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아함경 제49권
187. 설지경(說智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에 노닐으시면서 승림 급고독원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만일 어떤 비구가 너희들에게 와서 그가 이미 얻은 지혜를 말하면서 ‘내 생(生)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 모양을 안다.’고 말하거든 너희들은 그 말을 듣고는 마땅히 그렇다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라. 그렇다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는 다시 그 비구에게 ‘세존께서 색(色)의 왕성한 음(陰), 각(覺)의 왕성한 음, 상(相)의 왕성한 음, 행(行)의 왕성한 음, 식(識)의 왕성한 음, 이 다섯 가지 왕성한 음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그것에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 수 있겠는가.’고 물어 보라.
만일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면 응당 대답하기를 ‘여러분, 몸의 왕성한 음은 결과[果]가 아니요, 공허(空虛)한 것으로서 그것은 욕망도 아니요 항상 있는 것도 아니며 의지할 것도 아니요, 변하는 물건이다. 나는 그런 줄을 알기 때문에 만일 색의 왕성한 음에 대해서 욕망이 있고 물 젖음이 있으며, 집착이 있고 묶음과 묶임의 번뇌가 있으면, 거기에 대한 욕심이 없어 마음은 멸하고 쉬고 그치어져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각, 상, 행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며, 식의 왕성한 음도 그것은 결과가 아니요, 공허한 것으로서 욕망도 아니요 항상 있는 것도 아니며 의지할 것도 아니요, 변하는 법이다. 나는 그런 줄을 알기 때문에 만일 의식이 왕성한 음에 대해서 욕망이 있고 물 젖음이 있으며, 집착이 있고 묶음과 묶임의 번뇌가 있으면, 거기에 대한 욕심이 없어 마음은 멸하고 쉬고 그치어져, 집착함이 없어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안다. 여러분, 나는 이 다섯 가지 왕성한 음을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기 때문에 집착함이 없어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고 말할 것이다.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는 응당 이렇게 대답할 것이니 너희들은 그 말을 듣고는 마땅히 그렇다고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여야 하느니라.
그렇다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는 다시 그 비구에게 ‘현자여, 세존께서는 四식(食)을 말씀하시는데 중생들은 그것으로서 살고 몸을 기르게 된다. 어떤 것이 넷인가. 첫째는 굵고 가는 단식(摶食)이요, 둘째는 갱락식(更樂食)이요, 셋째는 의념식(疑念食)이요, 넷째는 식식(識食)이다.
현자여, 이 네 가지 음식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되는가.‘고 물어 보라.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법을 세운 자는 응당 대답하기를 ’여러분, 나는 단식에 대해서 만족하지도 않고 실망하지도 않으며, 의지하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않으며, 물 젖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 해탈을 얻고, 다 해탈하여 마음이 거꾸로 됨을 떠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 모양을 안다. 이와 같이 갱락식, 의념식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식식에 대해서도 만족하지도 않고 실망하지도 않으며, 의지하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않으며, 물 젖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 해탈을 얻고, 모두 해탈하여 마음이 거꾸로 됨을 떠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 모양을 안다.
여러분, 나는 이 네 가지 음식을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기 때문에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고 말할 것이다.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는 응당 이렇게 대답할 것이니 너희들은 그 말을 듣고 마땅히 그렇다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해야 하느니라.
그렇다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는 다시 그 비구에게 ‘현자여, 세존께서는 四설(設)을 말씀하시는데 어떤 것이 넷인가. 첫째는 견견설(見見設)이요, 둘째는 문문설(聞聞說)이요, 셋째는 식식설(識識說)이요, 넷째는 지지설(知知說)이다. 현자여, 이 四설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되는가.’고 물어 보라.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법을 세운 자는 응당 대답하기를 ‘여러분, 나는 견견설에 대해서 만족하지도 않고 실망하지도 않으며, 의지하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않으며, 물 젖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 해탈을 얻고, 모두 해탈하여 마음이 거꾸로 됨을 떠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 모양을 안다. 이와 같이 문문설, 식식설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지지설에 대해서도 만족하지도 않고 절망하지도 않으며, 의지하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않으며, 물 젖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 해탈을 얻고, 모두 해탈하여 마음이 거꾸로 됨을 떠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 모양을 안다. 나는 이 四설을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기 때문에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고 말할 것이다.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는, 응당 이렇게 대답할 것이니 너희들은 그 말을 듣고는, 마땅히 그렇다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여야 하느니라.
그렇다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는 다시 그 비구에게 ‘현자여, 세존께서는 눈의 곳, 귀의 곳, 코의 곳, 혀의 곳, 몸의 곳, 뜻의 곳 등의 이 안의 六처(處)를 말씀하신다. 현자여, 이 안의 六처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되는가.’고 물어 보라.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법을 세운 자면 응당 대답하기를 ‘여러분, 나는 눈과 눈의 식(識)에 대해서 눈의 식으로 아는 법을 함께 알아 두 법을 다 알아 마친다. 여러분, 만일 눈과 눈의 식과 눈의 식으로 아는 법의 즐거움이, 이미 다하여 그는 욕심이 없어 마음이 멸하고 쉬고 그치면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귀의 식, 코의 식, 혀의 식, 몸의 식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뜻과 뜻의 식에 대해서도 뜻의 식으로 아는 법을 함께 알아 두 법을 다 알아 마친다. 여러분, 만일 뜻과 뜻의 식에 있어서 뜻의 식이 아는 법의 즐거움이 이미 다하여 그는 욕심이 없어 마음이 멸하고 쉬고 그치면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없어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 여러분, 나는 안의 六처를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았기 때문에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고 말할 것이다.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는 응당 이렇게 대답할 것이니, 너희들은 그 말을 듣고는 마땅히 그렇다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여야 하느니라.
그렇다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는 다시 그 비구에게 ‘현자여, 세존께서는 땅 경계, 물 경계, 불 경계, 바람 경계, 허공 경계, 식(識) 경계등의 六계(界)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되는가.’고 물어 보라.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는 응당 대답하기를 ‘여러분, 나는 땅 경계를 내 소유라고 보지 않고, 나는 땅 경계의 소유도 아니며, 땅 경계는 신(神)도 아니다. 그런데 이른바 三수(受)는 땅 경계를 의지하여 머무르고 식(識)의 사자(使者)의 집착하는 곳이다. 그러나 거기에 욕심이 없어 마음이 멸하고 쉬고 그치면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물 경계, 불 경계, 바람 경계, 허공 경계도 또한 그러하며 식 경계는 내 소유가 아니요, 나는 식 경계의 소유도 아니며, 식 경계는 신도 아니다. 그런데 三수는 식 경계를 의지하여 머무르고 식의 사자의 집착하는 곳이다. 그러나 거기에 욕심이 없어 마음이 멸하고 쉬고 그치면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 여러분, 나는 이 六계를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기 때문에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고 말할 것이다.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는 응당 이렇게 대답할 것이니, 너희들은 그 말을 듣고는 마땅히 그렇다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여야 하느니라.
그렇다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는 다시 그 비구에게 ‘현자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이 안 몸이 함께 가지고 있는 식(識)과 또 바깥의 모든 모양과 일체의 나와 나의 지은 것과 또 교만의 번뇌를 끊고 그 뿌리채 뽑아 다시 나지 않게 하겠는가.’고 물어보라.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는 응당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러분, 내가 아직 집을 나와 도를 배우기 전에는 나고 죽고 병들고 싫어해서 이 큰 괴로움의 무더기를 끊고자 하였다.
여러분, 나는 그것을 싫어한 끝에 곧 이렇게 관찰하였다. 곧 집이란 지극히 비좁고 괴로운 곳이요, 집을 나가 도를 배우는 것은 시원하고 넓고 크다. 나는 지금 집에 있으면서 자물쇠에 잠기어 한 평생 범행을 깨끗이 닦을 수 없다. 나는 이제 적거나 많거나 재물을 버리고, 또 적거나 많거나 친척을 버리고,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집을 버리어 집이 없이 도를 배우자고. 여러분, 나는 그 뒤에 적거나 많거나 재물을 버리고, 적거나 많거나 친척을 버리고,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집을 버리어 집이 없이 도를 닦았다.
