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주제별 정리/수행

기타수행 3) 염경(念經)

다르마 러브 2013. 8. 29. 14:15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승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옛날 아직 무상정진각(無上正盡覺)을 깨닫지 못하였을 때에는 이러한 생각을 하였느니라.

'나는 차라리 모든 생각을 구별해 두 부분(分)으로 나누어, 욕심의 생각[欲念] 성냄의 생각[?念] 해침의 생각[害念]을 한 부분으로 하고, 욕심이 없는 생각[無欲念] 성냄이 없는 생각[無?念] 해침이 없는 생각[無害念]을 다시 한 부분으로 하자.'

나는 그 뒤에 곧 모든 생각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욕심의 생각 성냄의 생각 해침의 생각을 한 부분으로 하고, 욕심이 없는 생각 성냄이 없는 생각 해침이 없는 생각을 한 부분으로 하였다. 나는 이렇게 행하여 멀리 떠나 혼자 있으면서 마음에 방일함 없이 부지런히 힘써 수행할 때에 욕심의 생각이 생겼다. 나는 곧 욕심의 생각이 생기면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치고 둘을 함께 해치며, 지혜를 멸하고 번거로움과 괴로움이 많아, 열반을 증득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치고 둘을 함께 해치며, 지혜를 멸하고 번거로움과 괴로움이 많아, 열반을 얻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 빨리 그것을 없앴다. 그러자 다시 성냄의 생각과 해침의 생각이 생겼다. 나는 곧 성냄의 생각과 해침의 생각이 생기면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치고 둘을 함께 해치며, 지혜를 멸하고 번거로움과 괴로움이 많아, 열반을 증득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치며 둘을 함께 해치고, 지혜를 멸하고 번거로움과 괴로움이 많아, 열반을 얻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 빨리 그것을 없앴다.

나는 욕심의 생각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끊어 없애 버리며, 성냄의 생각과 해침의 생각이 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끊어 없애 버렸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한량없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생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다음과 같다. 봄이 지난 뒤에는 밭에 종자를 뿌리기 때문에 방목(放牧)할 토지가 좁아지게 된다. 그래서 소치는 아이는 소를 들에 풀어놓는데 소가 남의 밭에 들어가면 소치는 아이는 곧 작대기를 가지고 가서 막는다. 무슨 까닭인가? 소치는 아이는 그 때문에 반드시 꾸지람을 받거나 매를 맞거나, 결박당하거나 잘못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치는 아이는 작대기를 가지고 가서 그것을 막는 것이다. 나도 또한 이와 같이 욕심의 생각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끊어 없애 버리며, 성냄의 생각과 해침의 생각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끊어 없애 버렸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한량없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생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비구는 뜻[思]하는 바를 따라, 생각[念]하는 바를 따라 마음은 곧 그 가운데서 즐거워한다. 만일 비구가 욕심의 생각을 많이 생각[念]하면, 곧 욕심이 없는 생각을 버리고, 욕심의 생각을 많이 생각[念]하기 때문에 마음은 곧 그 가운데서 즐거워한다. 만일 비구가 성냄의 생각과 해침의 생각을 많이 생각[念]하면, 곧 성냄 없고 해침 없는 생각을 버리고, 성냄의 생각과 해침의 생각을 많이 염하기 때문에 마음은 곧 그 가운데서 즐거워하느니라. 이렇게 비구가 욕심의 생각을 여의지 않고, 성냄의 생각을 여의지 않고, 해침의 생각을 여의지 않으면, 곧 생(生) 노(老) 병(病) 사(死)와 시름[愁] 걱정[憂] 울음[啼哭]을 벗어나지 못하고, 또한 일체의 괴로움을 여의지 못하느니라.

