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장아함경

장아함경21 범동경

다르마 러브 2012. 6. 16. 20:12

불설장아함경 제 十四권

 

제 三분 범동경(梵動經) 제 二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마가다국에 노닐으시면서 큰 비구중 천 二백 五十인과 함께 계셨다.

인간에서 노닐으시다가 대숲으로 나아가 묵으시면서 왕의 당상(堂上)에 계셨다.

때에 범지(梵志)가 있어 이름을 선념(善念)이라 하고 선념의 제자는 범마달(梵摩達)이라 이름했다. 그들 사도(師徒)는 항상 부처님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선념 범지는 무수한 방편으로써 불, 법 및 비구 중을 헐뜯었고 그 제자 범마달은 무수한 방편으로써 불, 법 및 비구 중을 칭찬했다. 사도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마음을 품고 서로 어긋났다. 왜냐 하면 그것은 다른 습관, 다른 소견, 다른 친근(親近)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 때에 많은 비구들은 걸식한 뒤에 강당에 모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특별하다. 세존은 큰 신력을 가졌고 위덕을 구족하여 중생의 뜻가짐과 좋아하는 바를 다 아신다. 그런데 저 선념 범지와 그 제자 범마달은 여래 및 비구 중을 따라다니면서 선념 범지는 무수한 방편으로써 불, 법과 중들을 비방하고 제자 범마달은 무수한 방편으로서 여래와 법과 중들을 칭찬한다. 그 사도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마음을 품었다. 그것은 다른 소견과 다른 습관과 다른 친근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 때에 세존은 고요한 방안에서 사람의 귀보다 지내는 하늘 귀의 맑음으로써 모든 비구들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셨다. 세존은 고요한 방에서 일어나 강당으로 나아가 대중 앞에 앉아 아시면서도 일부러 물으셨다.

“모든 비구들아, 너희들은 무슨 인연으로 이 강당에 모여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가.”

때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희들은 걸식한 뒤에 이 강당에 모여 여럿이 이야기했습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특별하다. 여래는 큰 신력이 있고 위덕을 구족하여 중생의 뜻 가짐과 좋아하는 것을 아르신다. 그런데 지금 선념 범지는 그 제자 범마달과 함께 항상 여래와 중들을 따라 다니면서 무수한 방편으로써 여래와 및 중들을 헐뜯고 그 제자 범마달은 무수한 방편으로서 여래와 및 법과 중들을 칭찬한다.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다른 소견과 다른 습관 다른 친근이기 때문이다.’라고 아까부터 강당에 모여 이런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때에 세존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방편으로서 여래와 법과 중들을 헐뜯더라도 너희들은 분노에 맺힌 마음을 품어 저들을 해칠 뜻을 가져서는 안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나와 법과 비구 중들을 비방한다고 해서 너희들이 분노에 맺힌 마음을 품고 해칠 뜻을 일으킨다면 곧 스스로 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분노에 맺힌 마음을 품고 저들을 해칠 뜻을 가져서는 안된다. 비구들아, 만일 부처님과 법과 또 중들을 칭찬한다고 해서 너희들은 그 가운데서 또한 환희하고 경행(慶幸)할 것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너희들이 환희심을 가지면 곧 빠지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기쁜 마음을 내어서는 안된다.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소소한 인연이요, 위의(威儀)요, 계행인데 범부는 들은 것이 적어 깊은 뜻을 모르고 곧 저의 소견으로써 제가 본 그대로 찬탄한다. 어떤 것을 ‘소소한 인연과 위의와 계행인데 범부는 들음이 적어 곧 저의 소견으로써 제가 본 그대로 찬탄한다.’고 하는가. 그는 찬탄해 말하기를 ‘사문 고오타마는 살생을 멸하고 살생을 없애고 도장(刀杖)을 버리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품고 일체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긴다.’고 한다. 이것이 소소한 인연이요, 위의요, 계행이다. 저 들음이 적은 범부는 이것으로서 부처님을 찬탄한다.

또 사문 고오타마의 ‘주지 않는 것을 빼앗기를 버리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기를 멸하여 도둑질할 마음이 없는 것’을 찬탄한다. 또 사문 고오타마의 ‘음욕을 버리고 범행을 깨끗이 닦으며 오로지 계를 지키고 음탕하기를 익히지 않으며 행하는 바가 청결한 것’을 찬탄한다. 또 사문 고오타마의 ‘거짓말을 버려 없애고 말하는 바가 지성하며 말하는 바가 진실하여 세상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을 찬탄한다. 또 ‘사문 고오타마는 두 말을 버려 없애어 이 말로서 저를 괴란(壞亂)하지 않고 저 말로서 이를 괴란하지 않으며 쟁송이 있으면 잘 화합시키고 이미 화합하면 그 환희를 더하며 말하는 바가 있으면 화합을 떠나지 않고 성실함이 마음에 들어가 말하는 바는 때를 안다. 또 사문 고오타마는 악구(惡口)를 버렸다. 만일 추한 말로 사람을 손상하면 그의 결원(結怨)을 더 하고 원한과 미움을 자라게 하는 것인데 그런 추한 말은 아주 하지 않고 언제나 착한 말로써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 여러 사람의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바로써 염증을 내지 않는다. 다만 그런 말만을 말한다. 사문 고오타마는 꾸밈말을 버리었다. 때를 아는 말, 진실한 말, 이로운 말, 법다운 말, 율(律)다운 말, 잘못을 그치게 하는 말, 다만 이런 말만을 말한다.