여러분, 나는 친척과 재물을 버리고 집을 나와 도를 배운 뒤에는 비구의 요긴한 학문을 받고, 금계(禁戒)를 닦아 익히며 종해탈을 지켜 보호하였다. 또 위의와 예절을 잘 지키고, 털끝 만한 죄를 보아도 언제나 두려워하였으며 학문의 요긴한 뜻을 받아 가지었다. 여러분, 나는 살생을 떠나고 살생을 끊었다. 그래서 칼이나 막대기를 버렸고,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남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하였으며,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어 일체 내지 곤충까지 이익 하게 하였으니, 나는 살생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또 나는 도둑질을 떠나고 도둑질을 끊었다. 그래서 남이 준 뒤에야 받고, 주는 것을 받기를 즐겨하였으며, 언제나 보시하기를 좋아하고 기뻐하여 아낌이 없었고, 그리고 그 갚음을 바라지 않았으니, 나는 도둑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범행이 아닌 것을 떠나고 범행이 아닌 것을 끊었다. 그래서 범행을 부지런히 닦고 묘한 행을 힘써 닦아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었고, 욕심을 떠나고 사음(邪婬)을 끊었으니, 나는 범행이 아닌 것에 있어서 깨끗이 내 마음을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거짓말을 떠나고 거짓말을 끊었다. 그래서 진실한 말을 하여 진실을 즐거워하고 진실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았으며, 일체를 믿어하고 세상을 속이지 않았으니, 나는 거짓말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이간질하는 말을 떠나고 이간질하는 말을 끊었다. 그래서 이간질하는 말로 남울 부수지 않았다. 여기서들은 말을 저기에 옮겨, 이것을 부수려 하지 않고, 저기서 들은 말을 여기에 옮겨, 저것에 부수려 하지 않았다. 갈리는 자는 모이게 하고 모이는 자는 기쁘게 하며 당파를 만들지 않고 당파를 즐기지 않으며 당파를 칭찬하지 않았으니, 나는 이간질하는 말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추한 말을 떠나고 추한 말을 끊었다. 만일 말하는 바 말씨가 추하고 거칠며 악한 음성이 귀에 거슬리면, 여럿이 좋아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아, 남을 괴롭게 하고 안정을 얻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끊었다. 만일 말하는 바가 맑고 화하며 부드럽고 번질하여 귀에도 순하고 마음에도 들면, 기뻐할 만하고 사랑할 만하여 남을 안락하게 하고, 말과 음성이 함께 분명하여 남을 두렵게 하지 않고 남을 안정하게 한다. 나는 이런 말을 하나니 나는 추한 말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꾸밈말을 떠나고 꾸밈말을 끊었다. 때에 맞는 말, 참말, 법다운 말, 이치에 맞는 말, 고요한 말, 고요한 것을 즐겨하는 말을 하고, 일이 때를 따라 적당함을 얻고, 잘 가르치고, 잘 꾸짖나니 나는 꾸밈말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살림살이를 떠나고 살림살이를 끊었다.
그래서 저울과 말[斗]과 섬을 버렸고, 또한 재물을 받지 않으며, 사람을 결박하지 않고, 말질 깎기를 바라지 않으며, 조그마한 이익으로 남을 속이지 않나니, 나는 살림살이에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과부나 처녀 받는 것을 떠나고, 과부나 처녀 받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과부나 처녀 받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종(奴) 받는 것을 떠나고, 종 받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종 받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코끼리, 말, 소, 염소 받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코끼리, 말, 소, 염소, 받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닭이나 돼지 받는 것을 떠나고, 닭이나 돼지 받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닭이나 돼지 받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농사나 상점 받는 것을 떠나고, 농사나 상점 받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농사나 상점 받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생벼, 보리, 콩 받는 것을 떠나고, 생벼, 보리, 콩 받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생벼, 보리, 콩 받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술을 떠나고, 술을 끊었으니, 나는 술 마시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높고 넓은 큰 평상 쓰는 것을 떠나고 높고 넓고 큰 평상 쓰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높고 넓고 큰 평상 쓰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화만(華鬘), 영락(榮樂), 바르는 향, 연지분 쓰는 것을 떠나고 나는 화만, 영락, 바르는 향, 연지분 쓰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화만, 영락, 바르는 향, 연지분 쓰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노래, 춤, 풍류와 그것을 보고 듣는 것을 떠나고 노래, 춤, 풍류와 그것을 보고 듣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노래, 춤, 풍류를 보고 듣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금, 은, 보배 받는 것을 떠나고 금, 은, 보배 받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금, 은, 보배 받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오후의 음식을 떠나고 오후의 음식을 끊고, 하루에 한 끼 먹으며, 밤이나 공부 때에는 먹지 않나니, 나는 오후의 음식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이미 이 거룩한 계(戒)의 몸을 성취하였다. 그리고 또 나는 만족한 줄을 안다. 옷은 다만 몸을 가리기 위해 가지고, 음식은 다만 몸을 기르기 위해 먹는다. 그래서 내가 가는 곳에는 옷과 바루가 저절로 따라 다시는 돌아보아 그리울 것이 없다. 마치 기러기가 두 날개를 가지고 공중을 나르는 것과 같나니 나도 또한 그와 같다. 여러분, 나는 이미 이 거룩한 계의 몸과 또 매우 만족할 줄 아는 것을 성취하였으며, 다시 모든 근(根)을 지켜 언제나 닫고 막기를 생각하고 밝게 통달하기를 생각하며, 그 생각하는 마음을 잘 지켜 보호하며 성취하게 되었다. 그래서 항상 생각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혹 눈으로 빛깔을 보더라도 그 모양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그 빛깔을 맛보지도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분내고 다투기 때문에 눈을 지켜 단속하여 마음속에 탐욕, 근심, 슬픔과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을 내지 않으며, 그리로 나아가기 위해 눈을 지켜 단속한 것이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함, 혹 뜻으로 법을 알더라도 그 모양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그 법을 맛보지도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분내고 다투기 때문에 뜻을 지켜 단속하여 마음속에 탐욕, 근심, 슬픔과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을 내지 않으며, 그리로 나아가기 위해 뜻을 지켜 단속한 것이다.
여러분, 나는 이 거룩한 계의 몸과 아주 만족할 줄 아는 것을 성취하고, 모든 근을 깨끗이 단속하고 바로 드나듦을 알아 관찰하고 분별하여, 굽히고 펴기와 구부리고 우러르기와 몸가짐을 바로 알고, 승가리(僧伽梨)와 여러 가지 옷을 바로 입고 바루를 바로 가지며, 다니고 서기와 앉고 눕기와 잠자고 깨기와 말하고 잠잠하기를 바로 알았다. 여러분, 나는 이미 이 거룩한 계의 몸과 매우 만족할 줄 아는 것을 성취하고 또한 거룩한 계를 성취하고 모든 근을 단속하고 바로 드나듦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일없는 곳에 있거나 혹은 나무 밑이나 비고 편안하고 고요한 곳이나 산 바위, 돌집, 한데 , 짚무더기로 가고 혹은 숲 속이나 혹은 화장터로 갔었다. 여러분, 나는 일없는 곳에 있거나 혹은 나무 밑이나 비고 편안하고 고요한 곳에 가서는 니시이다나를 펴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 바른 몸과 바른 소원으로 생각이 다른 데로 향하지 않았다. 탐욕을 끊어 없애고 마음에는 다툼이 없어남의 재물이나 모든 생활 도구를 보아도 탐욕을 일으키지 않아서 내 소유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으니, 나는 탐욕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이와 같이 성냄, 수면, 들뜨고 뉘우침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의심을 끊고 미혹을 없애 모든 착한 법에 대해서는 망설임이 없나니, 나는 의혹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버리었다. 여러분, 나는 이미 마음을 더럽히고 슬기를 약하게 하는 이 五개(蓋)를 끊고 욕심을 떠나고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을 떠나 내지 제사선(第四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닌다. 여러분, 나는 이미 이러한 고요한 마음을 얻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번거러움이 없고, 부드럽고 연하여 잘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번뇌가 다한 신통의 지혜로 나아가 스스로 징험을 얻었다.
여러분, 나는 이 괴로움의 참 모양을 알고 이 괴로움의 원인을 알며, 이 괴로움의 없어짐을 알고 이 괴로움을 없애는 길의 참 모양을 알았다. 또 이 번뇌의 참모양을 알고, 이 번뇌의 원인과 이 번뇌의 없어짐과 이 번뇌를 없애는 길의 참모양을 알았다. 나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았기 때문에 탐욕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생명의 번뇌와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해탈한 뒤에는 곧 해탈한 줄을 알아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모양을 알았다. 여러분, 나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았기 때문에 안 몸에 있는 식(識)과 바깥의 모든 모양과 일체의 나와 나의 지음과 또 교만을 끊고 뿌리채 뽑아 다시는 나지 않게 하였다고 말할 것이다.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는 응당 이렇게 대답할 것이니, 너희들은 그 말을 듣고는 마땅히 그렇다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여야 하느니라.
그렇다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는 다시 그 비구에게 ‘현자여, 현자가 처음에 말하였을 때에 우리는 이미 옳다 하고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현자에게서 높고 또 높으며 지혜로운 대답의 변재를 듣고자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현자에게 묻고 또 물은 것이다.’라고 말하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188. 아지타경[阿夷那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에 노닐으시면서 동원 녹자모(東園鹿子母) 강당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해질녘이 되어 고요한 자리에서 일어나 당(堂) 뒤에서 내려와서 당 그늘 한데서 거닐으시면서 모든 비구을 위해 매우 갖고 미묘한 법을 널리 설명하시었다. 그 때에 이교도(異敎徒)의 사문 판디타[變頭]의 제자 아지타[阿夷那]는 멀리서 세존께서 고요한 자리에서 일어나 당위에서 내려와서 당 그늘 한데서 거닐으시고 모든 비구들을 위해 매우 깊고 미묘한 법을 널리 설명하시는 것을 보았다. 이교도의 사문 판디타의 제자 아지타는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문안 드리고 부처님을 따라 거닐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돌아보시고 물으시었다.
“아지타여, 사문 판디타는 참으로 五백 가지 생각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고 다른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일체를 알고 일체를 보았으면 그는 스스로, 나는 남음이 없고 남음이 없음을 안다고 일컬으며, 그에게 허물이 있는 것을 보면 스스로 허물이 있다고 일컫는가.”
