없는 경계에 들고, 아무 것도 없는 경계에서 일어나 생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경계에 들고, 생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경계에서 일어나 불빛 삼매에 들었다.
다시 불빛 삼매에서 일어나 물빛 삼매에 들고 물빛 삼매에서 일어나 아주 사라진 선정에 들고 아주 사라진 선정에서 일어나 도로 물빛, 불빛, 생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경계, 아무 것도 없는 경계, 의식 경계, 허공 경계, 넷째 선정, 셋째 선정, 둘째 선정, 첫째 선정에 들었다.
다시 첫째 선정에서 일어나 둘째 선정에 들고 둘째 선정에서 일어나 셋째 선정에 들고, 셋째 선정에서 일어나 넷째 선정에 들고, 넷째 선정에서 일어나자 이내 열반에 들었다.
마하아 모옥갈라아나가 열반에 들자 온 땅덩이는 크게 진동하고 모든 하늘들은 서로 아래로 내려와 모옥갈라아나를 뵈옵고 가지고 온 것으로 공양하였다. 혹은 갖가지 향과 꽃으로 공양하는 이도 있고 공중에서 풍악을 잡히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존자 모옥갈라아나를 공양하였다. 또 그 때에 나라타촌의 한 요오자나 이내에는 하늘 사람들이 그 안에 가득 차 있었고 많은 비구들은 갖가지 향과 꽃으로 존자 모옥갈라아나 위에 뿌렸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五백 비구를 데리시고 라아자그리하에서 걸식하시면서 세상에 노닐으시다가 차차 나라타촌으로 가시어 五백 비구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에 샤아리푸트라와 모옥갈라아나가 열반한 지 오래지 않았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한데 앉아 잠자코 여러 비구들을 관찰하시고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대중들을 관찰하매 텅 빈 것 같구나. 왜 그러냐 하면 이 대중 가운데에는 샤아리푸트라와 모옥갈라아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샤아리푸트라와 모옥라라아나가 노닌다면 그곳은 곧 쓸쓸하지 않을 것이요, ‘샤아리푸트라와 모옥갈라아나가 지금 여기 계신다’고 말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샤아리푸트라와 모옥갈라아나는 넉넉히 저 외도들을 항복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이 하시는 일은 참으로 놀랍고 기이하니라. 지혜와 신통을 갖춘 두 제자가 열반에 들었지마는 나는 아무 근심이 없다. 과거의 항하 모래 수처럼 많은 여래에게도 이러한 지혜와 신통의 제자가 있었고 미래의 여러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도 이런 지혜와 신통의 제자가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보시의 업이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재물의 보시와 법의 보시니라. 비구들이여 알라. 만일 재물의 보시를 바라는 사람이면 그는 샤아리푸트라와 모옥갈라아나 비구에게서 구하고 만일 법의 보시를 바라는 사람이면 그는 내게 와서 그것을 구하라. 왜 그러냐 하면 지금 여래에게는 재물의 보시가 없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오늘 샤아리푸트라와 모옥갈라아나 비구의 사리에 공양하라.“
그 때에 아아난다는 부처님께 사뢰었다.
“샤아리푸트라와 모옥갈라아나의 사리에 어떻게 공양하리이까.”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갖가지 향과 꽃을 모아 네거리에다 네 절의 탑을 세워라. 그 까닭은 만일 누가 절을 세우려면 그는 네 가지 탑을 세워야 하겠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전륜성왕에게 탑을 세워야 하고, 번뇌가 없어진 아라한에게 탑을 세워야 하며 벽지불에게 탑을 세워야 하고, 여래에게 탑을 세워야 하느니라.”
아아난다는 사뢰었다.
“어떤 이유로서 여래에게 탑을 세워야 하며, 어떤 이유로 벽지불과 번뇌가 없어진 아라한과 전륜성왕에게 탑을 세워야 하나이까.”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너는 알아야 한다. 전륜성왕은 스스로 열 가지 선행과 열 가지 공덕을 닦고, 또 남을 시켜 열 가지 공덕을 닦게 한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자기 몸으로 살생하지 않고 남을 시켜 살생하게 하지 않으며, 자기 몸으로 도둑질하지 않고 남을 시켜 도둑질하게 하지 않으며, 자기 몸으로 음행 하지 않고 남을 시켜 음행 하게 하지 않으며, 자기 몸으로 거짓말하지 않고 남을 시켜 거짓말하게 하지 않는다.
또 자기 몸으로 비단말하지 않고 남을 시켜 비단말하게 하지 않으며, 자기 몸으로 질투하지 않고 남을 시켜 질투하게 하지 않으며, 자기 몸으로 소송하지 않고 남을 시켜 소송하게 하지 않으며, 자기도 뜻이 바르고 남을 시켜서도 뜻이 어지럽게 하지 않으며, 자기도 바른 소견을 가지고 남을 시켜서도 바른 소견을 행하게 한다. 비구들이여, 알라. 전륜성왕은 이런 열 가지 공덕이 있기 때문에 탑을 세워야 하느니라.”