사문 고오타마는 술 마시기를 버리고 향화(香華)를 붙이지 않고 노래와 춤을 보지 않고 높은 평상에 앉지 않는다. 때아닌 때에 먹지 않는다. 금, 은을 잡지 않는다. 아내와 자식과 남녀의 종을 기르지 않는다. 코끼리, 말, 돼지, 염소, 닭, 개, 및 모든 새나 짐승을 기르지 않는다. 상병(象兵), 마병(馬兵), 차병(車兵), 보병(步兵)을 기르지 않는다. 밭과 집을 두지 않고 五곡을 심지 않는다. 주먹으로 남과 맞서지 않으며 말과 저울로써 남을 속이지 않는다. 또한 판매하고 계약하지 않는다. 또한 저당을 잡고 빚을 주어 무단히 이를 내지 않으며 또 음모를 하거나 면전(面前)과 배후(背後)가 있지 아니하고 때가 아니면 행하지 않으며 몸을 위해 목숨을 기르되 배를 헤아려 알맞게 먹는다. 그의 가는 곳마다에 옷과 바루가 몸을 따르는 것은 마치 나는 새의 날개가 몸과 함께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계를 가지는 소소한 인연일 뿐으로서 저 들음이 적은 범부는 이것으로서 부처를 찬탄한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의 신시(信施)를 받고도 다시 저축하기를 구하며 의복과 음식에 만족할 줄을 모르지마는 사문 고오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의 신시를 먹으면서 자기의 생업을 경영하고 나무를 심어 귀신의 의지할 곳을 만들지마는 사문 고오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의 신시를 먹으면서 다시 방편을 지어 모든 이양(利養), 상아(象牙), 잡보(雜寶), 높고 넓고 큰 평상 온갖 무늬 있는 비단 털 자리 돗자리, 담요들을 구하지마는 사문 고오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의 신시를 먹으면서 다시 방편을 지어 스스로 장엄을 구해 타락 기름을 몸에 문지르고 향수에 목욕하며 향가루를 몸에 바르고 향수로 머리를 빗고 좋은 화만을 붙이고 눈을 감색으로 물들이며 얼굴을 닦아 장엄하고 고리를 차고 머리를 묶고 몸을 깨끗이 씻어 거울에 스스로 비춰 보며 보배 가죽신을 신고 웃옷은 새하얗고 일산을 받고 총채를 잡고 깃발로 장엄하게 꾸미지마는 사문 고오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오로지 잡기를 즐기어 바둑, 장기, 八도(道), 十도, 百 千도에 이르기까지 갖은 놀음으로써 스스로 오락한다. 그러나 사문 고오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의 신시를 먹으면서 다만 도에 방해되는 무익한 말만 한다. 왕에 대한 일 전쟁과 군마의 일 뭇 대신과 관리들의 수레나 말을 타고 드나드는 일 유희하고 동산에 대한 일을 말할 뿐이다. 또 눕고 일어나고 걸어다니는 일 여자의 일 의복과 음식과 친척의 일을 이야기하며 또 바다에 들어가 보물 캐는 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문 고오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의 신시를 먹으면서 무수한 방편으로서 다만 나쁜 직업으로 생활하고 아름다운 말로 아첨하며 현재에 있어 서로 헐뜯고 이익으로서 이익을 구한다. 그러나 사문 고오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의 신시를 먹으면서 다만 서로 쟁송(諍訟)한다. 혹은 동산에서 혹은 욕지(浴池)에서 혹은 당상(堂上)에서 서로 시비하여 ‘나는 경률(經律)을 알지마는 너는 모른다. 나는 바른 길을 가지마는 너는 삿된 길을 간다. 앞의 것을 뒤에 붙이고 뒤의 것을 앞에 붙인다. 나는 능히 참지마는 너는 능히 참지 못한다. 너의 하는 말은 모두 정직하지 않다. 만일 의심되는 것이 있거든 내게 와서 물으라. 나는 다 답하리라’고. 그러나 사문 고오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바라문은 남의 신시를 먹으면서 다시 방편을 써서 스스로 심부름꾼이 되기를 구한다. 혹은 왕이나 왕의 대신 바라문 거사(居士)를 위해 심부름꾼이 되어 여기서 저기로 가고 저기서 여기로 오며 이 소식 가져다 저에게 주고 저 소식을 가져다 이에게 주되 혹은 스스로 하고 혹은 남을 위해 한다. 그러나 사문 고오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은 남의 신시를 먹으면서 다만 전쟁과 투쟁의 일만 익힌다. 혹은 도장(刀杖)과 궁시(弓矢)의 일을 익히며 혹은 닭과 개와 돼지와 염소며 코끼리와 말과 소와 낙타 따위의 짐승들의 싸움을 붙인다. 혹은 남녀의 싸움을 붙이고 혹은 여럿이 소리 부는 소리 북소리 노래 소리 춤 소리를 짓는다. 혹은 깃대를 넘어가는 갖가지 재주부리기를 익히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사문 고오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은 남의 신시를 먹으면서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남녀의 길흉과 호추(好醜)를 상보아 점치며 또 짐승을 상보아 이양을 구한다. 그러나 사문 고오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의 신시를 먹으면서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귀신을 부르고 혹은 쫓으며 갖가지 기도와 무수한 방도로 사람을 두렵게 한다. 능히 모으고 능히 흩으며 능히 괴롭게 하고 능히 즐겁게 한다. 또 능히 사람을 위해 태(胎)를 편안하게 하여 태옷을 낸다. 또 능히 사람을 저주해 나귀로 만들기도 하고 또 능히 사람을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로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모든 기술을 나타낸다. 손을 깍지껴 일월을 향하고 모든 고행으로서 이양을 구한다. 그러나 사문 고오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의 신시를 먹으면서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혹은 사람을 위해 병을 저주하고 혹은 악한 주문을 외우며 혹은 선한 주문을 외운다. 혹은 의방 침, 뜸 약석(藥石)으로써 모든 병을 고친다. 그러나 사문 고오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의 신시를 먹으면서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혹은 물불을 저주하고 혹은 귀신의 주문을 외우며 혹은 찰제리 주문을 외운다. 혹은 코끼리 주문 혹은 지절(支節)의 주문 혹은 안택부(安宅符) 주문 혹은 죽고 살 것을 아는 글을 외우고 혹은 꿈을 푸는 글을 외우며 혹은 손금을 보고 혹은 천문서를 외우며 혹은 일체 소리의 글을 외운다. 그러나 사문 고오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의 신시를 먹으면서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천시(天時)를 점쳐서 비가 오고 오지 않을 것과 곡식이 귀하고 천할 것과 병이 많고 적을 것과 두렵고 안온할 것을 말한다. 혹은 지동, 혜성, 월식, 일식을 말하고 혹은 성식(星蝕)을 말하고 혹은 불식(不飾)을 말하며 방면(方面)의 있는 곳을 다 능히 말한다. 그러나 사문 고오타마는 그런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의 신시를 먹으면서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하여 혹은 이 나라는 마땅히 성하고 저 나라는 같지 못하다고 말하며 혹은 저 나라가 마땅히 성하고 이 나라가 같지 못하다고 말하여 길흉을 보아 그 성쇠를 말한다. 그러나 사문 고오타마는 그러한 일이 없다. 모든 비구들이여, 이것은 계를 가지는 소소한 인연인데 저 들음이 적은 범부들은 이것으로써 부처님을 찬탄한다.”

