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아함경 제56권
204. 라마경(羅摩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에 노닐으시면서 동원 녹자모 강당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오후에 고요한 자리에서 일어나 당(堂)에서 내려와 존자 아난에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이제 너와 함께 아치라바티이[阿夷羅婆提]강에 가서 목욕하려 하니 같이 가려느냐.”
존자 아난은
“예예.”
하고, 지게문 자물쇠를 가지고 여러 집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모든 비구들을 보고 말하였다.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바라문 람마카[羅摩] 집으로 가시오.”
모든 비구들은 그 말을 듣고 곧 함께 람마카 집으로 갔다.
세존께서는 존자 아난을 데리고 아치라바티이강으로 가 언덕 위에서 옷을 벗고, 곧 물에 들어가 목욕하신 뒤 도로 나와 몸을 닦고 옷을 입으시었다. 그 때에 존자 아난은 세존 뒤에 서서 부채로 세존을 부쳐 드리고 있었다.
존자 아난은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바라문 람마카 집은 극히 좋고 잘 정리되어 매우 즐거운 곳입니다. 원하옵건대 세존께서는 그를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시어 바라문 람마카 집으로 가 주소서.”
세존께서는 존자 아난을 위해 잠자코 받아 주시었다. 이에 세존께서는 존자 아난을 데리고 바라문 람마카 집으로 가시었다.
그 때에 바라문 람마카 집에서는 많은 비구들이 모여 앉아 설법하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문 밖에 서서 모든 비구들의 설법이 끝나기를 기다리시었다. 많은 비구들은 이내 설법을 마치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세존께서는 그런 줄 아시고 기침을 하시면서 문을 두드리시자 곧 바라문 람마카 집에 들어가시어 비구들 앞에서 자리를 펴고 앉아 물으셨다.
“비구들이여, 아까는 무엇을 이야기하였으며, 무슨 일로 여기 이렇게 모여 앉았는가.”
비구들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아까는 법을 연설하였사오며, 이 법을 연설하기 위해 이렇게 여기 모여 앉았나이다.”
“착하고 착하다. 비구들이 모여 앉아서는 마땅히 두 가지 일을 택하여야 하나니, 그것은 <설법>과 <침묵>이니라. 왜냐하면 나도 또한 너희들을 위하여 설법하리니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예예, 분부대로 듣겠나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여기 二종의 구(求)함이 있으니, 一은 거룩한 구함이요, 二는 거룩한 구함이 아닌 것이다. 어떤 것이 거룩한 구함이 아닌 것인가. 어떤 사람은 실로 병드는 법이면서 병드는 병을 구하고, 실로 늙는 법, 죽는 법, 근심하는 법이면서 늙는 법, 죽는 법, 근심하는 법을 구하며, 실로 더러운 법이면서 더러운 법을 구하는 것이다. 어떻게 실로 병드는 법이라 하는가. 그것은 자식과 형제들이 병드는 병이요, 코끼리, 말, 소, 염소, 노비(奴婢), 재물, 보배, 미곡들이 병드는 법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것에 물들고 집착하며, 교만스럽게 받아들이어 그 재환(災患)을 보지 못하고, 벗어나는 길을 보지 못하면서, 그것을 받아 있다. 어떤 것이 늙고 죽는 법이요 근심하는 병이며 더러운 법인가. 자식과 형제들이 늙고 죽는 법이요 근심하는 법이며 더러운 법이요 코끼리, 말, 소, 염소, 노비, 재물, 보배, 미곡들이 늙고 죽는 법이요 근심하는 법이며 더러운 법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것에 물들고 집착하며 교만스럽게 받아들이어 그 재환을 보지 못하고 벗어나는 길을 보지 못하면서 받아 있다. 그래서 그들은 병이 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얻고자 하여도 끝내 그리 될 수 없으며,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얻고자 하여도 끝내 그리 될 수 없나니, 이것을 거룩한 구함이 아닌 것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거룩한 구함인가. 어떤 사람은 곧 ‘나는 실로 병드는 법이다. 그러나 허물이 없으면서 병드는 법을 구한다. 나는 실로 늙는 법, 죽는 법, 근심하는 법, 더러운 법이다. 그러나 허물이 없으면서 늙는 법, 죽는 법, 근심하는 법, 더러운 법을 구한다. 나는 이제 병이 없이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자’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곧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리 될 수 있고,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리 될 수 없느니라.