아아난다는 사뢰었다.
“다시 무슨 이유로 여래의 제자를 위해 탑을 세워야 하나이까.”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아아난다야, 알아야 한다. 번뇌가 없어진 아라한은 다시는 후생 몸을 받지 않고 깨끗하기는 순금과 같으며 세 가지 독과 다섯 가지 번뇌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여래의 제자를 위해 탑을 세워야 하느니라.”
아아난다는 사뢰었다.
“무슨 이유로 벽지불을 위해 탑을 세워야 하나이까.”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벽지불은 스승이 없이 스스로 깨달아 모든 번뇌를 없애고 다시는 태를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탑을 세워야 하느니라.”
아아난다는 사뢰었다.
“다시 무슨 이유로 여래를 위해 탑을 세워야 하나이까.”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래는 열 가지 힘이 있고 네 가지 두려움이 없으며 항복하지 않는 이를 항복 받고 건너지 못한 이를 건네주며, 도를 얻지 못한 이는 도를 얻게 하고 열반하지 못한 이는 열반하게 하며, 여러 사람들이 보고는 모두 기뻐한다. 그러므로 아아난다야, 여래를 위해 탑을 세워야 하느니라.”
그 때에 아아난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十.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셨다.
그 때에 존자 박칼리는 중한 병에 걸려 대소변 위에 누워 있으면서 칼로 자살하려 하였으나 일어나 앉을 기운조차 없었다. 존자 박칼리는 그 시자에게 말하였다.
“너는 칼을 가지고 오너라. 나는 자살하고 싶다. 왜 그러냐 하면 지금 석가모니 부처님 제자 중에서 믿음의 해탈을 얻은 사람으로 나 위에 갈 사람은 없지마는 아직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 제자들로서 고뇌를 당할 때에는 칼로 자살하려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목숨으로는 도저히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갈 수 없다.”
때에 박칼리 제자는 집을 떠난 지 오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 저승도 알지 못하고,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는 것도 알지 못하며, 또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곧 칼을 주었다.
박칼리는 손에 칼을 잡고 견고한 믿음으로서 칼로 자신을 찔렀다. 그리고는 생각하였다.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 제자 중에서 하는 일이 법답지 않으며 나쁜 이익만 얻고 좋은 이익은 얻지 못하였다. 그리고 여래의 법안에서 증명을 얻지 못한 채 목숨을 마치는 것이다.’ 때에 그는 다시 다섯 가지 쌓임을 생각하였다.
‘이것은 몸이다, 이것은 몸의 원인이다, 이것은 몸의 아주 사라짐이다, 이것은 느낌, 생각, 지어감, 의식이다, 이것은 느낌, 생각, 지어감, 의식의 원인이다, 이것은 느낌, 생각, 지어감, 의식이 아주 사라짐이다.’
그는 이 다섯 가지 쌓임을 깊이 생각하고 ‘생긴 모든 법은 모두 죽는 법이다’고 알았다. 그리고 곧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남음 없는 열반의 세계에서 반열반하였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하늘 귀로 존자 박칼리가 칼을 찾아 자살하였다는 말을 들으시고 아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이 슈라아바스티이에 있는 비구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라. 나는 분부할 것이 있다.”
존자 아아난다는 세존의 분부를 받고 곧 모든 비구들을 보집강당(普集講堂)에 모았다. 그는 돌아가 세존께 사뢰었다.
“지금 비구들이 모두 한 곳에 모였나이다.”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앞뒤로 둘러싸이어 박칼리 비구의 절로 가셨다. 그 때에 악마 파아피이야스는 존자 박칼리의 신식(神識)이 어디 있는가를 알려고 하였다. ‘인간에 있는가, 사람인 듯 사람 아닌 듯한 것에 있는가, 하늘, 용, 귀신,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마후라가, 야차에 있는가. 지금 그 신식은 끝내 있는가, 어디서 놀고 있는가’고, 동, 서, 남, 북, 四유, 상, 하를 두루 찾아 보았으나 신식이 있는 곳은 알 수 없었다. 파아피이야스는 몸만 시달리고 있는 곳은 알지 못하였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앞뒤로 둘러싸이어 그 절로 갔다. 악마 파아피이야스가 신식이 있는 곳을 알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이 절 안에서 어떤 큰 소리를 듣는가. 또는 어떤 괴상한 빛을 보는가.”
비구들은 사뢰었다.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미 보았나이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저것은 악마 파아피이야스가 박칼리의 신식이 있는 곳을 알려고 하는 것이다.”