부처님은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시 다른 법으로서 심심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이것은 오직 현성한 제자만이 능히 이것으로서 여래를 찬탄한다. 어떤 것이 심심 미묘한 큰 광명의 법으로서 현성의 제자만이 능히 이 법으로써 여래를 찬탄하는가. 모든 사문 바라문들의 본겁 본견(本劫 本見)과 말겁 말견에 있어서 갖가지 무수한 제대로의 주장은 다 六十 二견에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은 어떤 인연으로써 본겁 본견, 말겁 말견에 있어서 갖가지 무수한 제대로의 주장이 다 이 六十 二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하는가. 모든 사문 바라문은 본겁 본견에 있어서 갖가지 무수한 제대로의 주장이 다 十八견 중에 들어간다. 본겁 본견의 갖가지 무수한 제대로의 주장이 다 十八견 속을 지나가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어떤 인연으로 본겁 본견에 있어서 갖가지 무수한 제대로의 주장이 다 十八견 중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하는가.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있어서 상론(常論)을 일으켜 말한다. ‘나와 및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 이것은 다 四견 중에 들어간다. 본겁 본견에 있어서 말한다. ‘나와 및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 이것은 다 四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은 어떠한 인연으로 본겁 본견에 상론을 일으켜서 나와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고 말하여 이것이 다 四견 중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하는가.