판디타의 제자 아지타는 대답하였다.
“고오타마여, 사문 판디타는 참으로 五백 가지 생각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일 다른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일체를 알고 일체를 보았으면 그는 스스로 나는 남음이 없고 남음이 없음을 안다고 일컬으며, 그에게 허물이 있는 것을 보면 스스로 허물이 있다고 일컫습니다.”
세존께서는 다시 물으시었다.
“아지타여, 어떻게 사문 판디타는 참으로 五백 가지 생각을 생각하는가. 그리고 만일 다른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일체를 알고 일체를 보았으면 그는 스스로 나는 남음이 없고 남음이 없는 것을 안다고 일컬으며, 그에게 허물이 있는 것을 보면 스스로 허물이 있다고 일컫는가.”
“고오타마시여, 사문 판디타는 이렇게 말합니다. ‘혹은 다니고 서며 앉고 누우며 혹은 잠자코 깨며 혹은 낮이나 밤이나 항상 걸림이 없어 알고 또 본다. 때로는 달리는 코끼리, 놓은 말, 달리는 수레, 반역한 군사, 달리는 남자, 달리는 여자를 만나고, 혹은 이런 길을 가다가 사나운 코끼리, 사나운 말, 사나운 소, 사나운 개를 만나며, 혹은 독사 떼를 만나고 던지는 흙덩이를 받으며, 혹은 때리는 막대기를 받으며, 개천에 떨어지거나 뒷간에 빠지며, 혹은 누운 소를 타거나 갚은 구덩이에 떨어지며, 혹은 가시밭 속에 들어가고 촌이나 읍을 보고 그 이름과 길을 물으며, 혹은 남자나 여자를 보고 그 성과 이름을 묻고, 혹은 빈집을 관찰하며, 이렇게 하여 나는 대중 속으로 들어오면’ 그들은 내게 묻기를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고 한다.
나는 그들에게 ‘여러분, 나는 나쁜 길로 간다’고. 사문 판디타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오타마시여, 사문 판디타는 이러한 종류의 五백 가지 생각을 생각하고, 만일 다른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일체를 알고 일체를 보았으면 그는 스스로 남음이 없고 남음이 없는 것을 안다고 일컬으며, 그의 허물이 있는 것을 봅니다.”
이에 세존께서는 거닐기를 그만 두시고 곧 거니는 길 머리로 가시어 니시이다나를 펴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 모든 비구들에게 물으시었다.
“비구들이여, 내가 말하는 지혜에 대한 일을 너희들은 받아 가졌느냐.”
모든 비구들은 잠자코 답이 없었다. 세존께서는 재삼 물으시었다.
“내가 말하는 지혜에 대한 일을 너희들은 받아 가졌느냐.”
모든 비구들도 또한 재삼 잠자코 답이 없었다. 그 때에 어떤 비구는 곧 자리에서 가사 한 자락을 벗어 메고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 때입니다. 선서시여,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 때입니다. 만일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지혜에 대한 일을 말씀하시면 모든 비구들은 그것을 듣고 잘 받아 가지겠나이다.”
이에 세존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비구들이여,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자세히 분별하여 말하리라.”
때에 비구들은 여쭈었다.
“예예, 분부대로 듣겠나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대개 두 가지 무리가 있다. 첫째는 법다운 무리요 둘째는 법답지 않은 무리다. 어떤 것을 법답지 않은 무리인가. 어떤 한 사람이 법답지 않은 일을 행하고 법답지 않은 법을 말하면, 그 무리들도 또한 법답지 않은 일을 행하고 법답지 않은 법을 말한다. 그 법답지 않은 사람은 법답지 않은 무리를 앞에서 자기가 이미 아는 것을 거짓으로 말하여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면서 나타내 보이고 분별하면서 그 행을 주장하고 널리 펴서 차례 차례로 법을 설명한다. 그러나 남의 잘못을 끊고자 하더라도 그것을 힐난(詰難)하여 말하지는 못한다. 이 바른 법 중에서는 칭찬할 수 없는 것인데, 스스로 자기의 아는 바를 저 법답지 않은 사람은 법답지 않은 무리 앞에서 스스로 나는 지혜가 있어 두루 안다고 일컫는다. 그 중에서 만일 지혜에 대한 일을 이렇게 말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을 법답지 않은 무리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법다운 무리인가. 혹 어떠한 사람이 법다운 일을 행하고 법다운 법을 말하면, 그 무리도 또한 법다운 일을 행하고 법다운 법을 말한다. 그 법다운 사람은 법다운 무리 앞에서 자기가 아는 것을 참으로 말하여 그것은 진실이다. 그래서 나타내어 보이고 분별하여 그 행을 주장하고 널리 펴 차례차례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남의 잘못을 끊고자 하면 힐난하여 곧 그것을 말할 수 있다. 이 바른 법 중에서 칭찬할 만하며, 자기가 아는 바를 세워 그 법다운 사람은 법다운 무리 앞에서 스스로 나는 지혜가 있어 두루 안다고 일컫는다. 이것을 법다운 무리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법과 법 아님과 이치와 이치 아님을 알아야 하고, 법과 법 아님과 이치와 이치 아님을 안 뒤에는 마땅히 법다움과 이치다움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가 고요히 앉으시었다. 이에 모든 비구들은 곧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마땅히 알라. 세존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법과 법 아님과 이치와 이치 아님을 알아야 하고, 법과 법 아님과 이치와 이치 아님을 안 뒤에는 마땅히 법다움과 이치다움을 배워야 하느니라.’고. 이렇게 그 뜻을 간략히 말씀하시어 널리 분별하시지 않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가 고요히 앉으시었다.”
그들은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누가 능히 아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널리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 아난은 부처님의 시자(侍者)로서 부처님의 뜻을 알고, 항상 부처님의 칭찬과 모든 지혜로운 범행인(梵行人)들의 칭찬을 받고 있다. 존자 아난은 능히 아까 부처님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널리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존자 아난에게 가서 이 뜻을 설명해 주기를 청하자. 그리고 만일 존자 아난이 우리를 위해 분별하거든 우리는 마땅히 잘 받아 가지자.”
이에 모든 비구들은 존자 아난에게 가서 서로 인사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아뢰었다.
“존자 아난이시여, 아까 세존께서는 ‘너희들은 마땅히 법과 법 아님과 이치와 이치 아님을 알아야 하고, 법과 법 아님과 이치와 이치 아님을 안 뒤에는 마땅히 법다움과 이치다움을 배워야 하느니라.’고 이렇게 그 뜻을 간략히 말씀하시어 널리 분별하시지 않으시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가 고요히 앉으시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누가 능히 아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널리 분별할 수 있겠는가’고.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존자 아난은 부처님의 시자로서 부처님의 뜻을 알고 항상 부처님의 칭찬과 모든 지혜로운 범행인들의 칭찬을 받고 있다. 존자 아난은 능히 아까 부처님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널리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원컨대 아난이시여, 우리들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어 그것을 널리 말씀해 주십시오.”
존자 아난은 말하였다.
“여러분, 내가 비유로 말하는 것을 들으시오.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를 들으면 그 뜻을 이해합니다. 여러분, 마치 어떤 사람이 나무심[樹心]을 얻기 위하여 도끼를 가지고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큰 나무 뿌리, 줄기, 마디, 가지, 잎, 꽃, 열매로 된 것을 보고 뿌리, 줄기, 마디, 열매는 건드리지 않고 다만 가지와 잎만을 건드리는 것과 같이 여러분의 말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세존께서 현재에 계시는데 그를 버리고 내게 와서 그 뜻을 묻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세존께서는 눈이시요 지혜이며, 이치시요 법이시며, 법의 주인이시요 법의 장수로서 진리의 뜻을 말씀하시고 일체 뜻을 나타내심은 오직 저 세존을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세존에게 나아가 이 뜻을 여쭈어 보시오. ‘세존이시여, 이것은 어떠하오며, 이것은 어떠한 뜻이옵니까’고.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여 주시거든 여러분들은 마땅히 잘 받아 가지시오.”
“그렇습니다, 존자 아난이시여. 세존께서는 눈이시요 지혜이시며, 이치이시요 법이시며, 법의 주인이시요 법의 장수로서 진리의 뜻을 말씀하시고 일체 뜻을 나타내심은 오직 저 세존을 말미암습니다. 그러나 존자 아난은 부처님의 시자로서 부처님의 뜻을 아시고, 항상 부처님의 뜻을 아시고, 항상 부처님의 칭찬과 모든 지혜로운 범행인들의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존자 아난만이 눙히 아까 저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뜻을 널리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존자 아난이시여, 우리들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그것을 널리 말씀해 주십시오.”
존자 아난은 모든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들은 다 내 말을 들으시오. 여러분, 사특한 소견은 법이 아니요 바른 소견은 이 법입니다. 만일 사특한 소견으로 말미암아 한량이 없이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을 내면 이것은 이치가 아니요, 만일 바른 소견으로 말미암아 한량이 없는 착한 법을 내면 이것은 바른 이치입니다. 여러분, 내지 사특한 지혜는 법이 아니요 바른 지혜는 이 법입니다. 만일 사특한 지혜로 말미암아 한량이 없는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을 내면 이것은 이치가 아니요, 만일 바른 지혜로 말미암아 한량이 없는 착한 법을 내면 이것은 바른 이치입니다.