존자 아아난다는 세존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박칼리의 신식이 어디 있는가를 말씀하여 주소서.”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박칼리 비구의 신식은 영원히 집착하는 데가 없어졌다. 그 선남자는 이미 열반에 들어 그렇게 계속할 것이다.”
존자 아아난다는 사뢰었다.
“그 박칼리 비구는 언제 그 네 가지 진리를 깨달았나이까.”
“오늘 그 진리를 깨달았다.”
“그 비구는 앓은 지 이미 오래 되었나이다. 그는 본래 범인(凡人)이었나이까.”
“그렇다, 아아난다야. 네 말과 같다. 다만 그 비구는 괴로움을 꺼린 지 이미 오래였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여러 제자 중에서 믿음의 해탈을 얻은 이로서는 내가 제일이다. 그러나 아직 번뇌에서 마음의 해탈을 얻지 못하였다. 나는 이제 칼을 구해 자살한다’고 하였다.
그 비구가 자살하려고 하였을 때에 다섯 가지 쌓임을 생각하였다. 즉 ‘이것은 몸이다, 이것은 몸의 원인이다, 이것은 몸의 아주 사라짐이다’고. 그 비구가 이것을 생각하였을 때에 모든 존재의 원인 되는 법은 아주 다 없어졌다. 그래서 그 비구는 이미 반열반한 것이니라.”
그 때에 아아난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네 가지 끊는 법과
네 가지 어둠과 늙는 법과
아이(阿夷)와 법의 본말과
사리와 박칼리다.)
제 二十七 등취사제품(等趣四諦品)
一.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내가 항상 설명하는 법은 이른바 네 가지 진리다. 그러므로 무수한 방편으로 이 법을 관찰하고 그 뜻을 분별하여 사람들을 위해 널리 연설하였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니, 무수한 방편으로 이 법을 관찰하고 그 뜻을 분별하여 사람들을 위해 널리 설명하였다. 또 무수한 방편으로 그 원인과 사라짐과 사라지는 길의 진리를 설명하고 그 법을 관찰하고 그 뜻을 분별하여 사람들을 위해 널리 연설하였다.
너희 비구들을 샤아리푸트라 비구를 친근하고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라. 그 까닭은 저 샤아리푸트라 비구는 무수한 방편으로 이 네 가지 진리를 설명하고 사람들을 위해 널리 연설하였기 때문이다. 샤아리푸트라 비구가 중생들과 네 가지 무리들을 위해 그 뜻을 분별하고 사람들을 위해 널리 연설할 때에는 셀 수 없는 중생들이 온갖 번뇌가 없어지고 법의 눈이 깨끗하게 되었느니라.
또 너희 비구들은 샤아리푸트라와 모옥갈라아나 비구를 친근하고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라. 왜 그러냐 하면 샤아리푸트라 비구는 중생들의 부모요, 낳은 뒤에 길러서 자라게 하는 것은 모옥갈라아나 비구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샤아리푸트라 비구는 사람들을 위해 법을 설명하여 네 가지 진리를 반드시 성취시키고, 모옥갈라아나 비구는 사람들을 위해 설법하여 최상의 진리를 반드시 성취하고 번뇌가 없는 행을 성취시키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샤아리푸트라와 모옥갈라아나 비구를 친근하여야 하느니라.”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고요한 방으로 들어가셨다.
세존께서 떠나신 지 오래지 않아 샤아리푸트라는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만일 네 가지 진리를 깨달으면 그 사람은 좋은 이익을 얻을 것이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니 무수한 방편으로 그 뜻을 널리 설명하리라. 어떤 것을 괴로움의 진리라 하는가. 이른바 나는 괴로움, 늙은 괴로움, 앓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 근심하고 슬퍼하고 번민하는 괴로움, 미워하는 이와 만나는 괴로움,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 구하여 얻지 못하는 괴로움 등이니 통틀어 말하면 다섯 가지 쌓임의 괴로움이오. 이것을 괴로움의 진리라 하오.
어떤 것이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인가. 이른바 애욕의 결박이 그것이오. 어떤 것이 괴로움의 사라지는 진리인가. 이른바 사라지는 진리란 애욕의 결박이 아주 없어져 남음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사라짐의 진리라 하오. 어떤 것이 길의 진리인가. 이른바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이니 즉 바른 소견, 바른 다스림, 바른 말, 바른 방편, 바른 생활, 바른 업, 바른 생각, 바른 선정이다. 이것을 길의 진리라 하오. 중생으로서 좋은 이익을 얻는 것은 이 네 가지 진리를 듣기 때문이오.”