혹은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서 정의 삼매(定意三昧)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二十의 성겁, 패겁(成劫 敗劫)을 기억하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와 및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 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二十 성겁 패겁을 기억한다. 그 가운데의 중생은 더하지도 않으며 감하지도 않으며 항상 모여 흩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것으로써 나와 및 세간은 항상하며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은 초견(初見)이다. 사문 바라문은 이것을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나와 및 세간은 항상 되다고 헤아린다. 이것은 四견 중에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들은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 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四十 성겁 패겁을 기억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와 및 세간은 항상되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 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四十 성겁 패겁을 기억한다. 그 가운데의 중생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며 항상 모여 있어 흩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것으로써 나와 및 세간은 항상 되고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은 二견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이것을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나와 및 세간은 항상 되다고 헤아린다. 그것은 四견 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서 정의 삼매에 들어가 삼매의 마음으로써 八十 성겁 패겁을 기억하고 이렇게 생각한다. ‘나와 및 세간은 항상 되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 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서 八十 성겁 패겁을 기억한다. 그 가운데의 중생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며 항상 모여 있어 흩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것으로서 나와 및 세간은 항상 되며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은 三견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이것을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나와 및 세간은 항상되다고 헤아린다. 이것은 四견 중에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빠른 지혜가 있어 잘 관찰하고 빠르게 관찰하는 지혜로써 방편으로 관찰하여 자세히 밝혔다고 한다. 자기의 소견으로서 자기의 변재로써 이렇게 말한다. ‘나와 및 세간은 항상되다’. 이것은 四견이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것을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나와 및 세간은 항상되다고 헤아린다. 그것은 四견 중에 벗어나지 못한다. 이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있어서 나와 및 세간은 항상되다고 헤아려 이와 같은 일체가 다 四견 중에 들어가는 것이요 나와 및 세간은 항상되다는 것은 이 四견 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여래만이 이 견처(見處)와 이러한 가짐과 이러한 고집을 알고 또한 그 보응(報應)을 안다. 여래의 아는 바는 또 이것에 지낸다. 비록 알아도 집착하지 않고 이미 집착하지 않으매 곧 적멸(寂滅)을 얻는다. 수(受)의 집(集) 멸(滅) 미(味) 과(過) 만족과 위험과 출요(出要)를 알고 평등관으로써 남음 없는 해탈을 하셨기 때문에 여래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심심 미묘한 큰 법의 광명으로 이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다른 심심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어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한다. 어떤 것이 그것인가.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있어서 주장한다. 나와 및 세간은 반은 항상 되고 반은 무상하다고 한다. 저 사문 바라문은 이것을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나와 및 세간은 반은 항상 되고 반은 무상하다고 헤아린다. 이것은 四견 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은 이 때에 있어서 이 겁(劫)이 처음으로 생겼을 때에 다른 중생이 있어 복이 다하고 목숨이 다하고 행이 다해 광음천(光音天)에서 목숨이 끝나 허공의 범천 가운데 나서 거기서 애착심을 내었다. 그래서 다른 중생도 함께 여기서 나기를 원했다. 이 중생이 이미 애착의 원을 내었음에 다시 다른 중생이 있어 목숨과 행과 복이 다해 광음천에서 목숨을 마치고 허공의 범천 가운데 났다. 그 먼저 난 중생은 곧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여기 있어 이 범(梵)이요 대범(大梵)이다. 나는 저절로 있다. 아무도 나를 만든 자는 없다. 나는 모든 뜻을 알고 一천 세계를 맡아 그 가운데서 자재(自在)하여 가장 존귀하며 능히 변화하여 미묘하기 제 一이다. 중생의 아버지로서 나는 혼자 먼저 있고 다른 중생은 뒤에 왔으니 뒤에 오는 중생은 다 나의 화성(化成)이다’라고. 그 뒤의 중생은 다시 이렇게 생각했다. ‘저는 대범이다. 저는 능히 스스로 되어 저를 만든 자는 없다. 저는 모든 뜻을 알고 一천 세계를 맡아 그 가운데서 자재하여 가장 존귀하며 능히 변화하여 미묘하기 제 一이다. 중생의 아버지로서 저는 혼자 먼저 있고 그 뒤에 우리가 있다. 우리들 중생은 저의 화성된 것이다’라고.

저 범천의 중생은 목숨과 행이 다해 세간에 와서 태어났다. 차차 자라나자 수염과 머리를 깎고 三 법옷을 입고 집을 떠나 도를 닦아 정의 삼매에 들어갔다. 삼매의 마음을 따라 스스로 본생을 알고 이렇게 말한다. ‘저 대범천은 능히 스스로 되어 저를 만든 자는 없다. 모든 뜻을 다 알고 一천 세계를 맡아 그 가운데서 자재하여 가장 존귀하며 능히 변화하여 미묘하기 제일이다. 저는 중생의 아버지로서 항상 존재하여 변하지 않는다. 저 범천은 우리를 화조(化造)하였다. 우리는 무상하고 변역하여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나와 및 세간은 반은 항상 하고 반은 무상이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것을 초견(初見)이라 한다. 사문 바라문은 이것을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주장을 세운다. 반은 항상 되고 반은 무상하다 한다. 이것은 四견 중에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중생은 희소(戱笑)와 게으름을 좋아하고 자주 자주 희소(戱笑)하여 스스로 오락한다. 그는 희소로써 오락할 때에 신체가 아주 피로해 곧 뜻을 잃는다. 뜻을 잃음으로써 곧 목숨은 마친다. 그는 세간에 태어나 점점 자라서 수염과 머리를 깎고 三 법옷을 입고 집을 나가 도를 닦는다. 그는 정의 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서 스스로 본생을 알고 이렇게 말한다. ‘저 다른 중생들은 자주 나지 않으며 자주 희소로써 오락하지 않고 거기에 항상 있어 길이 머물러 변화지 않는다. 나는 자주자주 희소함으로 말미암아 이 무상을 가져와 변역법이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와 및 세간은 반은 항상 되고 반은 무상한 것을 안다.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것을 제 二견이라고 한다. 사문 바라문은 이것을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주장을 세운다. 나와 및 세간은 반은 항상 되고 반은 무상이다‘고. 이것은 四견 중에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중생은 이리저리 서로 보고는 곧 뜻을 잃는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마치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점점 자라나자 수염과 머리를 깎고 三법옷을 입고 집을 나와 도를 닦아 정의 삼매에 들어간다. 삼매의 마음으로써 본소생(本所生)을 알고 곧 이렇게 말한다. ‘저 중생들은 이리저리 서로 보지 않음으로써 뜻을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저기서 자주자주 서로 보며 자주자주 서로 보고는 곧 뜻을 잃어서 이 무상을 가져와 변역법이 되었다. 나는 이것으로서 안다. 나와 및 세간은 반은 항상 되고 반은 무상이다.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것은 제 三견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이것을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주장을 세운다. 나와 및 세간은 반은 항상 되고 반은 무상이라고. 이것은 四견 중에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빠른 지혜(知慧)가 있어 능히 잘 관찰한다. 그는 빠르게 관찰하는 지혜로써 자기의 지변(智變)으로써 말한다. ‘나와 및 세간은 반은 항상 되고 반은 무상하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것을 제 四견이라 한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이것을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주장을 세운다. 나와 및 세간은 반은 항상 되고 반은 무상이라고. 이것은 四견 중에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있어서 주장을 세운다. 나와 및 세간은 반은 항상 되고 반은 무상이라고. 그것은 다 四견 중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이 견처(見處)와 이러한 가짐과 이러한 고집함을 알고 또한 보응을 아신다. 여래의 아시는 바는 또 그것들에 지난다. 비록 알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음으로서 곧 적멸을 얻는다. 그래서 수(受)와 집(集)과 멸(滅)과 미(味)와 과(過)와 출요(出要)를 알고 평등관으로써 남음 없이 해탈하였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이것을 다른 심심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라 하고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한다.

