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장아함경

장아함경13 대연방편경

다르마 러브 2012. 6. 16. 19:59

제 二분 대연방편경(大緣方便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구류사(拘流沙)국의 겁마사(劫摩沙)거리에서 큰 비구 무리 천 二백 五十인과 함께 계셨다.

그 때 아난은 고요한 곳에서 이렇게 생각했다. “참으로 기이하고 특별하다. 세존이 말씀하시는 十二인연 법의 광명은 매우 깊어 알기 어렵다. 그러나 나의 생각대로 관찰해서는 마치 눈앞에 있는 것과 같다. 무엇으로써 깊다고 하는가.” 이에 아난은 곧 고요한 곳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나아갔다. 머리로 그 발에 예배하고 한 쪽에 앉아 세존께 여쭈었다.

“저는 아까 고요한 곳에서 잠자코 혼자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특별하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十二인연법의 광명은 매우 깊어 알기 어렵다. 그러나 저의 생각대로 관찰하여서는 마치 눈앞에 있는 것과 같다. 무엇으로써 깊다고 하는가고 했습니다.”

그 때 세존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만 두라 그만 두라. 그런 말하지 말라. 아난아, 이 十二인연은 보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렵다. 모든 하늘, 악마, 범천, 사문, 바라문으로서 아직 인연을 보지 못한 자가 만일 사랑하고 관찰하여 그 뜻을 분별하려고 한다면 곧 정신이 아득하여 능히 보는 자 없을 것이다. 아난아, 나는 이제 너에게 말한다. 늙고 죽음에는 인연이 있다. 만일 누가 ‘어떤 것이 늙고 죽음의 인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대답하라. ‘생(生)이 늙고 죽음의 인연이다’라고. 또 누가 ‘어떤 것이 생의 인연인가’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대답하라. ‘유(有)가 생의 인연이다’라고. 또 누가 ‘무엇이 유의 인연인가’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대답하라. ‘취(聚)가 유의 인연이다’라고. 또 누가 ‘무엇이 취의 인연인가’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대답하라. ‘애(愛)가 취의 인연이다’라고. 또 누가 ‘무엇이 애의 인연인가’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대답하라. ‘수(受)가 애의 인연이다’라고. 또 누가 ‘무엇이 수의 인연인가’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대답하라. ‘촉(觸)이 수의 인연이다’라고. 또 누가 ‘무엇이 촉의 인연인가’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대답하라. ‘六입(入)이 촉의 인연이다’라고. 또 누가 ‘무엇이 六입의 인연인가’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대답하라. ‘명색(名色)이 六입의 인연이다’라고. 또 누가 ‘무엇이 명색의 인연인가’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대답하라. ‘식(識)이 명색의 인연이다.’라고. 또 누가 ‘무엇이 식의 인연인가’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대답하라. ‘행(行)이 식의 인연이다’라고. 또 누가 ‘무엇이 행의 인연인가’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대답하라. ‘치(癡)가 행의 인연이다’라고.