존자 샤아리푸트라가 이 법을 말하였을 때에 한량없고 셀 수 없는 중생들은 이 법을 듣고 온갖 번뇌가 없어지고 법의 눈이 깨끗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들도 좋은 이익을 얻었나이다. 세존께서 우리를 위해 법을 설명하시어 복땅에 편히 살게 하였나이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네 가지 무리들은 방편을 구해 이 네 가지 진리를 행하도록 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二.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셨다.
그 때에 많은 비구들은 걸식하러 슈라아바스티이로 들어가다가 이렇게 생각하였다.
‘우리가 걸식하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다. 우리는 저 외도들의 촌으로 가서 서로 변론하리라.’
많은 비구들은 곧 외도들의 촌으로 가서 서로 문안하고 한쪽에 앉았다.
그 때에 외도들은 물었다.
“사문 고오타마는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설법한다. 즉 ‘너희 비구들은 모두 이 법을 배워 밝게 알라. 밝게 알고는 받들어 행하라’고. 우리도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설법한다. 즉 ‘너희들은 다 이 법을 배워 밝게 알라. 밝게 알고는 받들어 행하라’고. 그렇다면 사문 고오타마와 우리들과는 무엇이 다르며 무슨 낫고 못함이 있는가. 그도 설법하고 우리도 설법하며 그도 훈계하고 우리도 훈계한다.”
비구들은 이 말을 듣고 옳다고도 말하지 않고 그르다고도 말하지 않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비구들은 서로 말하였다. ‘우리는 이 이치를 세존께 가서 여쭈어 보자’고. 그들은 슈라아바스티이에 들어가 걸식을 마치고, 가사와 바루를 두고 니쉬이다나를 오른 어깨에 걸치고 세존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 그 사실을 자세히 세존께 사뢰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 외도들이 이렇게 묻거든 너희들은 이런 말로 그들에게 대답하라. ‘구경(究竟)은 하나인가, 구경은 여럿인가’고. 혹 그 범지들로서 공평하게 말하는 이라면 ‘구경은 하나요 여럿이 아니다’고 대답할 것이다. 만일 그러거든 ‘그 구경이란 욕심이 있는 이의 구경인가, 욕심이 없는 이의 구경인가’고 물어보라. 그들은 ‘그 구경이란 욕심 없는 이의 구경이다’고 대답할 것이다.
다시 ‘어떠냐 그 구경이란 성내는 이의 구경인가, 성내지 않는 이의 구경인가’고 물으면 그들은 ‘이른바 그 구경이란 성내지 않는 이의 구경이요. 성내는 이의 구경이 아니다.’ 다시 ‘어떠냐 그것은 어리석은 이의 구경인가, 어리석지 않는 이의 구경인가. ‘이른바 그 구경이란 어리석지 않은 이의 구경이다.’ 다시 ‘어떠냐, 그 구경이란 애욕이 있는 이의 구경인가, 애욕이 없는 이의 구경인가. 그들은 ‘이른바 구경이란 애욕이 없는 이의 구경이다.’
다시 ‘어떠냐 그 구경이란 집착이 있는 이의 구경인가, 집착이 없는 이의 구경인가’ 그들은 ‘이른바 그 구경이란 집착이 없는 이의 구경이다.’ 다시 ‘어떠냐 그 구경이란 지혜로운 이의 구경인가, 지혜롭지 않은 이의 구경인가. 그들은 ‘그것은 지혜로운 이의 구경이다.’ 다시 ‘그 구경이란 화내는 이의 구경인가, 화내지 않는 이의 구경인가. 그들은 ‘이른바 구경이란 화내지 않는 이의 구경이다’고 대답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두 가지 소견이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있다>는 소견과 <없다>는 소견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로서 이 두 가지 소견의 본말을 알지 못하면, 그는 곧 욕심이 있고 성냄, 어리석음, 애욕, 집착이 있게 될 것이니 그는 곧 무지한 사람이다. 만일 그에게 화내는 마음이 있어 법다운 행과 서로 맞지 않으면, 그는 남, 늙음, 병, 죽음과 근심과 번민을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것이 고달파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그것을 여실히 알면 그는 곧 어리석고 화내는 마음이 없고 항상 법다운 행과 서로 맞아 남, 늙음, 병, 죽음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괴로움의 근본을 이와 같이 설명하였다.
비구들이여, 여기 묘한 법이 있으니 그것을 <평등한 법>이라 한다. 평등한 법을 행하지 않는 이는 곧 다섯 가지 그른 소견에 떨어질 것이다.