여러분, 이른바 세존께서 ‘너희들은 마땅히 법과 법 아님과 이치와 이치 아님을 알아야 하고, 법과 법 아님과 이치와 이치 아님을 안 뒤에는 마땅히 법다움과 이치다움을 배워야 하느니라.’고 그 뜻을 간략히 말씀하시어 널리 분별하시지 않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가 고요히 앉으시었습니다. 이렇게 세존께서 그 뜻을 간략히 말씀하시어 널리 분별하지 않으신 것을 나는 이런 글로써 널리 분별하였습니다. 여러분, 부처님께 나아가 이 일을 갖추어 말씀 드리십시오.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신 그 뜻과 같거든 여러분들은 곧 받아 가지십시오.”
이에 모든 비구들은 존자 아난의 말을 들어 잘 받아 가져 외우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존자 아난을 세 번 돌고 떠났다. 그들은 부처님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 쪽에 앉아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아까 간략히 이 뜻을 말씀하시어 널리 분별하지 않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가 고요히 앉으셨나이다. 그러하온대 존자 아난이 이런 글귀와 이런 글로서 그것을 널리 설명하였나이다.”
세존께서는 들으시고 찬탄하시었다.
“착하고 착하다. 내 제자 중에서는 눈도 있고 지혜도 있으며 법도 있고 이치도 있구나. 무슨 까닭인가. 스승은 제자를 위하여 그 뜻을 간략히 말하고 널리 분별하지 않았는데 그 제자는 이런 글귀와 이런 글로써 그것을 널리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아난이 말한 바와 같이 너희들은 마땅히 그렇게 받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말과 관찰과 뜻이 응당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189. 성도경(聖道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구루수(拘樓瘦)의 검마슬담(劒摩瑟曇)이라는 구루(拘樓)의 서울에 노닐으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한 도(道)가 있으니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을 얻고 근심과 슬픔과 울음을 떠나고 걱정과 괴로움과 번민을 없애어 곧 법다움을 얻게 한다. 이른바 거룩한 바른 정(定)으로서 그것을 익히고 그것을 도우며 또한 그것을 준비하는 七지(支)가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바른 정에서는 익힘을 말하고 도움을 말하고 또한 갖춤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七지라 하는가. 바른 소견, 바른 뜻, 바른 말, 바른 업(業), 바른 명(命), 바른 방편, 바른 생각이다. 만일 이 七지의 익힘과 도움과 준비가 있어 잘 나아가 마음이 하나가 되게 회면 이것을 거룩한 바른 정이라 하며, 거기에는 익힘과 도움과 준비가 있어 잘 나아가 마음이 하나가 되게 되면 이것을 거룩한 바른 정이라 하며, 거기에는 익힘과 도움과 준비가 있다. 무슨 까닭인가. 바른 소견은 바른 뜻을 낳고 바른 뜻은 바른 말을 낳으며, 바른 말은 바른 업을 낳고 바른 업은 바른 명을 낳으며, 바른 명은 바른 방편을 낳고 바른 방편은 바른 생각을 낳는다. 현성(賢聖)의 제자는 이렇게 마음에 바른 정이 있어 갑자기 사음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다하고 현성의 제자는 이렇게 바른 마음이 해탈하여 갑자기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 모양을 아는 줄을 안다. 그 중에서 바른 소견이 가장 제일 앞에 있으니 만일 사특한 소견을 사특한 소견이라고 보면 이것은 바른 소견이요, 만일 바른 소견을 바른 소견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소견이다. 어떤 것을 사특한 소견이라 하는가. 이른바 이것은 보시도 없으며, 재(齋)도 없고 또한 주설(呪設)도 없으며, 선악의 업도 없고 선악의 악의 갚음도 없으며, 이승도 저승도 없고 아비도 어미도 없으며, 세상에는 참 사람이 있어 좋은 곳에 이르러 잘 가고 잘 향하여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징험하여 성취하여 노니는 것도 없다고 보나니 이것을 사특한 소견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소견이라 하는가. 이른바 이것은 보시도 있으며, 재도 있고 또한 주설도 있으며, 선악의 업도 있고 선악의 업의 갚음도 있으며, 이승도 저승도 있고 아비도 어미도 있으며, 세상에는 참 사람이 좋은 곳에 이르러 잘 가고 잘 향하여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징험하여 성취하여 노니는 것도 있다고 본다.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하나니, 이것을 사특한 소견을 사특한 소견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소견이요, 바른 소견을 바른 소견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소견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안 뒤에 곧 배우기를 구하고 사특한 소견을 끊어 바른 소견을 성취하려고 하나니 이것을 바른 방편이라 하고 비구가 사특한 소견을 끊고 바른 소견을 성취하려고 생각하면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 하나니, 이 三지는 바른 소견을 따르고 바른 소견의 방편을 따른다. 그러므로 바른 소견이 가장 앞에 있다고 하는 것이니라.
만일 사특한 뜻을 사특한 뜻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뜻이요, 만일 바른 뜻을 바른 뜻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뜻이다. 어떤 것을 사특한 뜻이라 하는가. 탐욕이 있는 생각, 성냄이 있는 생각, 해침이 있는 생각이니 이것을 사특한 뜻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뜻이라 하는가. 탐욕이 없는 생각, 성냄이 없는 생각, 해침이 없는 생각이다 .이것을 바른 뜻이라 하나니, 이것을 사특한 뜻을 사특한 뜻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뜻이요, 바른 뜻을 바른 뜻이라 보면 이것도 도한 바른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안 뒤에는 곧 배우기를 구하고 사특한 뜻을 끊어 바른 뜻을 성취하려고 하나니, 이것을 바른 방편이라 하고 비구가 사특한 뜻을 끊고 바른 뜻을 성취하려고 생각하면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 한다. 이 三지는 바른 뜻을 따르고 바른 소견의 방편을 따르나니, 그러므로 바른 소견이 가장 앞에 있다고 하는 것이니라.
만일 사특한 말을 사특한 말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말이요, 만일 바른 말을 바른 말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말이다. 어떤 것을 사특한 말이라 하는가. 거짓말, 이간하는 말, 추한 말, 꾸밈말이니 이것을 사특한 말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말이라 하는가. 거짓말, 이간하는 말, 추한 말, 꾸밈말을 떠난 말이다. 이것을 바른 말이라 하나니, 만일 사특한 말을 사특한 말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말이요, 바른 말을 바른 말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말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만일 안 뒤에는 곧 배우기를 구하고 사특한 말을 끊어 바른 말을 성취하려고 하나니 이것을 바른 방편이라 하고, 비구가 사특한 말을 끊고 바른 말을 성취하려고 하면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 하나니, 이 三지는 바른 말을 따르고 바른 소견의 방편을 따르나니, 그러므로 바른 소견이 가장 앞에 있다고 하느니라.
만일 사특한 업을 사특한 업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업이요, 만일 바른 업을 바른 업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업이라 한다. 어떤 것이 사특한 업인가. 살생, 도둑질, 사음이니 이것을 사특한 업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업이라 하는가. 살생, 도둑질, 사음을 떠난 업이다. 이것을 바른 업이라 하나니, 만일 사특한 업을 사특한 업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업이요, 바른 업을 바른 업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안 뒤에는 곧 배우기를 구하고 사특한 업을 끊어 바른 업을 성취하려고 하면 이것을 바른 방편이라 하고, 비구가 사특한 업을 끊고 바른 업을 성취하려고 생각하면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 한다. 이 三지는 바른 업을 따르고 바른 소견의 방편을 따르나니 그러므로 바른 소견이 가장 앞에 있느니라.
만일 사특한 명(命)을 사특한 명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명이요, 만일 바른 명을 바른 명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명이다. 어떤 것을 사특한 명이라 하는가. 만일 구하는 것이 있어 뜻에 차지 않으면 여러 가지 축생(丑生)의 주문으로써 사특한 명을 존속해 간다. 그는 법답지 않아서 법이 아닌 것으로써 의복을 구하고 그는 법답지 않아서 법이 아닌 것으로서 음식, 평상, 탕약과 모든 생활 도구를 구하나니 이것을 사특한 명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명이라 하는가. 만일 구하지도 않고 구하는 것이 뜻에 차지 않더라도 여러 가지 축생의 주문을 써서 사특한 명을 존속해 가지 않는다. 그는 법다와서 법으로써 의복을 구하고, 그는 법다와서 법으로써 음식, 평상, 탕약과 여러 가지 생활 도구를 구한다. 이것을 바른 명이라 하나니 이것을 사특한 명을, 사특한 명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명이요, 바른 명을 바른 명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명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안 뒤에는 곧 배우기를 구하고 사특한 명을 끊어, 바른 명을 성취하려고 하면 이것을 바른 방편이라 하고, 비구가 사특한 명을 끊고 바른 명을 성취하려고 하면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 한다. 이 三지는 바른 명을 따르고 바른 소견의 방편을 따르나니, 그러므로 바른 소견이 가장 앞에 있느니라.