아난아, 이와 같이 <치>를 인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이 있고 식을 인연하여 <명색>이 있고 명색을 인연하여 <六입>이 있고 六입을 인연하여 <촉>이 있고 촉을 인연하여 <수>가 잇고 수를 인연하여 <애>가 있고 애를 인연하여 <취>가 있고 취를 인연하여 <유>가 있고 유를 인연하여 <생>이 있고 생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과 걱정과 슬픔과 고뇌의 큰 환(患)의 모임이 있다. 이것이 큰 고음(苦陰)의 연이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생을 인연하여 늙고 죽음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생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늙고 죽음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난아, 이 인연으로 알 수 있다. 늙음과 죽음이 생으로 말미암고 생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유를 인연하여 생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욕유(欲有), 색유(色有), 무색유(無色有)를 없게 한다면 그래도 생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아난아, 나는 이 인연으로써 안다. 생은 유로 말미암고 유를 인연하여 생이 있다.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취를 인연하여 유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욕취(欲取), 견취(見取), 계취(戒取), 아취(我取)를 없게 한다면 그래도 유가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나는 이 인연으로써 안다. 유는 취로 말미암고 취를 인연하여 유가 있다.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애를 인연하여 취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욕애(欲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를 없게 한다면 그래도 취가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나는 이 인연으로써 안다. 취는 애로 말미암고 애를 인연하여 취가 있다.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수를 인연하여 애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낙수(樂受), 고수(苦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를 없게 한다면 그래도 애가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나는 이 인연으로써 안다. 애는 수를 말미암고 수를 인연하여 애가 있다.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아난아, 마땅히 알라. 애를 인하여 구함이 있고 구함을 인하여 이익이 있고 이익을 인하여 씀이 있고 씀을 인하여 욕심이 있고 욕심을 인하여 집착이 있고 집착을 인하여 질투가 있고 질투를 인하여 지킴이 있고 지킴을 인하여 보호가 있다. 아난아, 보호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칼과 막대와 송사가 있어 무수한 악을 짓는다.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아난아,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보호를 없게 한다면 그래도 칼과 막대기와 송사가 있어 무수한 악을 일으키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난아, 나는 이 인연으로 안다. 칼과 막대기와 소송은 보호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보호를 인연하여 칼과 막대기와 소송이 있다. 아난아,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지킴을 인하여 보호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지킴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보호가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나는 이 인연으로써 안다. 보호는 지킴을 말미암고 지킴을 인하여 보호가 있다.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아난아, 질투로 말미암아 지킴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질투를 없게 한다면 그래도 지킴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나는 이 인연으로써 안다. 지킴은 질투로 말미암고 질투를 인연하여 지킴이 있다.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아난아, 집착으로 인하여 질투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집착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질투가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나는 이 인연으로써 안다. 질투는 집착으로 말미암고 집착을 인연하여 질투가 있다. 내가 말한 뜻이 여기 있다. 아난아, 욕심으로 인하여 집착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욕심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집착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나는 이 인연으로서 안다. 집착은 욕심으로 말미암아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다. 내가 말하는 뜻은 여기 있다. 아난아 씀을 인하여 욕심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씀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욕심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나는 이 뜻으로써 안다. 욕심은 씀을 말미암고 씀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다.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아난아, 이익을 인하여 씀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이익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씀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아난아, 나는 이 뜻으로써 안다. 씀은 이익을 말미암고 이익을 인연하여 씀이 있다.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아난아, 구함을 인하여 이익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구함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이익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나는 이 인연으로써 안다. 이익은 구함을 말미암고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이 있다.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아난아, 사랑을 인하여 구함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사랑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구함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나는 이 인연으로써 안다. 구함은 사랑을 말미암고 사랑을 인하여 구함이 있다.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사랑을 인하여 구함이 있어 수호(守護)에 까지 이르른다. 수도 또한 그와 같아서 수를 인하여 구함이 있어 수호에까지 이르른다.”

부처님은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촉을 인연하여 수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아난아, 만일 눈이 없고 빛이 없고 눈의 식(識)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촉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만일 귀와 소리와 귀의 식과 코와 냄새와 코의 식과 혀와 맛과 혀의 식과 몸과 닿음과 몸의 식과 뜻과 법과 뜻의 식이 없다면 그래도 촉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만일 일체 중생에게 촉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수가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나는 이 뜻으로써 안다. 수는 촉으로 말미암고 촉을 인연하여 수가 있다. 내가 말하는 뜻은 여기 있다. 아난아, 명색을 인연하여 촉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중생에게 명색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마음의 촉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만일 일체 중생에게 형색(形色)과 상모(相貌)를 없게 한다면 그래도 몸의 촉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만일 명색이 없다면 그래도 촉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나는 이 인연으로써 안다. 촉은 명색을 말미암고 명색을 인연하여 촉이 있다.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아난아, 식을 인연하여 명색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식이 모태(母胎)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래도 명색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만일 색이 모태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는다면 그래도 명색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만일 식이 태에서 나와 어린애 때에 문드러진다면 그래도 명색이 자라날 수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만일 식이 없다면 그래도 명색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이 인연으로써 나는 안다. 명색은 식을 말미암고 식을 인연하여 명색이 있다.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아난아, 명색을 인연하여 식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식이 명색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곧 식이 머무를 곳이 없다. 만일 식이 머무를 곳이 없다면 그래도 생, 노, 병, 사와 우, 비, 고, 뇌가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만일 명색이 없다면 그래도 식이 있겠는가.”

아난은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난아, 나는 이 인연으로 안다. 식은 명색을 말미암고 명색을 인연하여 식이 있다. 내가 말한 뜻은 여기 있다. 명색은 六입을 인연하고 六입은 촉을 인연하고 촉은 수를 인연하고 수는 애를 인연하고 대는 취를 인연하고 취는 유를 인연하고 유는 생을 인연하고 생은 노, 사, 우, 비, 고, 뇌의 큰 고음(苦陰)을 인연한다.