나는 이와 같이 행하여, 멀리 떠나 혼자 있으면서 마음에 방일이 없이 부지런히 힘써 수행하여 욕심 없는 생각이 생겼다. 나는 곧 욕심 없는 생각이 생기면 자신도 해치지 않고 남도 해치지 않고, 또한 둘을 함께 해치지 않으며, 지혜를 닦고, 번거롭고 괴롭지 않아, 열반을 증득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도 해치지 않고 남도 해치지 않고, 또한 둘을 함께 해치지 않으며, 지혜를 닦고, 번거롭고 괴롭지 않아, 열반을 증득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 빨리 닦아 익혀 널리 폈다. 그러다 다시 성냄 없는 생각과 해침 없는 생각이 생겼다. 나는 곧 성냄 없는 생각과 해침 없는 생각이 생기면 자신도 해치지 않고 남도 해치지 않고, 또한 둘을 함께 해치지 않으며, 지혜를 닦고, 번거롭고 괴로움이 없어, 열반을 증득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도 해치지 않고 남도 해치지 않고, 또한 둘을 함께 해치지 않으며, 지혜를 닦고, 번거롭고 괴로움이 없어, 열반을 증득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 빨리 닦아 익혀 널리 폈다.

나는 욕심 없는 생각[無欲念]과 뜻이 많은 생각[多思念]이 생겼고, 성냄 없는 생각[無?念] 해침 없는 생각[無害念] 뜻이 많은 생각[多思念]이 생겼다. 나는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다.

'뜻이 많은 생각은 몸으로 선정의 기쁨을 망각하게 해 곧 마음을 상하게 한다. 나는 차라리 안 마음을 다스려 항상 머물러, 안에 있어서 그치고 쉬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정을 얻어,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하자.'

나는 뒤에, 곧 안 마음을 다스려 항상 머물러, 안에 있어서 그치고 쉬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정을 얻어,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였다. 나는 욕심 없는 생각을 낸 뒤에, 다시 생각을 내어 법을 향하고 법을 따르며, 성냄 없는 생각, 해침 없는 생각을 낸 뒤에, 다시 생각을 내어 법을 향하고 법을 따랐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한량없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생기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가을이 지난 뒤에 모든 곡식을 추수해 마치면 소치는 아이가 소를 들과 밭에 방목할 때 '내 소를 저기에 무리 지어 놓아야겠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같나니, 무슨 까닭인가? 소치는 아이는 이런 이유로 꾸지람을 받거나 매를 맞거나, 결박당하거나 잘못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내 소를 저기에 무리 지어 놓아야겠다'고 이렇게 생각한 것이니라. 나도 또한 이와 같이 욕심 없는 생각을 낸 뒤에는 다시 생각을 내어 법을 향하고 법을 따르며, 성냄 없는 생각, 해침 없는 생각을 낸 뒤에는, 다시 생각을 내어 법을 향하고 법을 따른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그로 말미암아 한량없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생기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니라.

비구는 뜻[思]하는 바에 따라, 생각[念]하는 바에 따라, 마음은 곧 그 가운데서 즐거워하게 된다. 만일 비구가 욕심 없는 생각을 많이 생각한다면, 욕심의 생각을 버리고 욕심 없는 생각을 많이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은 곧 그 가운데서 즐거워하게 된다. 만일 비구가 성냄 없는 생각, 해침 없는 생각을 많이 생각한다면, 성냄의 생각, 해침의 생각을 버리고 성냄 없는 생각, 해침 없는 생각을 많이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은 곧 그 가운데서 즐거워하게 된다. 그는 각(覺)과 관(觀)을 이미 쉬고, 안으로 고요히 한마음이 되어 각(覺)도 없고 관(觀)도 없으며,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닌다. 그는 기쁨의 욕심을 여의고, 평정하여 구함 없이 노닐며,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로 몸에 즐거움을 깨닫는다. 이른바 성인께서 말씀하신 성인의 평정[捨] 기억[念] 즐거움에 머묾[樂住] 공(空)이 있는 제3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닌다. 그는 즐거움이 멸하고 괴로움도 멸하는데, 기쁨과 걱정의 뿌리는 이미 멸한 상태이며,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 기억 청정이 있는 제4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닌다.