나는 지금 네 가지 집착을 설명하리라. 어떤 것이 네 가지 집착인가. 이른바 탐욕에의 집착, 소견에의 집착, 계율에의 집착, <나>에의 집착이니 이것을 네 가지 집착이라 한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탐욕에의 집착’이란 이름을 안다. 그러나 그는 탐욕에의 집착이란 이름은 알지마는 그것만으로는 맞지 않다. 비록 그는 모든 집착의 이름을 안다 하지마는 먼저 탐욕에의 집착이란 이름만 알고 소견에의 집착, 계율에의 집착, <나>에의 집착이란 이름은 모르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사문이나 바라문은 다른 세 가지 집착의 이름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그 모든 집착을 다 분별하지마는, 그는 다만 탐욕에의 집착과 소견에의 집착을 분별하고 계율에의 집착과 <나>에의 집착은 분별하지 못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사문이나 바라문은 다른 두 가지 집착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또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모든 집착을 다 분별한다 하지마는 그래도 갖추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른바 네 가지 집착이다.
어떤 뜻이 있고 또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이른바 네 가지 집착은 애욕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이 묘한 법을 분별해야 하느니라.
만일 이 모든 집착을 함께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평등이라고 부를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모든 법의 이치는 깨닫기 어렵고 알기 어렵나니 그런 법답지 않은 이치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여래는 능히 모든 집착을 다 분별하고 모든 집착을 분별하므로 말미암아 곧 법과 알맞게 된다. 즉 탐욕에의 집착, 소견에의 집착, 계율에의 집착, <나>에의 집착을 다 분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집착을 분별하고 법과 서로 알맞아 조금도 어긋남이 없느니라.
이 네 가지 집착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가. 이 네 가지 집착은 애욕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애욕으로 말미암아 자라난다. 만일 이 집착을 항복 받으면 곧 다른 모든 집착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집착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요, 두려워하지 않으면 곧 열반에 들어, 나고 죽음은 이미 끝나고 범행은 이미 이루었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생 몸을 받지 않을 줄을 여실히 알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이 묘한 법을 여실히 알면 모든 법다운 행의 근본을 완전히 갖출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 법은 극히 미묘하기 때문이요, 모든 부처님의 말씀으로서 모든 행에 있어서 빠짐이 없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첫째 사문, 둘째 사문, 셋째 사문, 넷째 사문이 있어, 그 어떤 사문도 이것보다 훌륭한 것이 없느니라.”
부처님은 이와 같이 사자처럼 외치셨다.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三.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셨다.
그 때에 아나아타핀디카 장자는 세존에게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았다. 세존께서는 장자에게 물으셨다.
“어떠냐, 장자야. 너는 집에서 늘 보시하느냐.”
장자는 사뢰었다.
“저의 집에서는 늘 보시하나이다. 그러하온데 음식이 추해서 보통 때와 다르나이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보시할 때에는 그것이 좋거나 추하거나 많거나 적거나 간에 만일 거기에 정성을 들이지 않고 원을 세우지 않으며 또 믿는 마음이 없으면, 그 행의 갚음으로서 태어나는 곳에서는 좋은 음식을 얻지 못하므로 마음은 즐겁지 않을 것이다. 또 좋은 의복도 즐겁지 않고 좋은 농사도 즐겁지 않으며 다섯 가지 쾌락도 즐겁지 않을 것이요, 비록 하인과 남녀의 종이 있더라도 그들은 명령을 받들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보시에 정성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갚음을 받는 것이니라.
만일 장자가 보시할 때에 그것이 좋거나 추하거나 많거나 적거나 간에 정성껏 마음을 쓰고 차별을 두지 않으며 후세의 다리[橋]가 되겠다고 발원하면, 그가 태어나는 곳에는 음식은 저절로 생기고 일곱 가지 보배는 두루 갖추어지며 마음은 다섯 가지 쾌락 속에서 항상 즐거울 것이요, 만일 남녀 종들과 하인이 있으면 그들은 항상 명령을 받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보시에는 기뻐하는 마음을 내었기 때문이니라.
장자야, 알라. 먼 과거에 빌라아마라는 범지가 있었다. 그는 재물과 보배가 많아 진주, 호박, 자거, 마노, 수정, 유리로써 보시하기를 좋아하였었다. 그는 보시할 때에 八만 四천 은바루에는 가루 금을 가득 담고, 八만 四천 금바루에는 가루 은을 가득 담아 보시하였다. 또 八만 四천 금, 은 대야를 보시하고 또 八만 四천 소를 금, 은으로 뿔을 싸서 보시하였다.
또 八만 四천 미녀를 의복으로 덮어 보시하고, 털과 비단을 짜고 수를 놓은 천으로 덮은 八만 四천 침구를 보시하고 八만 四천 의상을 보시하고, 다시 금과 은으로 얽어 장식한 八만 四천 큰 코끼리를 보시하고 다시 금과 은으로 된 안장과 굴레를 씌운 八만 四천 말을 보시하고, 또 八만 四천 수레를 보시하고, 八만 四천 집을 보시하였다. 또 옛 성문에서 보시하되 음식을 요구하면 음식을 주고 의복을 요구하면 의복을 주어 의복, 음식, 평상, 침구, 의약 등을 모두 주었느니라.