아난아, 이렇게 가지런히 말하고 가지런히 대답하고 가지런히 한정하고 가지런히 연설하고 가지런히 지관(智觀)하고 가지런히 중생을 위한다. 아난아, 모든 비구는 이 법 가운데서 여실히 바르게 번뇌를 관찰하여 마음의 해탈을 얻는다. 아난아, 이 비구를 이름하여 마땅히 지혜의 해탈을 얻었다 한다. 이러한 해탈 비구는 여래의 마지막도 알고 여래의 마지막 아닌 것도 알며 여래의 마지막과 마지막 아닌 것도 알고 여래의 마지막 아닌 것과 마지막 아님이 아닌 것도 또한 안다. 무슨 까닭인가. 아난아, 이렇게 가지런히 말하고 이렇게 가지런히 대답하고 이렇게 가지런히 한정하고 이렇게 가지런히 지관하고 이렇게 가지런히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 알아 마친 번뇌 없어 마음의 해탈을 얻은 비구는 알지도 않고 보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알고 또 본다.

아난아,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견(我見)이라 한다. 그들은 명색(名色)과 수(受)를 함께 <나>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수는 나가 아니다. 내가 수다’라 하고, 혹 어떤 사람은 ‘수는 나가 아니다. 나는 수도 아니다. 수법(受法)이 나다’라 하고, 혹 어떤 사람은 ‘수는 나가 아니다. 나는 수가 아니다. 수법도 나가 아니다. 다만 애(愛)가 나다’라고 한다. 아난아, 저가 있다고 보는 이들이 수가 나다라고 하거든 너는 마땅히 그들에게 말하라. ‘여래는 三수(受)를 말한다. 고수(苦受), 낙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다’라고. 낙수가 있을 때는 고수와 불고불낙수는 있을 수 없고, 고수가 있을 때는 낙수와 불고불낙수는 있을 수 없으며, 불고불낙수가 있을 때는 고수와 낙수는 있을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아난아, 촉의 인연으로 낙수를 낸다. 만일 낙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아난아, 촉의 인연으로 고수를 낸다. 만일 고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불고불락촉의 인연으로 불고불락수를 낸다. 만일 불고불락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아난아, 마치 두 나무가 서로 비비면 곧 불이 나지마는 각각 딴 곳에 두면 불이 없는 것과 같다. 이것도 또한 그와 같다. 낙촉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낙수를 내는 것이므로 만일 낙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고촉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고수를 내는 것이므로 만일 고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불고불락촉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불고불락수를 내는 것이므로 만일 불고불락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아난아, 이 수는 유위(有爲)로서 떳떳함이 없어 인연을 따라 생기는 것이다. 다하는 법이요 멸하는 법이요 썩고 무너지는 법이다. 저는 나의 소유도 아니요 나는 저의 소유가 아니다. 마땅히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그것을 관찰하라. 아난아 저 나가 있다고 보는 사람은 수로써 나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잘못이다. 아난아, 저 나가 있다고 보는 사람이 ‘수는 나가 아니다. 내가 수다’라고 말하거든 너는 마땅히 그에게 말하라. ‘여래는 三수를 말한다. 고수와 낙수와 불고불락수’라고. 만일 낙수가 나라면 낙수가 멸할 때에는 곧 二아(我)가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만일 고수가 나라면 고수가 멸한 때에는 곧 二아가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만일 불고불락수가 나라면 불고불락수가 멸할 때에는 곧 二아가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아난아, 저 나가 있다고 보는 자는 말한다. ‘수는 나가 아니다 내가 수다’라고. 그는 잘못이다. 아난아, 저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수는 나가 아니다. 나는 수가 아니다. 수법(受法)이 나다’라고 말하거든 너는 마땅히 그에게 말하라. ‘일체는 수가 없다. 너는 어떻게 수법이 있다고 하는가. 네가 수법이냐’고. 그는 대답하리라. ‘그렇지 않다’고. 그러므로 아난아, 저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수는 나가 아니다. 나는 수가 아니다. 수법이 나다’라고 말하는 그것은 잘못이다. 아난아, 저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이렇게 말한다. ‘수는 나가 아니다. 나는 수가 아니다. 수법도 나가 아니다. 다만 애(愛)가 나다’라고. 너는 그에게 말하라. ‘일체는 수가 없다. 어떻게 애가 있겠느냐. 너는 애이냐’고. 그는 대답하리라. ‘아니다’라고. 그러므로 아난아, 저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수는 나가 아니다. 나는 수가 아니다. 수법도 나가 아니다. 애가 나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곧 잘못이다.