또 다시 심심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그래서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한다. 어떤 법이 그것인가. 모든 사문 바라문은 본겁 본견에 있어서 주장을 세운다. ‘나와 및 세간은 가[邊]이 있기도 하고 가이 없기도 하다’고. 저 사문 바라문은 이것을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주장을 세운다. 나와 및 세간은 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그것도 四견 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 삼매에 들어가 삼매의 마음으로써 세간을 보고 변상(邊想)을 일으킨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세간은 가이 있다. 이것은 진실하며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내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 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세간의 가이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세간은 가이 있다. 이것은 진실하며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것을 초견이라 한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것을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주장을 세운다. 나와 및 세간은 가이 있다고. 이것은 四견 중에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서 정의 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세간을 보고 무변(無邊)의 상(想)을 일으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간은 가이없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내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 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서 세간의 무변을 본다. 그러므로 세간은 무변이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 안다.’ 이것은 제 二견이다. 사문 바라문은 이것을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주장을 세운다. ‘나와 세간은 무변이라’고. 이것은 四견 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 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세간을 보고 상방(上方)은 유변이요 四방은 무변이라 하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간은 가이 있기도 하고 가이 없기도 하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 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서 상방은 가이 있고 四방은 가이 없음을 본다. 그러므로 나는 세간이 가이 있기도 하고 가이 없기도 하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 안다’고. 이것을 제 三견이라 한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이것으로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 주장을 세운다. ‘나와 및 세간은 가이 있기도 하고 가이 없기도 하다’고. 이것은 四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빠른 지혜가 있어 잘 관찰한다. 그는 빠르게 관찰하는 지혜로써 자기의 지변으로서 말한다. ‘나와 및 세간은 가이 있는 것 아니요 가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것을 제 四견이라 한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이것으로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주장을 세운다. ‘나와 세간은 가이 있기도 하고 가이 없기도 하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것은 四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모든 사문 바라문이 본겁 본견에 있어서 주장을 세우는데 나와 및 세간은 가이 있기도 하고 가이 없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 四견 가운데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이 견처(見處)와 이러한 가짐과 이러한 고집을 알고 그 응보도 아신다. 여래의 아시는 바는 또 거기에 지난다. 비록 알아도 집착하지 않고 이미 집착하지 않으매 곧 적멸을 얻는다. 수(受)의 집(集), 멸(滅), 미(味), 과(過), 출요를 알고 평등관으로써 남음 없이 해탈하였기 때문에 여래라 이름한다. 이것이 심심 미묘의 큰 법의 광명이요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다른 심심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어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한다. 어떤 것이 그것인가. 모든 사문 바라문은 본겁 본견에 있어서 이문이답(異問異答)하는 것이다. 저가 물을 때 물음을 달리하면 답을 달리한다. 그것은 四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문 바라문은 이것을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물음을 달리하면 답을 달리한다. 그것은 四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러한 주장을 하고 이러한 소견을 가진다. ‘나는 선악에 갚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나는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선악에는 갚음이 있는가 갚음이 없는가.’고 세간에는 사문 바라문이 있어 두루 널리 많이 듣고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항상 한적한 것을 즐기고 그때그때 하는 말이 정묘롭고 자세하여 세상의 존중하는 바 되며 능히 지혜로써 모든 소견을 잘 분별한다. 만일 누가 깊은 뜻을 내게 물으면 나는 능히 답할 수 없다. 저에게는 부끄럼이 있고 저에게는 두려움이 있다. 마땅히 이 대답으로서 귀의할 데를 삼고 섬[洲]을 삼고 집을 삼고 구경도(究竟道)를 삼자. 그가 만일 내게 물으면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자. ‘이 일은 다르지 않다. 이 일은 다른 것도 아니요 다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초견이라 한다. 사문 바라문은 이것을 인해 물음이 다르면 답이 다르다. 그것은 四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러한 주장을 세우고 이러한 소견을 가진다. ‘나는 다른 세상이 있는가 다른 세상이 없는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모든 세간의 사문 바라문은 천안지(天眼智)와 타심지(他心智)로써 능히 먼일을 본다. 비록 그가 그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도 다른 사람은 그를 보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능히 다른 세상이 있고 다른 세상이 없는 것을 안다. 나는 다른 세상이 있는가 다른 세상이 없는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만일 내가 말한다면 그것은 곧 거짓말이 된다. 나는 거짓말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그것으로서 귀의할 데를 삼고 섬을 삼고 집을 삼고 구경도를 삼는다. 그가 만일 내게 물으면 나는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리라. ‘이 일은 이와 같고 이 일은 사실이다. 이 일은 다르다. 이 일은 다르지 않다. 이 일은 다른 것도 아니요 이 일은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라고. 이것을 제 二견이라 한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이것을 인해 물음이 다르면 답이 다르다. 그것은 四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러한 소견을 가지고 이러한 주장을 세운다. ‘나는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불선인가를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나는 이러한 주장의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불선이다, 하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나는 곧 여기서 사랑을 내고 사랑을 쫓아 화를 낸다. 사랑이 있고 성냄이 있으면 곧 수(受)를 내게 된다. 나는 수를 없애고자 한다. 그러므로 집을 나와 행을 닦는다. 저는 수를 미워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것으로서 귀의할 데를 삼고 섬을 삼고 집을 삼고 구경도를 삼는다.’ 그가 만일 나에게 물으면 나는 마땅히 이렇게 답하리라. ‘이 일은 이와 같다. 이 일은 사실이다. 이 일은 다르고 이 일은 다르지 않다. 이 일은 다른 것이 아니고 이 일은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것을 제 三견이라 한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이것을 인해 물음이 다르면 답이 다르다. 그것은 四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어리석고 어둡고 미련하여 남이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의 말을 따라 ‘이 일은 이와 같다. 이 일은 사실이다. 이 일은 다르고 이 일은 다르지 않다. 이 일은 다른 것이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고 대답한다. 이것은 제 四견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이것을 인해 물음이 다르면 답이 다르다. 그것은 四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은 어떤 사문 바라문이 있어 본겁 본견에 있어 물음이 다르면 답이 다르다. 그것은 다 四견 가운데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이 견처와 이러한 가짐과 이러한 고집함을 알고 또 그 응보도 안다. 여래의 아는 바는 또 이것에 지난다. 비록 알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이미 집착하지 않으매 곧 적멸을 얻는다. 수(受), 집(集), 멸(滅), 미(味), 과(過)와 출요를 알고 평등관으로써 남음 없이 해탈하셨다. 그러므로 여래라 이름한다. 이것을 심심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라 하고 현성의 제자들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한다.