장자야, 알라. 그 빌라아마가 비록 그런 보시를 하였지마는 그것은 집 한 칸을 지어 나그네 중에게 보시하는 것만 못하다. 이 복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그가 그렇게 보시하고 집을 지어 나그네 중에게 보시하더라도 그것은 부처와 법과 중의 세 분에게 귀의하는 것만 못하다. 이 복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비록 그가 그렇게 보시하고 또 집을 지으며 세 분에게 귀의하는 복이 있더라도 그것은 다섯 가지 계율을 받들어 가지는 것만 못하느니라.
비록 그 사람이 그렇게 보시하고 집을 지으며 세 분에게 귀의하고 다섯 가지 계율을 받드는 복이 있더라고 그것은 잠깐 동안이나마 중생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것만 못하다. 이 복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비록 그 사람이 그렇게 보시하고 집을 지으며 세 분에게 귀의하고 다섯 가지 계율을 받들어 가지며 잠깐 동안이나마 중생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복이 있더라도 그것은 잠깐 동안이나마 세상은 즐겨 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는 것만 못하다. 이 복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리고 그가 지은 공덕을 나는 다 증명한다. 집을 짓는 복도 나는 알고, 세 분에게 귀하는 복과 다섯 가지 계율을 받드는 복과 잠깐 동안이나마 중생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복과 잠깐이나마 세상은 즐겨 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는 복을 나는 다 안다. 그 때의 그 바라문으로서 그렇게 큰 보시를 행한 사람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왜 그러냐 하면 그 때의 그 시주한 이는 바로 나이기 때문이니라.
장자야, 알라. 나는 먼 과거로부터 공덕을 지을 때에는 믿는 마음을 끊지 않았고 애착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장자야, 만일 보시하려 할 때에는 그것이 많거나 적거나 좋거나 추하거나 간에 즐거이 보시하여 애착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손수 보시하여 남을 시키지 말며, 원을 세워 갚음을 구하고 그 뒤에 복 받기를 구하면 장자는 반드시 무궁한 복을 받을 것이다. 장자야,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장자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四.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해가 처음 뜰 때에는 사람들은 모두 나가 농사를 짓고 온갖 새는 슬피 울며 애들은 가엾이 부르짖는다. 비구들이여, 알라. 이것은 비유이다. 그 뜻을 이해하여야 하느니라.
그 뜻을 어떻게 풀 것인가. 해가 처음 뜨는 때란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심을 비유한 것이요, 사람들이 모두 나가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시주가 때를 따라 의복, 음식, 평상, 침구, 의약 등을 이바지하는 것이며, 온갖 새가 슬피 운다는 것은 덕망이 높은 법사의 비유로서 네 가지 무리들을 위해 미묘한 법을 연설하는 것이요, 어린애가 가엾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악마 파아피이야스의 비유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해가 처음 뜨는 것처럼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시면 어두움을 없애어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셨다.
그 때에 미륵 보살은 세존께 나아가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 세존께 사뢰었다.
“보살 마하살은 몇 가지 법을 성취하여야 보시 바라밀을 행하고 여섯 바라밀을 두루 갖추어 위없는 바른 도를 빨리 성취하게 되나이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보살 마하살이 네 가지 법의 근본을 성취하면 여섯 바라밀을 두루 갖추어 위없는 다 옳은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보살이 보시할 때에는 벽지불과 밑으로 범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평등히 보아 사람을 가리지 않고 항상 이렇게 생각하라. ‘모든 중생은 먹음으로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이 첫째 법을 성취하여 여섯 바라밀을 두루 갖춘다는 것이니라.
다시 보살이 보시할 때에는 머리나 눈, 골수, 뇌수, 나라, 재물, 아내, 자식 등을 즐겁게 보시하여 애착하는 생각을 내지 말라. 마치 죽어 가던 사람이 갑자기 살아나면 기뻐 뛰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처럼, 보살이 마음을 내어 기뻐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보시의 서원에 애착하는 생각을 내지 않느니라.
다시 미륵이여, 보살이 보시할 때에는 그 공덕을 일체에 미치게 하고, 자기만의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셋째 법을 성취하여 여섯 바라밀을 두루 갖춘다’는 것이니라.
다시 미륵이여, 보살 마하살이 보시할 때에는 이렇게 생각하라. ‘모든 중생 무리 중에서 보살이 가장 우두머리가 된다. 그는 여섯 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모든 법의 근본을 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밥을 먹고는 모든 감관이 고요하여 계율을 생각하여, 성내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을 닦으며 용맹하게 정진하여 선법은 자라게 하고 악법은 없애며, 항상 마음이 한결 같아서 뜻이 어지럽지 않으며 변재를 두루 갖추어 설법에는 마침내 차례를 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보시로 하여금 여섯 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보시 바라밀을 이루게 하여지이다’고.