나도 옛날 아직 정각(正覺)을 깨닫기 전에 또한 ‘나는 실로 병드는 법이다. 그러나 허물이 없으면서 병드는 법을 고한다. 나는 실로 늙는 법, 죽는 법, 근심하는 법, 더러운 법이다. 그러나 허물이 없으면서 늙는 법, 죽는 법, 근심하는 법, 더러운 법을 구한다. 나는 이제 병이 없어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자.’고 생각하였다. 나는 그 때에 나이 젊은 용자(龍子)로서 맑고 깨끗한 새까만 머리에 한창 나이는 二十九세였었고, 한없이 즐겁게 유희하고, 화려하게 장식하고,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나는 그 때에 부모님들이 울부짖었고 친척들은 좋아하지 않았지마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집을 버리어 집이 없이 도를 배우면서 몸의 청정을 보호하였고, 입과 뜻의 청정을 보호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 계의 몸을 성취한 뒤에는 병이 없는 위 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자 하여, 다시 아알라아라(阿羅羅), 카알라아마[伽羅摩]를 찾아가서 그들에게 물었다.
‘아알라아라여, 나는 너의 법 안에서 범행을 행하고자 하는데 될 수 있겠는가.’
아알라아라는 대답하였다.
‘어진이여, 나는 상관없다. 행하고자 하거든 곧 행하라.’
‘아알라아라여, 너는 어떤 법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하였는가.’
‘어진이여, 나는 일체의 식처(識處)를 지나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얻어 성취하여 노닌다. 나는 이것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하였다.’
이 때에 나는 ‘다만 아알라아라 혼자에게만 이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도 또한 이 믿음이 있다. 다만 아알라아라 혼자에게만 이 정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도 또한 이 정진이 있다. 다만 아알라아라 혼자에게만 이 슬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도 또한 이 슬기가 있다. 그런데 아알라아라는 이 법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 법을 증득하기 위하여 곧 혼자서 멀리 떠난, 비고 고요한 곳에 머물러 마음에 방일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혼자서 멀리 떠난, 비고 고요한 곳에 머물러 마음에 방일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한지 오래지 않아 그 법을 증득하게 되었다. 그 법을 증득한 뒤에 나는 다시 아알라아라의 카알라아마에게로 가서 그들에게 물었다.
‘아알라아라여, 너 이 법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하였는가. 이른바 일체의 한량이 없는 식처를 지나 무소유처를 얻어 성취하여 노니는가.’
그 이들은 내게 대답하였다.
‘어진이여, 우리는 이 법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하였다. 이른바 일체의 한량이 없는 식처를 지나 무소유처를 얻어 성취하여 노닐었다.’
아알라아라와 카알라아마는 다시 내게
‘어진이여, 이것을 우리가 이 법을 증득한 것과 같이 너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는 것이다. 어진이여, 너도 여기 와서 우리와 함께 이 대중을 거느니라.’
고 말하였다. 이것을 아알라아라와 카알라아마 스승의 경계가 나와 동등하며, 그래서 최상의 공경이요, 최상의 공양이며, 최상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이 법은 지혜로 나아가지 않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이 법을 버리고 다시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자.’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곧 이 법을 버리고 다시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한 뒤에, 윳다라라아마풋타[鬱陀羅羅摩子]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에게 물었다.
‘웃다라여, 나는 너의 법 안에서 배우고자 한다. 되겠는가.’
웃다라는 내게 대답하였다.
‘어진이여, 나는 상관없다. 너는 배우고 싶으면 배우라.’
‘웃다라여, 너는 어떤 법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하였는가.’
‘어진이여, 나는 일체의 무소유처를 지나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를 얻어 성취하여 노닌다. 어진이여, 우리 아버지 라아마도 이 법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하였다.’