다시 다른 심심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어 현성의 제자들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한다. 무엇이 그것인가. 어떤 사문 바라문이 있어 본겁 본견에 있어서 원인이 없이 생겨 이 세간이 있다고 한다. 그는 다 二견 가운데 들어간다. 본겁 본견에 있어서 원인이 없이 생겨 이 세간이 있다고 하는 것은 二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은 무슨 일로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원인이 없이 생겨났다고 하며 그것이 이 二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혹 어떤 중생은 생각도 없고 알음도 없다. 만일 그 중생이 생각을 일으키면 곧 목숨을 마쳐 세간에 태어난다. 그는 점점 자라나 수염과 머리를 깎고 三법옷을 입고 집을 나와 도를 닦는다. 정의 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서 본소생(本所生)을 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본래 없었는데 이제 갑자기 있다. 이 세간은 본래 없었는데 이제 있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것은 초견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이것을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원인이 없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二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빠른 지혜를 가지고 능히 잘 관찰한다. 그는 이미 빠르게 관찰하는 지혜로써 관찰하고 자기의 지변으로서 능히 이렇게 말한다. ‘이 세간은 원인이 없이 있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것은 제 二견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이것을 인해 본겁 본견에 있어서 ‘인이 없이 있으므로 이 세간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二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본겁 본견에 있어서 원인이 없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다 二견 가운데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는 것도 또한 위와 같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본겁 본견에 있어서 무수한 갖가지의 제대로의 주장은 다 이 十八견 중에 들어간다. 본겁 본견의 무수한 갖가지의 제대로의 주장은 十八견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는 것도 또한 위와 같다.

다시 다른 심심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어떤 것들이 그것인가. 모든 사문 바라문은 말겁 말견(末劫末見)에 있어서 무수한 갖가지를 제대로 주장한다. 그것은 다 四十四견 중에 들어간다. 말겁 말견에 있어서 갖가지로 수없이 제대로 하는 주장은 四十四견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말겁 말견에 있어서 수없이 갖가지로 제대로 주장하는 것이 四十四견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말겁 말견에 있어서 유상론(有想論)을 내어 세간의 유상을 주장한다. 그것은 다 十六견 가운데 들어 말겁 말견에 있어서 상론(想論)을 내어 세간의 유상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十六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인해 말겁 말견에 있어서 상론을 내어 세간의 유상을 주장하여 그것은 다 十六견 가운데 들어가 벗어나지 못하는가.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이와 같은 주장을 세우고 이와 같은 소견을 말한다. ‘나는 이생을 마친 뒤 유색, 유상(有色有想)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것을 초견이라 한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이것을 인해 말겁 말견에 있어서 상론을 내어 세간의 유상을 주장한다. 이것은 十六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무색유상(無色有想)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유색무색유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비유색 비무색 유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유변유상(有邊有想)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생을 마친 뒤에 무변유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유변 무변 유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비유변 비무변유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또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나서 전연 유락유상(有樂有想)이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나서 전연 유고유상(有苦有想)이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유락유고유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불고불락유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유일유상(有一有想)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유약간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소상(小想)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유무량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을 十六견이라 한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말겁 말견에 있어서 상론을 내어 세간의 유상을 말한다. 이것은 十六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시는 것이 또한 위와 같다.