그는 이와 같이 선정의 마음이 청정하여, 더러움도 없고, 번뇌도 없으며, 부드럽게 잘 머물고,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얻어서 누(漏)가 다한 신통의 지혜로 향해 나아가 증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곧 이 괴로움[苦]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 알고, 이 괴로움의 발생[苦集]을 알며, 이 괴로움의 소멸[苦滅]을 알고, 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苦滅道]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 안다. 또한 이 누(漏)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 알고, 이 누의 발생을 알며, 이 누의 소멸을 알고, 이 누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 안다. 그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 뒤에는 곧 욕루(欲漏)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해탈한 뒤에는 곧 해탈한 줄을 알아, 생이 이미 다하고, 범행(梵行)은 이미 서며, 할 일을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이 비구는 욕심의 생각을 여의고 성냄의 생각을 여의며, 해침의 생각을 여의어, 곧 생 노 병 사와 시름 걱정 울음에서 해탈하게 되고 일체의 괴로움을 떠나느니라.

마치 어떤 한가한 곳에 큰 샘물이 있는데, 그곳에서 노닐며 사는 사슴떼가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와서 그 사슴떼를 위하여 이로움과 요익을 구하지 않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지 않아, 평평하고 바른 길은 막고 나쁜 길 하나만 열어 큰 구덩이를 만들어 놓고 사람을 시켜 지키고 감시하게 하면, 이렇게 하여 사슴떼는 모두 죽고 말 것이다. 다시 어떤 사람이 와서 그 사슴떼를 위하여 이로움과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여, 평평하고 바른 길을 열고 나쁜 길은 닫아 막으며 지키고 감시하던 사람도 물리치면, 이렇게 하여 사슴떼는 모두 편안히 구제를 받을 것이다. 비구들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나는 이 비유를 들어 말해 그 뜻을 알게 하려 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를 들으면 곧 그 취지를 아나니, 이 비유에도 의미가 있다. 큰 샘물[大泉水]은 곧 5욕(欲)에 대한 사랑스러움과 즐거움이다. 어떤 것을 다섯 가지라 하는가?

눈은 빛깔을 알고 귀는 소리를 알며, 코는 냄새를 알고 혀는 맛을 알며, 몸은 촉감을 아나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큰 샘물이란 이 5욕이요, 사슴떼란 이 사문과 범지들이니라.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을 위하여 이로움과 요익을 구하지 않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바로 마왕(魔王) 파순(波旬)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평평하고 바른 길은 막고 나쁜 길 하나만 연다는 것은 세 가지 악하고 착하지 않은 생각이니, 곧 욕심의 생각 성냄의 생각 해침의 생각이다. 나쁜 길이란 이 세 가지 악하고 착하지 않은 생각이니라. 다시 나쁜 길이 있나니, 곧 8사도(邪道)로서, 삿된 견해(邪見)와 나아가 삿된 선정(邪定)에 이르기까지의 여덟 가지이니라. 큰 구덩이를 만든다는 것은 무명(無明)임을 알아야 하고, 사람을 시켜 지킨다는 것은 마왕 파순의 권속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시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을 위하여 이로움과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한다는 것은 이 여래 무소착(無所着) 등정각(等正覺)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고, 나쁜 길[惡道]은 막고 평평하고 바른 길[平正路]을 연다는 것은 세 가지 착한 생각이니, 곧 욕심 없는 생각 성냄 없는 생각 해침 없는 생각이다. 길[道]이란 이 세 가지 착한 생각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시 길이 있나니, 곧 8정도(正道)로서 바른 견해[正見]와 나아가 바른 선정[正定]에 이르기까지의 여덟 가지이니라.

비구들아,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평평하고 바른 길을 열고 나쁜 길은 닫아 막으며, 구덩이를 메워 평평하게 하고 지키는 사람을 물리치며, 높은 스승이 제자를 위하는 것처럼 큰 사랑과 슬픔을 일으켜 가엾이 여기고 불쌍하게 생각하며, 이로움과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는 일을 나는 이제 다해 마쳤다.

너희들도 또한 마땅히 스스로 노력하라. 일 없는 한가한 곳이나 산림이나 나무 밑이나, 비고 고요한 곳으로 가서 연좌(宴坐)하며 깊이 생각하되 방일하지 말고, 더욱 부지런히 정진하여 후회가 없게 하라.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요, 이것이 나의 훈계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念經 대정장 1/589 상~590 상; 한글대장경 중아함경 인터넷판, pp. 736~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