이에 나도 또 ‘다만 라아마 혼자에게만 이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도 또한 이 믿음이 있다. 다만 라아마 혼자에게만 이 정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도 또한 이 정진이 있다. 다만 라아마 혼자에게만 이 슬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도 또한 이 슬기가 있다. 라아마는 이 법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하였다. 나는 무엇 대문에 이 법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하지 못하겠는가.’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 법을 증득하기 위해 곧 혼자서 멀리 떠난, 비고 고요한 곳에 머물러 마음에 방일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혼자서 멀리 떠난 비고 고요한 곳에 머물러 마음에 방일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한 지 오래지 않아 그 법을 증득하게 되었다. 그 법을 증득한 뒤에 나는 다시 웃다라라아마풋타에게로 가서 그에게 가서 물었다.
‘웃다라여, 너의 아버지는 이 법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하였는가. 이른바 일체의 무소유처를 지나 비유상비무상처를 얻어 성취하여 노니는가.’
그는 내게 대답하였다.
‘어진이여, 우리 아버지 라아마도 이 법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하였다. 이른바 일체의 무소유처를 지나 비유상비무상처를 얻어 성취하여 노닌다.’
웃다라는 다시 내게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 라아마가 이 법을 증득한 것과 같이 너도 또한 그러하며, 네가 이 법을 증득한 것과 같이 우리 아버지도 또한 그러하다. 어진이여, 너도 여기 와서 우리와 함께 이 대중을 거느니라.’
웃다라라아마풋타의 스승의 경계와 같이 나도 또한 스승과 같아서 그것을 최상의 공경이요 최상의 공양이며 최상의 기쁨이었다. 나는 또 ‘이 법은 지혜로 나아가지 않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이 법을 버리고 다시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자.’고 생각하였다. 그래서는 곧 이 법을 버리고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한 뒤에 상정산(象頂山) 남쪽에 있는 우루벨라아[鬱鞞羅] 숲의 세나아[斯那]라는 바라문 마을로 갔다. 그 땅은 아주 훌륭하여 즐길 만하여 산림은 우거지고 네란쟈라아[尼蓮禪]강의 맑은 물은 언덕에까지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곧 ‘이 땅은 아주 사랑하고 즐길 만하다. 산림은 우거지고 네란쟈라아강의 맑은 물은 언덕에까지 가득 차 있다. 만일 큰 종족의 아들로서 공부하고자 한다면 이런 곳이 좋은 것이다. 내게도 공부하기에 적당하다. 나는 이제 여기서 공부하자.’고 생각하였다. 나는 곧 풀을 가지고 보오디[菩提]나무 있는 데로 가서 그 밑에 깔고, 니시이다나를 풀 위에 펴고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나는 번뇌를 다하기까지는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려고 하였다. 과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번뇌를 다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여 곧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얻었고,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여 곧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얻었다. 그리고 내게는 앎이 생기고, 소견이 생기고, 틀림없는 도품법(道品法)이 있어,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모양을 알았느니라.