다시 다른 심심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그것은 어떤 법인가.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말겁 말견에 있어서 무상론(無想論)을 내어 세간의 무상(無想)을 말한다. 그것은 다 八견 중에 들어간다. 말겁 말견에 있어서 무상론을 내는 것은 이 八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인하여 말겁 말견에 있어서 무상론을 내어 세간의 무상을 주장하여 八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이러한 소견을 가지고 이러한 주장을 세운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유색 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무색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유색 무색 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비유색 비무색 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유변 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무변 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유변 무변 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비유변 비무변 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것을 八견이라 한다. 만일 사문 바라문이 이것을 인해 말겁 말견에 있어서 무상론을 내어 세간의 무상을 말한다면 그것은 다 八견 중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부처님만이 아시는 것도 또한 위와 같다.

다시 다른 심심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그 법은 어떤 것인가.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말겁 말견에 있어서 비상비비상론(非想非非想論)을 내어 이 세간의 비상 비비상을 말한다. 그것은 다 八견 중에 들어간다. 말겁 말견에 있어서 비상 비비상론을 주장하여 세간의 비상 비비상을 말하는 것은 八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인하여 말겁 말견에 있어서 비상 비비상론을 내어 세간의 비상 비비상을 말하여 八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이러한 주장을 세우고 이러한 소견을 가진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유색 비유상 비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또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무색 비유상 비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유색 무색 비유상 비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비유색 비무색 비유상 비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생을 마친 뒤에 유변(有邊) 비유상 비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무변(無邊) 비유상 비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유변 무변 비유상 비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비유변 비무변 비유상 비무상을 낸다.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것을 八견이라 한다. 만일 사문 바라문이 이것을 인해 말겁 발견에 있어서 비유상 비무상론을 내어 세간의 비유상 비무상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다 八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하는데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시는 것도 또한 위와 같다.

다시 다른 심심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어떤 법이 그것인가. 모든 사문 바라문은 말겁 말견에 있어서 단멸론(斷滅論)을 일으켜 중생은 단멸하여 남음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 七견 중에 들어간다. 말겁 말견에 있어서 단멸론을 일으켜 중생은 단멸하여 남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七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인하여 말겁 말견에 있어서 단멸론을 일으켜 중생은 단멸하여 남음이 없다고 말하여 그것은 七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모든 사문 바라문은 이러한 주장을 세우고 이러한 소견을 가진다. ‘내 몸의 四대(大)와 六입(入)은 부모로부터 나서 젖을 먹고 길러지고 의식으로 자라나며 어루만짐과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무상하여 반드시 마멸(磨滅)로 돌아간다. 모두 이러하므로 단멸이라 이름한다.’고. 이것은 제 一견이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이 나는 단멸이라 이름할 수 없다. 나는 욕계천(欲界天)으로서는 단멸하여 남음이 없다. 모두 이러하므로 단멸이라 한다’고. 이것을 제 二견이라 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단멸이 아니다. 색계(色界)의 화신(化身)으로서 모든 근(根)이 구족하지마는 그것만은 단멸하여 남음이 없다. 이것을 단멸이라 한다.’ 어떤 자는 말한다. ‘이것은 단멸이 아니다. 나는 무색공처(無色空處)로서만 단멸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이것은 단멸이 아니다. 나는 무색식처(無色識處)로서만 단멸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이것은 단멸이 아니다. 나는 무색불용처(無色不用處)로서만 단멸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이것은 단멸이 아니다. 나는 무색유상무상처(無色有想無想處)로서만 단멸이다’라고. 이것이 제 七단멸이요 이것을 七결이라 한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이것을 인해 말겁 말견에 있어서 이 중생의 무리들은 단멸하여 남음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七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시는 것도 또한 위와 같다.

다시 다른 심심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어떤 법이 그것인가. 모든 사문 바라문은 말겁 말견에 있어서 현재의 열반론(涅槃論)을 세워 중생은 현재에 열반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五견 중에 든다. 말겁 말견에 있어서 현재에 열반이 있다고 주장하지마는 그것은 五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인해 말겁 말견에 있어서 중생은 현재에 열반을 가진다 하여 五견 중에 벗어나지 못하는가.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이러한 소견을 가지고 이러한 주장을 세워 말한다. ‘나는 현재에 있어서 五욕(欲)을 마음대로 한다. 이것이 내가 현재에 있어서 열반을 얻은 것이다’라고. 이것은 제 一견이다.

다시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현재의 열반이 아닌 것이 아니지마는 다시 현재 열반이 있으니 미묘하기 제 一이다. 너의 모르는 바로서 홀로 나만이 안다. 나처럼 욕악(欲惡) 불선(不善)의 법을 버리고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으므로 이(離)해서 생기는 희락으로 초선(初禪)에 들어간다. 이것을 현재의 열반이라 한다.’ 이것은 제 二견이다.