만일 보살 마라살이 이 네 가지 법을 행하면 위없는 다 옳은 깨달음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륵이여, 원을 세워 모든 행을 두루 갖추도록 하라. 미륵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미륵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六.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는 세상에 나와 네 가지 두려움이 없다. 여래는 이 네 가지 두려움이 없게 되어 세상에 대한 집착이 없고 대중 가운데서 사자처럼 외쳐 법바퀴를 굴리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나는 이미 이 법을 성취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저 사문이나 바라문, 악마, 악마 하늘이나 날짐승, 길짐승들이 대중 가운데서 ‘여래는 이 법을 성취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거기서 두려움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첫째의 두려움이 없는 것이니라.
나는 이제 모든 번뇌가 다해 다시는 중생의 태(胎)를 받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의 중생들이 대중 가운데서 ‘여래는 번뇌가 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이것이 이른바 둘째의 두려움이 없는 것이니라.
나는 이제 이미 어리석고 어두운 법을 떠났다. 어리석고 어두운 법으로 돌리려 하여도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 악마, 악마 하늘의 중생들이 대중 가운데서 ‘여래는 어리석고 어두운 법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셋째의 두려움이 없는 것이니라.
번뇌를 벗어나는 성현의 법은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나게 한다. 아무리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 하여도 마침내 그리 될 수 없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악마, 악마 하늘의 중생 무리들이 대중 가운데서 ‘여래는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넷째의 두려움이 없는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네 가지 두려움이 없어 대중 가운데서 사자처럼 외쳐 법바퀴를 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방편을 구해 네 가지 두려움이 없도록 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七.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 네 사람이 있어 총명하고 용맹스러우며 과거에 통하고 현재에 밝아 법과 법을 성취하였다. 어떤 것이 네 사람인가.
비구는 많이 들어 과거에 통하고 현재에 밝아 대중 가운데서 가장 제일이다. 비구니는 많이 들어 과거에 통하고 현재에 밝아 대중 가운데서 가장 제일이다. 우바새는 많이 들어 과거에 통하고 현재에 밝아 대중 가운데서 가장 제일이다. 우바이는 많이 들어 과거에 통하고 현재에 밝아 대중 가운데서 가장 제일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이른바 네 가지 사람은 대중 가운데서 가장 제일이라는 것이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는 곧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용맹스러워 두려움 없고
많이 들어 설법 잘하며
대중 가운데서 사자(師子)가 되어
겁내고 약한 법을 없애느니라.
비구는 계율을 성취하였고
비구니들은 많이 들었고
우바새는 믿음 있나니
우바이도 그러하니라.
대중 가운데서 제일이 되어
능히 대중에 화하고 순하며
이러한 이치를 알려고 하는 이
그는 처음 뜨는 해와 같아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마땅히 과거에 통하고 현재에 밝아 법과 법을 성취하도록 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八.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종류의 금시조(金翅鳥)가 있다. 어떤 것이 네 종류인가. 알나기 금시조, 태나기 금시조, 누기나기 금시조, 바꿔나기 금시조가 있다. 이것이 네 종류의 금시조이니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네 종류의 용이 있다. 어떤 것이 네 종류인가. 알나기 용, 태나기 용, 누기나기 용, 바꿔나기 용이 있다. 이것이 네 종류의 용이니라.
비구들이여, 알라. 저 알나기 금시조가 용을 잡아먹으려 할 때에는 쇠꼬치나무 위에 올라가 제 몸을 바다에 던진다. 그 바다는 세로와 넓이가 二十八만 리요. 바다 밑에는 네 가지 용궁이 있어서 알나기 용, 태나기 용, 누기나기 용, 바꿔나기 용이 있다. 그 때에 알나기 금시조는 큰 날개로 물을 쳐서 두 쪽으로 갈라 알나기 용을 잡아먹는다. 만일 어쩌다 태나기 용을 치면 금시조는 곧 죽고 만다. 금시조는 물을 쳐 용을 잡아먹고는 물이 아직 합하기 전에 쇠꼬치나무 위로 도로 올라가느니라.
비구들이여, 알라. 태나기 금시조가 용을 잡아먹으려 할 때에는 쇠꼬치나무 위에 올라가 제 몸을 바다에 던진다. 그런데 그 바닷물은 세로와 넓이가 二十八만 리다. 물을 가르고 내려가면 태나기 용이나 알나기 용을 만나면 곧 잡아 물고 바다 위로 나오지마는 만일 누기나기 용을 만나면 새 자신이 곧 죽고 마느니라.