어떤 것을 바른 방편이라 하는가. 비구는 이미 생긴 나쁜 법은 끊으려고 하기 때문에 서둘러 방편을 구해 정근하고 마음을 다해 그것을 없애고, 아직 생기지 않은 나쁜 법은 생기지 않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서둘러 방편을 구해 정근하고, 마음을 다해 그것을 생기지 않게 하며,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은 생기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서둘러 방편을 구해 정근하고 마음을 다해 그것을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착한 법은 그대로 있어, 잊지 않고 물러나지 않으며, 더 자라고 널리 퍼지며 닦아 익히고 원만히 갖춰지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서둘러 방편을 구해 정근하고 마음을 다해 머무르게 하나니, 이것을 바른 방편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바른 생각[念]이라 하는가.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다이하고, 내지 감각, 마음, 법을 관찰하기를 감각, 마음, 법다이 하나니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바른 정(定)이라 하는가. 비구는 욕심을 떠나고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을 떠나 내지 제사선(第四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바른 정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바른 해탈이라 하는가. 욕심 내는 마음이 해탈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이 해탈하나니, 이것을 바른 해탈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바른 지혜라 하는가. 비구는 욕심 내는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아나니, 이것을 바른 지혜라 하느니라.
다시 이것을 유학자(有學者)의 八지(支)의 성취라 하고, 번뇌가 다한 아라한의 十지의 성취라 한다.
어떤 것을 유학자의 八지의 성취라 하는가. 바른 소견을 배우고 내지 바른 정을 배우나니, 이것을 유학자의 八지의 성취라 한다. 어떤 것을 번뇌가 다한 아라한의 十지의 성취라 하는가. 바른 소견을 배울 것이 없고 내지 바른 지혜를 배울 것이 없나니, 이것을 번뇌가 다한 아라한의 十지의 성취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바른 소견을 사특한 소견을 끊나니, 만일 사특한 소견으로 인하여 한량이 없이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이 생기면 그는 그것도 또한 끊고, 만일 바른 소견으로 인하여 한량이 없는 착한 법이 생기면 그는 곧 그것을 닦아 익히어 가득 차고 구족하게 한다. 그리고 나가서는 바른 지혜는 사특한 지혜를 끊나니, 만일 사특한 지혜로 인하여 한량이 없이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이 생기면 그는 또한 그것을 끊고, 만일 바른 지혜로 인하여 한량이 없는 착한 법이 생기면 그는 곧 그것을 닦아 익히어 가득 차고 구족하게 하나니, 이것을 二十선품(善品)과 二十불선품(不善品) 곧, 四十 대법품(大法品)으로서 범륜(梵輪)을 굴리면 어떤 사문, 바라문, 하늘, 악마, 범천 및 그 밖의 세상도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면서 그르다고 말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내가 말하는 四十 대법품이 범륜을 굴리면 사문, 바라문, 하늘, 악마, 범천 및 그 밖의 세상이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면서 그르다고 말하면 그는 법다움에 있어서 열 가지 꾸지람이 있다. 어떤 것이 열 가지 꾸지람인가. 혹 바른 소견을 헐뜯고 사특한 소견을 칭찬하거나, 혹은 사특한 소견을 가진 사문이나 바라문을 공양하거나 칭찬하는 것이요,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내가 말하는 四十 대법품이 범륜을 굴리면 사문, 바라문, 하늘, 악마, 범천 및 그 밖의 세상이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면서 그르다고 말하면 그것은 법다움에 있어 제일의 꾸지람이 있느니라.
만일 더 나아가서 바른 지혜를 헐뜯고 사특한 지혜를 칭찬하거나, 만일 사특한 지혜를 가진 사문이라 바라문을 공양하거나 칭찬하며,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내가 말하는 四十대법이 범륜을 굴리면 사문, 바라문, 하늘, 악마, 범천 및 그 밖의 세상이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면서 그르다고 말하면 그것은 법다움에 있어서 제 十의 꾸지람이 되느니라.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내가 말하는 四十 대법품이 범륜을 굴리면 사문, 바라문, 하늘, 악마, 범천 및 그 밖의 세상이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면서 그르다고 말하면 그것은 법다움에 있어서 제 十의 꾸지람이 되느니라. 만일 다시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걸터앉아서 걸터앉은 것을 말하고, 아무 것도 없으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말하여, 원인이 없다고 말하고 지음이 없다고 말하여, 이른바 그러그러히 지은 바 선악의 주장과 저것과 이것의 구별을 끊고 부수며 내가 말한 四十 대법품이 범륜을 굴려 사문, 바라문, 하늘, 악마, 범천 및 그 밖의 세상이 그것을 제어하여 그르다고 말하는 자가 없으면 그도 또한 꾸지람과 근심과 두려움이 있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190. 소공경(小空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에 노닐으시면서 동원 녹자모 강당에 계시었다. 그 때에 존자 아난은 해질녘이 되어 고요한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나아가 그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나 한 쪽에 앉아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어느 때 석도읍(釋都邑)이라고 하는 석족(釋族)의 성에서 노닐으셨나이다. 저는 그 때에 세존에게서 이러한 이치를 말씀하시는 것을 듣자왔나이다. 곧 ‘아난아, 나는 <공(空)>을 많이 행한다’고. 세존의 그 말씀을 제가 잘 알고 잘 받아 가진다고 하겠나이까.”
세존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너는 그 때의 내 말을 진실로 잘 알고 잘 받아 가진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그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공>을 많이 행하였다. 아난아, 이 녹자모 강당은 비어서 코끼리, 말, 소, 염소, 재물, 미곡, 종[女婢]들이 없다. 그런데 비지 않은 것이 있으니 오직 비구들이 있다. 아난아, 만일 그 가운데 그것이 없다면 그 때문에 나는 이것을 <공>이라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나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니 아난아, 이것을 진실한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아난아, 비구로서 만일 <공>을 많이 행하려고 한다면 그 비구는 마을이란 생각[想]을 생각[念]하지 말고, 사람이란 생각을 생각하지 말며, 한 일이 없는 곳 <숲>이란 생각을 자꾸 생각하라. 그는 이렇게 알아 마을이란 생각을 비우고, 사람이란 생각을 비운다. 그러나 오직 한 일이 없는 곳이라는 생각의 비지 않은 것이 있다. 혹 어떤 피로는 마을생각 때문에 있지마는 나는 그것이 없고, 혹 어떤 피로는 사람이란 생각 때문에 있지마는 나는 그것도 없다. 오직 어떤 피로가 한 일이 없는 곳이라는 생가가 때문에 있지마는 만일 그것이 그 가운데 없다면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이라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니 아난아, 이것을 진실한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니라.
다시 아난아, 비구로서 만일 <공>을 많이 행하려고 한다면 그 비구는 사람이란 생각도 생각하지 말고, 일이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생각하지도 말고, 마땅히 한 땅이라는 생각만을 자꾸 생각하라. 그 비구는 혹 이 땅이 높고 낮음이 있고 뱀 떼가 있으며, 가시덤불이 있고, 모래가 있으며, 돌산이 험하고 깊은 물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을 생각하지 말라. 만일 이 땅이 편편하기 손바닥 같고 바라보는 것이 좋은 것을 보거든 마땅히 그것을 자꾸 생각하라.
아난아, 마치 소가죽을 백 개 못으로 펴 바른 때에 잔뜩 펴 바르면 주름살도 없고 오그러들지도 않는 것과 같다. 만일 이 땅이 높고 낮음이 있고 뱀 떼가 있으며, 가시덤불이 있고 모래가 있으며, 돌산이 험하고 깊은 물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은 생각하지 말라. 만일 이 땅이 편편하기 손바닥 같고, 바라보는 곳이 좋은 것을 보거든 마땅히 그것을 자꾸 생각하라. 그는 이렇게 알아 사람이란 생각도 비우고 일없는 곳이라는 생각도 비운다. 그러나 오직 한 땅이라는 생각의 비지 않은 것이 있다. 혹 어떤 피로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있지마는 나는 그것이 없고, 혹 어떤 피로는 일이 없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있지마는 나는 그것도 없다. 오직 어떤 피고가 한 땅이라는 생각 때문에 있지마는 만일 그것이 그 가운데 없다면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이라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니 아난아, 이것을 진실한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니라.
다시 아난아, 비구가 만일 <공>을 많이 행하려고 한다면 그 비구는 일이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생각하지도 말고, 땅이라는 생각도 생각하지도 말고, 마땅히 한 한량이 없는 빈곳이라는 생각을 자꾸 생각하라. 그는 이렇게 알아 일이 없는 곳이라는 생각도 비우고 땅이라는 생각도 비운다. 그러나 오직 한 한량이 없는 허공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의 비지 않은 것이 있다. 혹 어떤 피로는 일이 없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있지마는 나는 그것이 없고, 혹 어떤 피로는 땅이라는 생가가 때문에 있지마는 나는 그것도 없다. 오직 어떤 피로는 한 한량이 없는 허공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있지마는, 만일 그 가운데 그것이 없으면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이라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니 아난아, 이것을 진실한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니라.
다시 아난아, 비구가 만일 <공>을 많이 행하려고 한다면 그 비구는 땅이라는 생각도 생각하지 말고, 한량이 없는 허공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도 생각하지 말고, 마땅히 한량이 없는 식(識)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자꾸 생각하라. 그는 이렇게 알아 땅이라는 생각도 비우고, 한량이 없는 빈곳이라는 생각도 비운다. 그러나 오직 한 한량이 없는 식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의 비지 않은 것이 있다. 혹 어떤 피로는 땅이라는 생각 때문에 있지마는 나는 그것이 없고, 혹 어떤 피로는 한량이 없는 허공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있지마는 나는 그것도 없다. 오직 어떤 피로는 한 한량이 없는 식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있지마는 만일 그 가운데 그것이 없으면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이라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니 아난아, 이것을 진실한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니라.