나는 처음으로 위없는 정진각(正盡覺)을 깨달은 뒤에 곧 ‘나는 누구를 위해 먼저 이 법을 설명해야 할까’고 생각하다가 다시 ‘나는 이제 저 아알라아라와 카알라아마들을 위해 먼저 설법할까’고 생각하였다. 그 때에 어떤 하늘이 허공에게 내게 말하기를 ‘큰 선인(仙人)이여, 마땅히 아소서. 아알라아라와 카알라아마 그들은 이미 목숨을 마친 지 이제 七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도 또한 내 스스로 아알라아라와 카알라아마는 이미 목숨을 마친 지 七일이 되는 줄을 알았다. 나는 또 ‘아알라아라와 카알라아마 그들은 길이 가서 이 법을 듣지 못하는구나. 만일 그들이 이 법을 들었으면 그들은 빨리 법과 마음 법을 알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또 나는 처음으로 위없는 정진각을 깨달은 뒤에 ‘나는 누구를 위해 이 법을 설명해야 할까’고 생각하다가 나는 다시 ‘나는 이제 웃다라라아마풋타를 위해 먼저 설법할까’고 생각하였다. 그 때에 하늘은 다시 허공에서 내게 ‘큰 선인이여, 마땅히 아소서. 웃다라라아마풋타는 목숨을 마친 지 二七일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나도 또한 내 스스로 웃다라라아마풋타는 목숨을 마친 지 二七일인 줄 알았다. 나는 다시 웃타라라아마풋타는 길이 가서 이 법을 듣지 못하는구나. 만일 그가 이 법을 들었더라면 그는 빨리 법과 마음 법을 알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위없는 정진각을 깨달은 뒤에 ‘나는 누구를 위해 이 법을 설명해야 할까’고 생각하다가 나는 다시 ‘옛날의 그 五 비구는 나를 위해 수고하여 내게 이익이 많았다. 내가 고행할 때에 그 五 비구는 나를 받들어 섬겼다. 나는 이제 그 五 비구를 위해 먼저 이 법을 설명해야 할까’고 생각하다가 나는 다시 ‘옛날 그 五 비구는 지금 어디 있는가’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사람의 눈보다 뛰어난 청정한 천안통(天眼通)으로서 그 五 비구들이 바알라아나시이[波羅㮈]국의 선인이 사는 녹야원(鹿野園)에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내 보오디나무 밑에서 옷을 챙기고, 바루를 가지고 바알라아나시이국의 카아시이[加尸] 서울로 갔다. 그 때에 이교도 우파카[優陀]는 멀리서 내가 오는 것을 보고 내게 말하였다.
‘어진이 고오타마여, 모든 근(根)은 청정하고 형상은 극히 묘하며, 낯의 광명은 빛나고 있습니다. 어진이 고오타마여, 당신의 스승은 누구시며, 누구를 좇아 도를 배우고, 뉘 법을 믿습니까.’
나는 그 때에 우파카를 위해 곧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나는 가장 위되고 가장 훌륭하니라.
일체의 모든 법에 집착치 않고
모든 애욕 벗어나 스스로 깨쳤나니
다시 또 그 누구를 스승이라 하겠는가.
같은 사람도 없고 나은 사람도 없다.
위없는 깨달음을 스스로 깨쳤나니
나는 여래요 또 천상, 인간 스승으로
그 힘을 성취한 것 두루 아노라.
우파카는 다시 내게 물었다.
‘어진이 고오타마여, 스스로 훌륭하다고 일컫는가.’
나는 다시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훌륭한 사람은 이러하나니
이른바 모든 번뇌 이미 다하고,
모든 나쁜 법은 다 목숨을 해치거니
우파카여, 그러므로 나는 훌륭하니라.
우파카는 다시 내게 물었다.
‘어진이 고오타마여, 어디로 가시려 하나이까.’
나는 또 게송으로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바아라아나시이에 가서
묘한 감로(甘露)의 북 두드리고
세상에서 아직 굴리지 못한
위없는 법의 바퀴 내가 굴리리.
우파카는 내게 말하였다.
‘어진이 고오타마여, 혹 이런 일도 있나이까.’
이렇게 말한 뒤에 그는 곧 사특한 길을 지나 돌아왔다. 나는 선인이 사는 곳 녹야원으로 갔다. 때에 五 비구들은 멀리서 내가 오는 것을 보고 제각기 서로 약속하고 법을 세우기를 ‘여러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저 사문 고오타마는 온다. 그는 욕심이 많고 구하는 것이 많다. 맛난 음식과 좋은 쌀밥, 보리가루, 타락, 꿀을 먹고 삼씨기름을 몸에 바른다. 지금 그는 다시 오지마는 너희들은 아예 일어나 맞이하지도 말고, 또한 경례도 말며, 미리 자리를 준비하여 앉기를 청하지도 말자. 그리고 그가 오거든 그대로 앉고 싶으면 마음대로 앉으라고 말하자.’하였다. 그 때에 나는 五 비구가 있는 곳으로 갔다. 때에 五 비구는 내게 있는 지극히 훌륭한 위덕(威德)에 어쩔 수 없어 곧 자리에서 일어나 가사와 바루를 받는 사람도 있고, 자리를 펴는 사람도 있으며, 물을 가져와 발을 씻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어찌 이처럼 마음이 굳지 못한가. 저희끼리 법을 만들고 저희끼리 어기는구나’고 생각하였다. 나는 그들 마음을 안 뒤에 그들이 편 자리에 앉았다. 때에 五 비구들은 내 성(姓)과 자(字)를 부르고 나를 <그대>라고 불렀다. 나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五 비구들이여, 나는 여래, 무소착, 정진각이다. 너희들은 나의 본래의 성과 자를 일컫지 말고, 또한 나를 그대라고 부르지 말라. 나는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여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얻었고, 나는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여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얻었다. 그래서 내게는 앎이 생기고, 소견이 생기고 틀림없는 도품법이 있어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모양을 알았느니라.’