아난아, 이렇게 가지런히 말하고 이렇게 가지런히 대답하고 이렇게 가지런히 한정하고 이렇게 가지런히 연설하고 이렇게 가지런히 지관하고 이렇게 가지런히 중생을 위한다. 아난아, 모든 비구는 이 법 가운데서 열심히 바로 관찰하여 번뇌 없이 마음의 해탈을 얻는다. 아난아, 이 비구는 마땅히 이름하여 지혜의 해탈을 얻은 자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탈한 마음의 비구는 나가 있는 것도 알고 나가 없는 것도 알며 나가 있는 동시에 나가 없는 것도 알고 나가 있지도 않고 나가 없지도 않는 것도 또한 안다. 무슨 까닭인가. 아난아, 이렇게 가지런히 말하고 이렇게 가지런히 대답하고 이렇게 가지런히 한정하고 이렇게 가지런히 지관하고 이렇게 가지런히 중생을 위한다. 이렇게 다 알아 번뇌 없이 마음의 해탈을 얻은 비구는 알지도 않고 보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알고 본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저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똑 같이 모두 결정적으로 말한다. 저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혹은 유한(有限)의 색(色)을 나라하고 혹은 무한의 색을 나라 한다. 혹은 유한의 무색(無色)을 나라하고 혹은 무한의 무색을 나라 한다. 아난아, 저 유한의 색을 나라고 하는 자는 ‘유한의 색은 나다.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다른 이가 보는 것은 그르다’고 결정한다. 무한의 색을 나라고 하는 자도 무한의 색을 나라 고하여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남이 보는 것은 그르다고 한다. 유한의 무색을 나라고 하는 자도 유한의 무색을 나라고 하며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남이 보는 것은 그르다고 한다. 무한의 무색을 나라고 하는 자도 무한의 무색을 나라 고하여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남의 보는 것은 그르다고 한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七식주(識住)와 二 입처(入處)에 대해서 모든 사문 바라문은 말한다. ‘이곳은 안온하여 구제가 되고 보호가 되며 집이 되고 등불이 되며 밝음이 되고 돌아감이 되며 허망이 아니요 번뇌가 아니다’라고 한다. 어떤 것을 七이라 하는가. 어떤 중생이 있어 약간의 몸에 약간의 생각이면 그것은 하늘과 사람이니 이것은 첫 식주처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말한다. ‘이곳은 안온하여 구원이 되고 보호가 되며 집이 되고 등불이 되며 밝음이 되고 돌아감이 되며 허망하지 않고 번뇌하지 않는다’라고. 아난아, 만일 비구로서 첫 식주를 알고 그 원인을 알고 그 멸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고통을 알고 그 떠나는 길을 알면 그는 여실히 알고 보리라. 아난아, 그 비구는 말하리라. ‘저는 나가 아니요 나는 저가 아니다. 여실히 보아 안다’고. 어떤 중생이 있어 약간의 몸에 한 생각이면 그것은 범광음천이다. 어떤 중생이 있어 한 몸에 약간의 생각이면 그것은 광음천이다. 어떤 중생이 있어 한 몸에 한 생각이면 그것은 변정천이다. 어떤 중생이 있어 공처에 머무르고 어떤 중생이 있어 식처에 머무르고 어떤 중생이 있어 불용처에 머무르면 그것은 七식주처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말한다. ‘이곳은 안온하여 구원이 되고 보호가 되며 밝음이 되고 돌아감이 되며 허망하지 않고 번뇌하지 않는다’라고. 아난아, 만일 비구로서 七식주를 알고 그 원인을 알고 그 멸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허물을 알고 그 구원의 길을 알면 그는 여실히 알고 보리라. 그 비구는 말한다. ‘저는 나가 아니요 나는 저가 아니다. 여실히 알고 본다’고. 이것은 七식주다. 어떤 것이 二입처(入處)인가. 무상입(無想入)과 비상무상입(非想無想入)이 그것이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말한다. ‘이곳은 안온하여 구원이 되고 보호가 되며 집이 되고 등불이 되며 밝음이 되고 돌아감이 되며 허망하지 않고 번뇌하지 않는다’라고, 아난아, 만일 비루로서 二입처를 알고 그 원인을 알고 그 멸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허물을 알고 그 떠남의 길을 알면 그는 여실히 알고 여실히 보리라. 그 비구는 말한다. ‘저는 나가 아니요 나는 저가 아니다 여실히 알고 본다’고. 이것이 二입처다.

아난아, 다시 八해탈이 있다. 어떤 것이 八인가. 색(色)이 색을 관하는 것은 첫 해탈이다. 안의 색상(色想)이 바깥의 색을 관하는 것은 二해탈이다. 깨끗한 해탈은 三해탈이다. 색상을 넘어 유대상(有對想)을 멸하고 잡생각을 생각하지 않고 공처에 머무르는 것은 四해탈이다. 공처를 넘어 식처에 머무르는 것은 五해탈이다. 색처를 넘어 불용처에 머무르는 것은 六해탈이다. 불용처를 넘어 유상무상처에 머무르는 것은 七해탈이다. 그리고 멸진정은 八해탈이다. 아난아, 모든 비구가 이 八해탈에서 역순으로 노닐면서 드나들기를 자재로이 한다면 그러한 비구는 함께 해탈을 얻는다.”

그 때 아난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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