다시 아난아, 비구가 만일 <공>을 많이 행하려고 한다면 그 비구는 한량이 없는 허공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도 생각하지 말고, 한량이 없는 식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도 생각하지 말고, 마땅히 한 아무 것도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자꾸 생각하라. 그는 이렇게 알아 한량이 없는 허공 있는 곳이라는 생각도 비우고, 한량이 없는 식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도 비운다. 그러나 오직 한 아무 것도 없는 곳이라는 생각의 비지 않은 것이 있다. 혹 어떤 피로는 한량이 없는 허공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있지마는 나는 그것이 없고, 혹 어떤 피로는 한량이 없는 식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있지마는, 나는 그것도 없고, 오직 어떤 피로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있지마는, 만일 그 가운데 그것이 없으면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이라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니 아난아, 이것을 진실한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니라.
다시 아난아, 비구가 만일 <공>을 많이 행하려고 한다면 그 비구는 한량이 없는 식만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생각하지 말고, 한량이 없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라는 생각도 생각하지 말고, 마땅히 한량이 없는 한 생각이 있는 마음의 정(定)을 자꾸 생각하라. 그는 이렇게 알아 한량이 없는 식만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비우고, 아무 것도 없는 곳이라는 생각도 비운다. 그러나 오직 한 생각이 없는 남음의 정의 비지 않은 것이 있다. 혹 어떤 피로는 한량이 없는 식만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있지마는 나는 그것이 없고, 혹 어떤 피로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있지마는 나는 그것도 없고, 오직 어떤 피로는 한 생각이 없는 정 때문에 있지마는, 만일 그 가운데 그것이 없으면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다른 것이 있으면 그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다. 아난아, 이것을 진실한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니라.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곧 ‘나는 본래부터 생각이 있는 마음의 정이 있어서 본래부터 행한 것이요, 본래부터 생각한 것이다. 만일 본래부터 행한 것이요, 본래부터 생각한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즐겨할 것도 없고 그것을 찾을 것도 없으며, 거기에 머무를 것도 없다’고. 그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 탐욕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생명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해탈한 뒤에는 곧 해탈한 줄을 알아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 모양을 안다.
그는 이렇게 알아 탐욕의 번뇌를 비우고 생명의 번뇌를 비우고 무명의 번뇌를 비운다. 그러나 오직 이 내 몸의 六처(處)로서 있는 생명의 비지 않은 것이 있다. 혹 어떤 피로는 탐욕의 번뇌 때문에 있지마는 나는 그것이 없고, 혹 어떤 피로는 생명의 번뇌 때문에 있지마는 나는 그것도 없고, 오직 어떤 피로가 이 내 몸의 六처로 있는 생명 때문에 있지마는 만일 그 가운데 그것이 없으면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이라 볼 것이다. 만일 거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니 아난아, 이것을 진실로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번뇌가 다하여 번뇌가 없어져 하염없는 마음이 해탈하였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과거의 모든 여래, 무소착, 등정각도 모두 이 진실한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으니 무슨 까닭인가. 번뇌가 다하여 번뇌가 없어지고, 하염없는 마음이 해탈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난아, 미래의 모든 여래, 무소착, 등정각도 모두 이 진실한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을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번뇌가 다하여 번뇌가 없어지고, 하염없는 마음이 해탈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난아, 지금 현재의 나 여래, 무소착, 등정각도 또한 이 진실한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나니 무슨 까닭인가. 번뇌가 다하여 번뇌가 없어지고 하염없는 마음이 해탈하였기 때문이니 아난아, 너는 마땅히 이렇게 배워야 한다. 나도 또한 이 진실한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나니 무슨 까닭인가. 번뇌가 다하여 번뇌가 없어지고, 하염없는 마음이 해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도 마땅히 이렇게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존자 아난과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191. 대공경(大空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샤아캬족이 사는 카필라바스투[迦維羅衛]에 노닐으시면서 니그로오다[尼拘樓]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밤을 지내고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바루를 가지고 카필라바스투성에 들어가 걸식하시었다. 걸식을 마치시고 오후가 되어 카아알라케마캇사[加羅差摩釋] 절에 가시었다. 그 때에 카아알라케마캇사절에는 많은 평상자리를 펴고 많은 비구들이 거기 머물러 있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 카아알라케마캇사절에서 나와 다시 가타아야스캇사[加羅釋] 절로 가시었다. 그 때에 존자 아난은 많은 비구들과 함께 가타아야스캇사 절에 있으면서 가사를 만들고 있었다. 존자 아난은 멀리서 부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마중을 나가 부처님의 가사와 바루를 받잡고 돌아와 자리를 펴고, 물을 길어다 부처님 발을 씻어 드렸다. 부처님께서는 발을 씻으시고 가타아야스캇사 절에서 존자 아난이 펴놓은 자리에 앉으시어 말씀하시었다.
“아난아, 카아알라케마캇사절에는 많은 평상 자리를 펴고 많은 비구들이 거기 머물러 있었다.”
존자 아난은 여쭈었다.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카아알라케마캇사절에는 많은 평상자리를 펴고 많은 비구들이 거기 머물러 있나이다. 왜 그러냐 하오면, 저희들은 지금 가사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시었다.
“비구는 떠들기를 좋아하거나 떠들기를 즐겨하거나 떠드는 자리에 모이지 않아야 하고, 여럿을 좋아하거나 여럿을 즐겨하거나 여럿이 모이지 않아야 하며, 여럿을 떠나 멀리 떠난 곳에서 혼자 있기를 즐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어떤 비구가 떠들기를 좋아하며 떠들기를 즐겨하고 떠드는 자리에 모여, 여럿을 떠나려 하지 않고 멀리 떠나 혼자 있는 곳을 즐겨하지 않으면, 그는 이른바 생명의 즐거움, 거룩한 즐거움, 욕심이 없는 즐거움, 떠난 즐거움, 쉬는 즐거움, 바르게 깨닫는 즐거움, 먹음이 없는 즐거움, 나고 죽음이 아닌 즐거움, 이러한 즐거움을 쉽게 얻으려 하더라도 끝내 그리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어떤 비구가 떠들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떠들기를 즐겨하지 않고 떠드는 자리에 모이지 않으며, 여럿을 좋아하지 않고 여럿을 즐겨하지 않으며 여럿과 모이지 않고, 여럿을 떠나기를 좋아하고 항상 멀리 떠난 곳에서 혼자 있기를 즐겨하면, 그는 이른바 생명의 즐거움, 거룩한 즐거움, 욕심이 없는 즐거움, 떠나는 즐거움, 쉬는 즐거움, 바르게 깨닫는 즐거움, 먹음이 없는 즐거움, 나고 죽음이 아닌 즐거움, 이러한 즐거움을 쉽게 얻으려 하는 것은 반드시 그리 될 수 있느니라.
아난아, 비구는 떠들기를 좋아하거나 떠들기를 즐겨하거나 떠드는 자리에 모이지 않아야 하고, 여럿을 좋아하거나 여럿을 즐겨하거나 여럿과 모이지 않아야 하며, 여럿을 떠나기를 좋아하고, 멀리 떠난 곳에서 혼자 있기를 즐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어떤 비구가 떠들기를 좋아하며, 떠들기를 즐겨하고 떠드는 자리에 모이며 여럿을 떠나려 하지 않고 멀리 떠난 곳에서 혼자 있기를 즐겨하지 않으면, 그는 잠깐 동안의 즐거운 마음의 해탈이나,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으려 하더라도 끝내 그리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어떤 비구가 떠들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떠들기를 즐겨하지 않고 떠드는 자리에 모이지 않고 여럿을 좋아하지 않으며, 여럿을 즐겨하지 않고 여럿과 모이지 않으며, 여럿을 떠나 항상 멀리 떠난 곳에서 혼자 있기를 즐겨하면, 그는 잠시나마 즐거운 마음의 해탈이나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으려 하는 것은 반드시 그리 될 수 있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나는 어떠한 한 빛깔도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빛깔은 무너지고 변하여 다른 때에는 반드시 슬픔, 울음, 근심, 괴로움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나는 또 다른 사는 곳을 관찰하여 바르게 깨닫고 모두 깨달았나니, 이른바 일체의 빛깔이라는 생각을 지나서 바깥의 허공을 관찰한다.
아난아, 나는 이 사는 곳을 관한 뒤에 기쁨이 생기고 이 기쁨을 모두 깨닫고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로서 기쁨이 생기고 고요함이 생기고 즐거움이 생기고 정(定)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이 정을 전부 몸에 깨닫고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가 되었다. 아난아, 혹 어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함께 내게 오면, 나는 곧 그들을 위하여 이렇게 마음이 멀리 떠나 욕심이 없음을 즐기는 것을 관찰하고 다시 그들을 위하여 이 법을 설명하여 그들에게 권하고 돕는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많이 공<(空)>을 관찰하려 한다면 그 비구는 마땅히 마음을 꼭 가지고 거기에 머물러 일정(一定)하게 하여야 하고 마음의 <공>을 생각하여야 한다. 만일 비구가 ‘나는 마음을 꼭 가져 거기에 머무르지 않아 일정하게 하지 않게 하고, 마음의 <공>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 비구는 스스로 크게 피로하여야 할 것이다.