그들은 내게 말하였다.
‘그대 고오타마여, 그대는 이전부터 그러한 행과 그러한 도의 자취와 그러한 괴로운 행으로써도 오히려 능히 사람의 법에서 뛰어나는 지극히 거룩한 앎과 소견에 들어가지 못했거늘, 하물며 욕심이 많고 구하는 것이 많아 맛난 음식과 좋은 쌀밥, 보리가루, 타락, 꿀을 먹으며 삼씨기름을 몸에 바르는 오늘에 있어서이겠는가.’
나는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五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이전에 내가 이와 같이 모든 근(根)이 청정하고 광명이 빛나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때에 五 비구들은 내게 대답하였다.
‘이전에는 그대의 모든 근이 청정하고 광명이 빛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대 고오타마여, 지금은 모든 근이 청정하고, 형색이 지극히 아름다우며, 얼굴에 광명이 빛나는 것을 본다.’
나는 그 때에 곧 그들에게 말하였다.
‘五 비구여, 마땅히 알라. 도를 닦는 모든 사람으로 배워서는 안 될 두 가지 치우친 행이 있으니, 一은 욕심과 향락의 하천한 업으로서 범인의 행에 집착하는 것이요, 二는 스스로 번거로워하고 스스로 괴로워하여 성현의 법이 아닌 것으로서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五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치우친 행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취하면 밝음을 이루고, 지혜를 이루며, 정(定)을 성취하여 자재를 얻고,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중도란 이른바 八정도(定道)이니, 바른 소견과 내지 바른 정으로서 이것을 八이라 하느니라.
내 마음을 따라 五 비구를 가르쳐 두 사람을 교화하면 세 사람이 밥을 빌고, 세 사람이 밥을 가지고 오면 여섯 사람이 먹기에 넉넉하였고 세 사람을 교화하면 두 사람이 밥을 빌고 두 사람이 밥을 가지고 오면 여섯 사람이 먹기에 넉넉하였다. 나는 이렇게 저들을 가르치고 이렇게 저들을 교화시켜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여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얻고,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여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얻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알음이 생기고, 소견이 생기고, 틀림없는 도품법이 있어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모양을 알았느니라.’
나는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五 비구들이여, 五욕의 공덕이 있어 사랑할 만하고, 즐길 만하며, 마음으로 생각할 만하여, 욕심과 잘 어울린다. 어떤 것이 五인가. 눈으로 빛깔을 알고, 귀로 소리를 알며, 코로 냄새를 알고, 혀로 맛을 알며, 몸으로 부딪침을 안다. 五 비구여, 어리석은 범부는 많이 듣지 못하고, 착한 벗을 만나지 못하며, 거룩한 법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법을 모시지 못한다. 그는 부딪쳐 물들고 탐하고 집착하며 교만스럽게 받아들여 그 재앙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길을 보지 못하면서 그것을 받아. 마땅히 알라. 그는 모진 악마를 따르고, 스스로 모진 악마가 되며, 모진 악마의 손에 떨어지고, 악마의 그물에 걸리고, 악마의 먹이에 얽히며, 악마의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한다.
五 비구여, 마치 들 사슴이 올가미에 걸리는 것과 같나니 마땅히 알라. 그는 사냥꾼을 따르고 스스로사냥꾼이 되며, 사냥꾼의 손에 떨어지고, 사냥꾼의 그물에 걸리고, 사냥꾼의 그물에 걸리어 사냥꾼이 와도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와 같이 五 비구여, 어리석은 범부는 많이 듣지 못하고 착한 벗을 만나지 못하며, 거룩한 법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법을 모시지 못한다. 그 五욕의 공덕에 부딪쳐 물들고 그것을 탐하고 집착하여 교만스럽게 받아들이어 그 재앙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길을 보지 못하면서 그것을 받아 쓴다. 마땅히 알라. 그는 모진 악마를 따르고, 스스로 모진 악마가 되며, 모진 악마의 손에 떨어지고, 악마의 그물에 걸리고, 악마의 먹이에 얽히며 악마의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한다.