비구들이여, 알라. 만일 누기나기 금시조가 용을 잡아먹으려 할 때에는 쇠꼬치나무 위에 올라가 제 몸을 바다에 던진다. 그가 만일 알나기 용, 태나기 용, 누기나기 용을 만나면 모두 잡아먹을 수 있지마는 만일 바꿔나기 용을 만나면 새 자신이 곧 죽고 마느니라.
비구들이여, 바꿔나기 금시조가 용을 잡아먹으려 할 때에는 쇠꼬치나무 위에 올라가 제 몸을 바다에 던진다. 그런데 그 바닷물은 세로와 넓이가 二十八만 리다. 물을 가르고 내려가 알나기 용, 태나기 용, 누기나기 용, 바꿔나기 용을 만나면 그것을 다 잡아먹고 바닷물이 합하기 전에 쇠꼬치나무 위로 도로 올라오느니라.
비구들이여, 알라. 만일 그 용왕으로 하여금 부처님을 섬기게 하면 금시조는 그것을 잡아먹지 못한다. 왜 그러냐 하면 여래는 항상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을 쓰기 때문에 그 새는 용을 잡아먹지 못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인가. 여래는 항상 사랑하는 마음을 쓰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보호하는 마음을 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이른바 여래가 항상 쓰는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이다. 그것은 큰 힘이 있고 큰 용맹이 있어서 막거나 무너뜨릴 수 없다. 그래서 금시조는 용을 잡아먹지 못한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평등한 마음을 쓰도록 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九.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지식으로 보시할 때에는 네 가지 공덕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때를 알아서 보시하고 때를 모르는 것이 아니요, 제 손으로 보시하고 남을 시키지 않으며, 항상 정결한 것을 보시하고 정결하지 않은 것이 아니요, 미묘한 것을 보시해 더럽지 않은 것이다. 선지식으로서 보시할 때에는 이런 네 가지 공덕이 있다.
그러므로 선남자, 선녀인도 보시할 때에는 이 네 가지 공덕을 갖추어야 한다. 이 공덕을 갖추면 큰 복업을 얻고 단 이슬의 열반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어 얼마 마한 복업이 있다고 말 할 수 없고 허공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바닷물은 헤아릴 수가 없어 한 섬이니 반 섬이니 한 홉이니 반 홉이니 하고 숫자의 이름으로 셀 수 없는 것처럼 그 복업은 낱낱이 말할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선남자, 선녀인이 지은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큰 복업을 얻고 단 이슬의 열반을 얻어 얼마 마한 복덕이라고 말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선남자 선녀인은 이 네 가지 공덕을 갖추도록 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十.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들은 공경할 만하고 높일 만하며 세상의 복밭이 된다. 어떤 것이 네 사람인가. 이른바 믿음을 가지는 사람, 법을 받드는 사람, 몸으로 증득한 사람, 지혜가 밝은 사람이다.
어떤 이가 믿음을 가진 사람인가. 어떤 사람은 사람의 교훈을 받으면 독실히 믿는 마음이 있어 의심하지 않고 여래, 아라한, 다 옳게 깨달은 이, 지혜와 행을 갖춘 이, 세상 아는 이, 잘 간 이, 위없는 선비, 도법으로 어거하는 이, 천상과 인간의 스승, 부처 세존에 대해 믿음이 있다. 또 여래의 말을 믿고 범지의 말을 믿으며 남의 말을 믿어 자기 지혜에 맡기지 않는다. 이것을 믿음을 가지는 사람이라 하느니라.
어떤 이가 법을 받드는 사람인가. 어떤 사람은 법을 분별해 남을 믿지 않고 법을 관찰한다. ‘있는가 없는가. 진실한가 허망한가’고. 그는 생각한다. ‘이것은 여래의 말이요, 이것은 범지의 말이다’고. 그래서 여래의 법인 줄을 알면 곧 받들어 가지고 외도의 말이면 멀리 떠난다. 이것을 법을 받드는 사람이라 하느니라.
어떤 이가 몸으로 증득한 사람인가. 어떤 이는 자기 몸으로 증득하여 남을 믿지 않고 여래의 말도 믿지 않으며 모든 존자의 가르침도 믿지 않고 자기 성품에 맡겨 즐겁게 논다. 이것을 몸으로 증득한 사람이라 하느니라.
어떤 이가 지혜가 밝은 사람인가. 어떤 사람은 세 가지 결박을 끊고 수다원의 물러나지 않는 법을 이룬다. 그에게는 이런 소견이 있다. ‘보시하는 이도 있고 받는 이도 있으며 선악의 갚음도 있고 이승 저승도 있으며 아버지도 있고 어머니도 있으며 아라한 등의 가르침을 받는 이도 있다’고. 그래서 몸으로 믿고 증득하여 스스로 놀면서 교화한다. 이것을 지혜가 밝은 사람이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이른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니, 다른 세 사람은 버리고 몸으로 증득하는 법을 닦기를 생각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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