아난아, 비구는 어떻게 마음을 꼭 가지고 거기에 머물러 일정하게 하는가. 비구는 욕계의 악을 떠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그 몸이 모두 잠기어 붐고, 두루 잠기어 충만하고, 욕계의 악을 떠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다. 아난아, 마치 사람이 목욕하는 그릇에 가루비누를 담고 거기에 물을 부어 환(丸)을 만들면 가루가 모두 잠기어 붐고, 두루 잠기어 충만하고, 안팎이 단단해 새는 곳이 없는 것과 같이, 비구도 욕계의 악을 떠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그 몸이 모두 잠기어 붐고, 모두 잠기어 충만하여, 욕계의 악을 떠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느니라.
아난아, 비구는 이와 같이 마음을 꼭 가지고 거기에 머물러 일정하게 한다. 그는 마음을 꼭 가지고 거기에 머물러 일정하게 한 뒤에는 마땅히 마음의 <공>을 생각하여야 하고, 마음의 <공>을 생각한 뒤에는 그 마음이 옮겨도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고 청정하지도 않으며 머무르지도 않아, 마음의 <공>을 알지 못한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관찰할 때에 마음의 <공>을 생각하지 않아 그 마음이 옮겨도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고 청정하지도 않으며 머무르지도 않아, 마음의 <공>을 알지 못하면, 그 비구는 마땅히 바깥의 <공>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가 바깥 <공>을 생각한 뒤에는 그 마음이 옮겨도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고 청정하지도 않으며 머무르지도 않아, 바깥의 <공>을 알지 못한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관찰할 때에 바깥의 <공>을 생각하지 않아 그 마음이 옮겨도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고 청정하지도 않으며 머무르지도 않아 바깥의 <공>을 알지 못하면, 그 비구는 마땅히 마음의 <공>과 바깥의 <공>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는 안팎의 <공>을 생각한 뒤에는 그 마음이 옮겨도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고 청정하지도 않으며 머무르지도 않아, 안팎의 <공>을 알지 못하느니라.
아난아, 만일 비구가 관찰할 때에 안팎의 <공>을 생각하지 않아 그 마음이 옮겨도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고 청정하지도 않으며 머무르지도 않아 안팎의 <공>을 알지 못하면, 그 비구는 마땅히 이동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는 이동하지 않는 것을 생각한 뒤에는 그 마음이 옮겨도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고 청정하지도 않으며 머무르지도 않아, 이동하지 않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아난아, 만일 비구가 관찰할 때에 이동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 그 마음이 옮겨도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고 청정하지도 않으며 머무르지도 않아서 이동하지 않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 비구의 그러그러한 마음은 그러그러한 정(定)에 있어서 다루고 또 다루고, 익히고 또 익히며, 연하고 또 연하여 좋고 유쾌하고 부드럽고 화하여 멀리 떠난 것을 거두어 즐겨한다. 만일 그러그러한 마음이 그러그러한 정에 있어서 다루고 또 다루고, 익히고 또 익히며, 연하고 또 연하여, 좋고 유쾌하고 부드럽고 화하여 멀리 떠난 것을 거두어 즐겨해 마치면, 마땅히 마음의 <공>을 성취하여 노닐어야 하고, 마음의 <공>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이동하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마음의 <공>을 아느니라.
아난아, 이와 같이 비구가 관찰할 때에 마음의 <공>을 알아 성취하여 노닐고 마음이 이동하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마음의 <공>을 알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한다. 아난아, 비구는 마땅히 바깥의 <공>을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그는 바깥의 <공>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이동하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바깥의 <공>을 안다.
아난아, 이와 같이 비구가 관찰할 때에 바깥의 <공>을 알아 성취하여 노닐고, 마음이 이동하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바깥의 <공>을 알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한다. 아난아, 비구는 마땅히 안팎의 <공>을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그가 안팎의 <공>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이동하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안팎의 <공>을 안다. 아난아, 이와 같이 비구가 관찰할 때에 안팎의 <공>을 알아 성취하여 노닐고, 마음이 이동하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안팎의 <공>을 알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마땅히 이동하지 않음을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그는 이동하지 않음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이동하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이동하지 않는 줄을 안다. 아난아, 이와 같이 비구가 관찰할 때에 이동하지 않은 줄을 알아 성취하여 노닐고, 마음이 이동하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이동하지 않음을 알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한다.
아난아, 그 비구가 이 사는 곳을 관찰하여 만일 그 마음이 거닐고자 하면, 그 비구는 선실(禪室)에서 나와 선실 그림자 밑에 있는 한데서 거닐고, 모든 근(根)이 안에 있어서 마음이 밖으로 향하지 않아 뒤에도 앞의 생각을 계속한다. 이와 같이 거닌 뒤에는 마음속에 탐욕과 슬픔과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이 생기지 않으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그 비구가 이 사는 곳을 관찰하여 만일 그 마음이 앉아서 정(定)하려고 하면, 그 비구는 거닐기를 버리고 거니는 길 머리로 가서 니시이다나를 펴고 가부를 맺고 앉는다. 이와 같이 앉아서 정한 뒤에 탐욕과 슬픔과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이 생기지 않으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한다. 아난아, 그 비구가 이 사는 곳을 관찰하고 만일 그 마음이 무엇을 생각하고자 하면, 욕심, 성냄, 해침의 이 세 가지 악해서 착하지 않은 생각은 생각하지 말고, 욕심이 없고 성냄이 없으며 해침이 없는 이 세 가지 착한 생각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뒤에 마음속에 탐욕과 슬픔과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이 생기지 않으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한다. 아난아, 그 비구가 이 사는 곳을 관찰하고 그 마음이 만일 무엇을 말하고자 하면 그 비구는 거룩하지 않은 이야기로서 이치와 서로 응하지 않는 이른바 왕론(王論), 적론(賊論), 투쟁론(鬪爭論), 음식론(飮食論), 의복론(衣服論), 부인론(婦人論), 동녀론(童女論), 음녀론(婬女論), 세간론(世間論), 사도론(邪道論), 해중론(海中論)과 같은 이러한 여러 가지 축생론(丑生論)은 이야기하지 말고, 거룩한 이야기로서 이치와 서로 응하여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모든 음개(陰蓋)가 없는 이른바 시론(施論), 계론(戒論), 정론(定論), 혜론(慧論), 해탈론(解脫論), 해탈지견론(解脫知見論), 점손론(漸損論), 불탐론(不貪論), 소욕론(小欲論), 지족론(知足論), 무욕론(無欲論), 단멸론(斷滅論), 연좌론(燕坐論), 연기론(緣起論)과 같은 이러한 사문의 이야기를 이야기하여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한 뒤에 마음속에 탐욕과 슬픔과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이 생기지 않으면 이것은 바른 앎이라 하느니라.
다시 아난아, 五욕(欲)의 공덕이 있어 즐거워할 만하고 마음으로 생각할 만한 사랑스러운 물건으로서, 탐욕과 서로 응한다. 곧 눈으로 빛깔을 알고 귀로 소리를 알며, 코로 냄새를 알고 혀로 맛을 알며, 몸으로 닿음을 아는 것이요, 혹은 마음이 거기에 이르러 이 五욕의 공덕을 관찰하고 그 공덕을 따라 마음속으로 행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무슨 까닭인가. 이 五욕의 공덕은 앞도 없고 뒤도 없어, 그 五욕의 공덕을 따라 마음속으로 행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관찰할 때에 이 五욕의 공덕을 알고 이 五욕의 공덕을 따라 마음속으로 행하는 것도 또한 그러한 줄을 알면, 그 비구는 그러그러한 五욕의 공덕은 항상됨이 없다고 관찰하고 쇠해서 없어지는 것이라 관찰하며, 욕심낼 것이 없다고 관찰하고 쇠해서 없어지는 것이라 관찰하며, 욕심낼 것이 없다고 관찰하고 끊어 멸할 것이라 관찰하며, 끊어 버리고 떠날 것이라 관찰하여, 만일 이 五욕의 공덕에 욕심이 생기고 물듦이 있으면, 그는 곧 그것을 멸해 버린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이렇게 관찰할 때에 이 五욕의 공덕에 탐욕이 있고 물듦이 있는 줄 알면 그는 이미 끊었을 것이니,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하느니라.