五 비구여,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착한 벗을 만나고, 거룩한 법을 알며, 또 거룩한 법을 모신다. 그는 이 五욕의 공덕에 부딪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으며, 탐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또한 교만스럽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아서 그 재앙을 보고 그것을 벗어나는 길을 보아 그것을 취해 쓰지 않는다. 마땅히 알라. 그는 모진 악마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모진 악마가 되지 않으며 악마의 손에 떨어지지 않고 악마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악마의 먹이에 얽히지 않아 곧 악마의 올가미를 벗어난다.
五 비구여, 마치 들 사슴이 올가미를 벗어나는 것과 같나니 마땅히 알라. 그는 사냥꾼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사냥꾼이 되지도 않으며, 사냥꾼의 손에 떨어지지도 않고 사냥꾼의 그물에 걸리지도 않아, 사냥꾼이 오면 곧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 이와 같이 五 비구여,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착한 벗을 만나고, 거룩한 법을 알며, 또 거룩한 법을 모신다. 그는 五욕의 공덕에 부딪치지도 않고, 또한 교만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그 재앙을 보고 그것을 벗어나는 길을 보아 그것을 취해 쓰지 않는다. 마땅히 알라. 그는 모진 악마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악마가 되지 않으며, 악마의 손에 떨어지지도 않으며, 악마의 그물에 걸리지도 않으며, 악마의 올가미에 걸리지도 않아 곧 그 올가미를 벗어나게 되느니라.
五 비구여, 만일 때로 여래가 세상에 나오면 무소착, 등정각, 명행성위, 선서, 세간해, 무상사, 도법어, 천인사, 불중우라 호한다. 그는 더러운 五개심(盖心)과 내지 슬기의 병을 끊고, 욕심을 끊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떠나 제 四선(禪)을 성취하여 노닌다. 그는 이와 같이 정(定)한 마음이 맑고 깨끗해 더러움도 없고 번거로움도 없으며, 부드럽고 연하여 잘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얻게 되고, 번뇌가 다한 지혜의 신통을 닦아 익혀 몸으로 증득한다. 그래서 그는 이 괴로움의 참모양을 알고, 이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이 괴로움의 멸함을 알며, 이 괴로움을 멸하는 길의 참모양을 안다. 또 이 번뇌의 참모양을 알고, 이 번뇌의 원인을 알며, 이 번뇌의 멸함을 알고, 이 번뇌의 멸하는 길의 참모양을 안다. 그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 욕심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생명의 번뇌와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해탈한 뒤에는 곧 해탈한 줄을 알아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모양을 아느니라.
그는 그때에는 자재로이 다니고 자재로이 머무르며, 자재로이 앉고 자재로이 눕는다. 무슨 까닭인가. 그는 스스로 한량이 없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다한 것을 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그는 자재로이 다니고 자재로이 머무르며, 자재로이 앉고 자재로이 눕는다. 五 비구여, 마치 일이 없고 사람이 없는 곳에 저 들 사슴이 있어 자재로이 다니고 자재로이 머무르며, 자재로이 엎드리고 자재로이 눕는 것과 같다. 무슨 까닭인가. 그 들 사슴은 사냥꾼의 경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자재로이 다니고 자재로이 머무르며, 자재로이 엎드리고 자재로이 눕느니라. 이와 같이 五 비구여, 비구는 번뇌가 다하여 번뇌가 없게 되어, 마음이 해탈하고 슬기가 해탈하여,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하여 성취하여 노닌다. 그래서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 모양을 안다. 그는 그 때에는 자재로이 다니고 자재로이 머무르며, 자재로이 앉고 자재로이 눕는다. 무슨 까닭인가. 그는 스스로 한량이 없는 악하고 착하지 않는 법이 다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그는 자재로이 다니고 자재로이 머무르며, 자재로이 앉고 자재로이 눕느니라. 五 비구여, 이것을 남음이 없는 해탈이라 하고, 이것을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이라 하며, 이것을 늙음, 죽음, 근심, 더러움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존자 아난과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205. 오하분결경(五下分結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에 노닐으시면서 승림 급고독원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일찍 五 하분결(下分結)을 말하였는데 너희들은 그것을 받아 가지느냐.”