다시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현재의 열반이 아닌 것이 아니지마는 다시 현재의 열반이 있으니 미묘하기 제 一이다. 너는 모르는 바로서 홀로 나만이 안다. 나처럼 각과 관을 멸하고 속의 기쁨 일심으로 각도 없고 관도 없어 정(定)에서 생기는 희락으로서 제 二선에 들어간다. 이와 같으므로 현재의 열반이라 이름한다.’ 이것을 제 三견이라 한다.

다시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현재의 열반이 아닌 것이 아니지마는 다시 현재의 열반이 있으니 미묘하기 제일이다. 너의 모르는 바로서 홀로 나만이 안다. 나처럼 염(念)을 없애고 기쁨을 버리어 즐거움에 머무르고 바른 생각을 일심으로 가져 스스로 몸의 말씀하신 바 제 三선에 들어간다. 이와 같으므로 현재의 열반이라 이름한다’고. 이것이 제 四견이다.

다시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현재의 열반이 아닌 것이 아니지마는 다시 현재의 열반이 있으니 미묘하기 제일이다. 너는 모르는 바로서 홀로 나만이 안다. 나처럼 즐거움도 없어지고 괴로움도 없어져 걱정과 기쁨을 먼저 없앰으로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생각을 보호해 청정하여 제 四선에 들어간다. 이것을 제일 열반이라 이름하며 이것을 제 五견이라 한다. 만일 사문 바라문들이 말겁 말견에 있어서 현재의 열반론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五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시는 것이 또한 위와 같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말겁 말견에 있어서 무수한 갖가지의 마음대로 주장하는 바 다 四十 四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이 모든 견처(見處)를 아시는 것이 또한 위와 같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의 본겁 본견과 말겁 말견에 대한 무수한 갖가지의 마음대로 주장하는 바는 다 이 六十 二견에 든다. 본겁 본견과 말겁 말견에 대한 무수한 갖가지의 마음대로 주장하는 바는 六十 二견 중에 있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여래만이 이 본곳을 아시는 것이 또한 위와 같다.

모든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있어서 상론(常論)을 세워 ‘나와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저 사문 바라문은 여기서 지혜를 낸다. 이른바 다른 믿은 다른 욕심, 다른 들음, 다른 인연, 다른 깨달음, 다른 소견, 다른 정(定), 다른 인(忍)이다. 이것을 인하여 지혜를 낸다. 그것으로 널리 펴 나타내면 곧 이름하여 수(受)라 한다. 그리고 내지 현재의 열반도 또한 그와 같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상론을 세워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는 수(受)의 인연을 인하여 사랑을 일으키고 사랑을 내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해 그만 사랑에 물들고 사랑 때문에 항복한다. 그래서 내지 현재의 열반도 또한 그와 같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본겁 본견에 있어서 상론을 세워 ‘세간은 항상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가 접촉의 인연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만일 접촉의 인연을 떠난다면 그런 주장을 세울 리가 없을 것이다. 내지 현재의 열반도 또한 그와 같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과 말겁 말견에 있어서 각각 본대로 말하는 바 그것은 다 六十 二견 중에 든다. 각각 그 소견을 따라 말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의지하고 그 가운데 있어 벗어나지 못한다. 마치 능숙한 고기잡이가 빽빽한 그물을 작은 못 위에 덮어 치는 것과 같다. 마땅히 알라. 못 가운데 있는 모든 고기들은 다 그물 속에 들어도 피할 곳이 없어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사문 바라문도 또한 그와 같다. 본겁과 본견 말겁 말견에 대한 갖가지 주장은 다 六十 二견에 들어 벗어나지 못한다.

만일 비구가 六촉(觸)의 원인 멸, 맛, 허물, 출요에 대해서 여실히 알면 그것이 곧 최승이 되어 저의 모든 소견을 벗어날 것이다. 여래는 스스로 생사가 이미 다한 것을 아시지마는 그 몸을 가진 까닭은 모든 하늘과 사람을 복되게 하고 제도하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몸이 없다면 곧 모든 하늘과 세상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을 것이다. 마치 다라수(多羅樹)의 머리를 끊으면 다시 나지 않는 것처럼 부처님도 또한 그와 같이 이미 생사를 끊어 영원히 다시 나시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 법을 연설하실 때 대천(大千) 세계는 三반 六종으로 진동했다.

그 때 아난은 부처님 뒤에서 부채를 들고 부처님을 부쳐 드리고 있다가 오른 팔을 드려내고 길이 꿇어앉아 손을 깍지끼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법은 아주 깊습니다. 마땅히 무엇이라 이름하여 어떻게 받들어 가져야 하겠나이까.”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이 경을 이름하여 의동(義動), 법동(法動), 견동(見動), 마동(魔動), 범동(梵動)이라 하라.”

그 때에 아난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환희 하여 받들어 행했다.

 

21 범동경.hwp

21 범동경.hwp
0.03MB

'초기경전 > 장아함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아함경23 구라단두경  (0) 2012.06.16
장아함경22 종덕경  (0) 2012.06.16
장아함경20 아마주경  (0) 2012.06.16
장아함경19 대회경  (0) 2012.06.16
장아함경18 자환희경  (0) 2012.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