다시 아난아, 다섯 가지 왕성한 음(陰)이 있으니 색(色)이 왕성한 음과 각(覺), 상(想), 행(行), 식(識)의 왕성한 음이다. 이른바 비구는 이와 같이 흥하고 쇠함을 관찰하여 ‘이것은 색이요, 이것은 색의 원인이요, 이것은 색의 멸이다. 이것은 각이요 각의 원인이요 각의 멸이다. 이것은 상이요 상의 원인이요 상의 멸이다. 이것은 행이요 행의 원인이요 행의 멸이다. 이것은 식이요 식의 원인이요, 식의 멸이다.’라고 말한다. 만일 이 다섯 가지 왕성한 음에 잘난 체하는 교만이 있으면 그는 곧 그것을 없앤다. 아난아, 만일 어떤 비구가 이와 같이 관찰할 때에 다섯 가지 음 중에서 아만이 이미 없어진 줄을 알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이 법은 한결같이 옳고 한결같이 즐거우며 한결같이 생각해야 할 것으로서, 번뇌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악마도 이르지 못하고 악도 이르지 못하며, 모든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의 더러움과 미래의 생명의 근본과 번거럽고 뜨거운 괴로움의 갚음과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원인이 되는 것도 또한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니, 이른바 이 방일하지 않음을 성취한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 방일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모든 여래, 무소착, 등정각은 깨달음을 얻었고, 방일하지 않는 뿌리로 인하여 한량이 없는 착한 법이 나고, 혹은 도(道)를 따르는 품(品)이 있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마땅히 ‘나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을 성취하리라.’고 이렇게 배워야 한다. 아난아, 무슨 까닭으로 믿는 제자는 목숨이 다하도록 세존을 따라 행하고 받들어 섬기느냐.”
존자 아난은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시고 법의 주인이시며, 법은 세존을 쫓아 나나이다. 원하옵건대 그것을 말씀하여 주소서. 저희들은 그것을 듣자온 뒤에는 그 뜻을 자세히 알 수 있겠나이다.”
부처님께서는 곧 말씀하시었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그것을 잘 기억하라. 나는 너를 위해 자세히 분별해 말하리라.”
존자 아난은 분부대로 듣고 있었다.
“아난아, 그 정경(正經)과 가영(歌詠)과 기설(記設) 때문에 믿는 제자가 목숨이 다하도록 세존을 따라 행하고 받들어 섬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난아, 혹 그는 오랫동안 이 법을 자주 들어 천 번이나 외워 익히고 마음으로 관찰하는 바는 밝게 보고 깊이 통달하여, 그것은 성인의 논(論)의 뜻과 서로 응하여 마음을 부드럽고 연하게 하여 모든 음개(陰蓋)를 없게 한다. 이른바 그 논이란 곧 시론, 계론, 정론, 혜론, 해탈론, 해탈지견론, 점손론, 불탐론, 소욕론, 지족론, 무욕론, 단론, 멸론, 연좌론, 연기론 들이니, 이러한 사문들의 논을 어렵지 않게 얻는다. 이것 때문에 믿는 제자는 목숨이 다하도록 세존을 따라 행하고 받들어 섬기는 것이다.
아난아, 이렇게 하여 번잡한 스승이 되고, 번잡한 제자가 되며, 번잡한 범행이 된다. 아난아, 어떤 것이 번잡한 스승인가. 혹 어떤 스승은 세상에 나와 꾀하고 생각하는 일이 있어, 꾀하고 생각하는 땅에 머물러, 생각하고 관찰하는 것이 잡되며 범인이지마는 말재주는 있다. 그는 일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며,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고요히 앉는다. 혹은 그런 곳에 살면서 악을 멀리 떠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기운이 왕성한 마음을 얻어 현재에서 즐겁게 산다. 그는 악을 멀리 떠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안온하고 쾌락 하게 노닌 뒤에는 제자를 데리고 돌아오면 바라문, 거사, 촌읍의 백성들이 따른다. 그는 제자를 데리고 돌아와 바라문, 거사, 촌읍의 백성들이 따른 뒤에는 곧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와 같이 번잡한 스승이 되는데, 이것은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이요, 더러운 것으로서 미래의 존재의 근본이요, 번거럽고 뜨거운 괴로움의 갚음이며, 생, 노, 병, 사의 원인의 재앙이니, 이것을 번잡한 스승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어떤 것이 번잡한 제자인가. 그 스승의 제자들은 멀리 떠나기를 배운다. 그는 일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서 살며,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고요히 앉는다. 혹은 그런 곳에 살면서 멀리 떠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기운이 왕성한 마음을 얻어 현재에서 즐겁게 산다. 그는 멀리 떠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안온하고 쾌락 하게 노닌 뒤에는 제자를 데리고 돌아오면 바라문, 거사, 촌읍의 백성들이 따른다. 그는 제자를 데리고 돌아와 바라문, 거사, 촌읍의 백성들이 따른 뒤에는 곧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번잡한 제자가 되는데 이것은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이요, 더러운 것으로서 미래의 생명의 근본이요, 번거럽고 뜨거운 괴로움의 갚음으며, 생, 노, 병, 사의 원인의 재앙이니, 이것을 번잡한 제자라 하느니라.
아난아, 어떤 것이 번잡한 범행인가. 혹 여래는 세상에 나와 무소착, 등정각, 명행성위, 선서, 세간해, 무상사, 도법어, 천인사, 불중우라 부르며, 그는 일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고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고요히 앉는다. 아난아, 여래는 무엇 때문에 여래는 일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고요히 앉는가.”
존자 아난은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시고 법의 주인이시며, 법은 세존을 쫓아 나나이다. 오직 원하옵건대 그것을 말씀하여 주소서. 저희들은 그것을 듣잡고 그 뜻을 자세히 알겠나이다.”
부처님께서는 곧 말씀하시었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그것을 잘 기억하라. 나는 너를 위해 두루 분별해 말하리라.”
존자 아난은 분부대로 듣고 있었다.
“아난아, 여래는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고자 하고, 아직 거두지 못한 것을 거두고자 하며,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고자 하기 때문에, 일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고요히 앉는 것이 아니다. 아난아, 여래는 다만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일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고요히 앉는 것이다. 첫째는 현재에서 스스로 즐겁게 살고자 함이요, 둘째는 후세에 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기 때문이다.
혹 후세에 나는 어떤 사람은 여래를 본받아 일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고요히 앉을 것이다. 아난아, 여래는 이 때문에 일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고요히 앉는 것이다.
혹은 그는 그런 곳에 살면서 악을 멀리 떠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기운이 왕성한 마음을 얻어 현재에 즐겁게 산다. 그는 악을 멀리 떠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안온하고 쾌락 하게 노닌 뒤에는 범행을 지니고 돌아오면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따른다. 그는 범행을 지니고 돌아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따르더라도 교만하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아난아, 만일 그가 움직이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여 징험을 얻으면, 나는 그에게는 장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가 네 가지 기운이 왕성한 마음을 얻어 현재에서 즐겁게 산다면 그것은 본래 꾸준히 힘써 방일함이 없이 노닐기 때문이요, 거기에 혹 실수가 있더라도 그것은 제자가 많이 모이기 때문이다.
다시 아난아, 그 스승의 제자도 일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고요히 앉는 것을 본받아 혹은 그런 곳에 살면서 악을 멀리 떠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네 가지 기운이 왕성한 마음을 얻어 현재에서 즐겁게 산다. 그는 멀리 떠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안온하고 쾌락 하게 노닌 뒤에는 범행을 지니고 돌아오면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따른다. 그는 범행을 지니고 돌아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따르면 곧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번잡한 범행이 되는데, 이것은 악해서 착하지 않은 법이요, 더러운 것으로서 미래의 존재의 근본이요, 번거럽고 뜨거운 괴로움이며, 갚음이요 생, 노, 병, 사의 원인의 재앙이니, 이것을 번잡한 범행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번잡한 스승과 번잡한 제자가 있어서 이 번잡한 범행은 가장 옳지 못하고 즐거운 것이 아니며, 사랑할 만한 것이 아니요 가장 마음으로 생각할 것이 못된다.
아난아, 그러므로 너희들은 내게 대해서 사랑할 만한 일을 행하고 원망스러운 일을 행하지 말라. 아난아, 어떤 것이 제자가 스승에 대해서 원망스러운 일을 행하고 사랑스러운 일을 행하지 않은 것인가. 만일 스승이 제자들을 위해 설법하고, 가엾이 여기고 불쌍하게 생각하며, 진리를 구하고 이익을 구하여 자비심을 낸다면, 이것은 이익을 위하고, 쾌락을 위하며, 이익의 즐거움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만일 그 제자로서 공경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아서 지혜를 세우지 않고 그 마음이 법과 다음 가는 법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바른 법을 받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어 능히 정(定)을 얻지 못하면, 이러한 제자는 스승에 대해서 원망스러운 일을 행하고 사랑할 만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이니라.
아난아, 어떤 것이 제자가 스승에 대해서 사랑할 만한 일을 행하고 원망스러운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인가. 만일 스승이 제자를 위해 설법하고, 가엾이 여기고 불쌍하게 생각하며, 진리를 구하고 이익을 구하며, 안온과 쾌락을 구해 자비심을 낸다면, 이것은 이익을 구하고 쾌락을 구하며 이익의 즐거움을 구해서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 제자가 공경하고 순종하여 지혜를 세우고, 그 마음은 법과다음 가는 법으로 나아가며, 바른 법을 받아 가지고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아서 능히 정을 얻으면, 이러한 제자는 스승에 대해서 사랑할 만한 일을 행하고 원망스러운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아난아, 너희들은 내게 대해서 사랑할 만한 일을 행하고, 원망스러운 일을 행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나는 ‘질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기와를 만드는 것과 같다.’고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아난아, 내가 말하는 것은 지극히 엄하고 바쁘며, 또 매서운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진실히 가지는 자이면 반드시 거기에 머무르게 될 것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존자 아난과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받들어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