모든 비구들은 잠자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일찍 五하분결을 말하였는데 너희들은 그것을 받아 가지느냐.”
세존께서는 이렇게 거듭 모든 비구들에게 되풀이 해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모든 비구들은 여전히 잠자코 대답이 없었다.
그 때에 존자 만동자(鬘童子)가 대중 가운데 있었다. 이에 존자 만동자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가사 한 자락을 벗어 메고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일찍 五하분결을 말씀하셨나이다. 저는 그것을 받아 가지나이다.”
“만동자여, 나는 일찍 五하분결을 말하였다. 네가 그것을 받아 가지는가.”
“세존께서는 처음 五하분결을 말씀하셨나이다. 제가 그것을 받아 가지나이다. 그것은 탐욕[貪], 성냄[恚], 몸에 대한 그릇된 소견[身見], 그릇된 계에의 집착[戒取], 의심(疑心)이옵니다. 세존께서는 제 五하분결을 말씀하셨고 제가 그것을 받아 가지나이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만동자여, 너는 어떻게 내가 말한 五하분결을 받아 가지는가. 너는 누구에게서 내가 말한 五하분결을 받아 가지는가. 만동자여, 많은 이교도(異敎徒)들이 와서 어린 동자로서 너를 꾸짖고 비유하며 힐책하지 않았는가. 만동자여, 어린애는 어리고 부드러워 반드시 누워, 마음에는 욕심이란 생각이 없거늘 하물며 욕심의 얽매임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성질은 번뇌이기 때문에 짐짓 욕심의 번뇌라고 말한다. 만동자여, 어린애는 어리고 부드러워 반듯이 누워 중생이란 생각이 없거늘 하물며 성냄의 얽매임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성질은 성냄의 번뇌이기 때문에 짐짓 성냄의 번뇌라고 말한다. 만동자여, 어린애는 어리고 부드러워 반듯이 누워 중생이란 생각이 없거늘 하물며 몸이 있다는 소견의 얽매임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성질은 번뇌이기 때문에 짐짓 몸이 있다는 소견의 번뇌라고 말한다. 만동자여, 어린애는 어리고 부드러워 반듯이 누워, 계라는 생각이 없거늘 하물며 계에 집착하는 마음의 얽매임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성질은 번뇌이기 때문에 짐짓 계에 집착하는 번뇌라고 말한다. 만동자여, 어린애는 어리고 부드러워 반듯이 누워, 법이란 생각이 없거늘 하물며 의심의 얽매임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성질은 번뇌이기 때문에 짐짓 의심의 번뇌라고 말한다. 만동자여, 많은 이교도들이 와서 어린 동자로서 너를 꾸짖고 비유하며 힐책하지 않았는가.”
이에 존자 만동자는 세존에게 직접 나무람을 받고 마음에 근심을 품고, 머리를 떨어뜨려 잠자코 말이 없었으나, 무언가 물을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만동자를 직접 나무라신 뒤에 잠자코 계시었다.
그 때에 존자 아난은 세존 뒤에 서서 부채를 들고 세존께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이에 존자 아난은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지금이 바로 그 때이옵니다. 선서시여, 지금이 바로 그 때이옵니다. 만일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을 위해 五하분결을 말씀하시면 모든 비구들은 그 말씀을 듣고 잘 받아 가질 것이옵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존자 아난은,
“예예.”
하고 분부를 받아 듣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아난아, 혹 어떤 사람은 욕심에 얽매어 욕심이 생긴 뒤에는 버림[捨]의 참모양을 알지 못한다. 그는 버림의 참모양을 알지 못한 뒤에는 욕심은 갈수록 불꽃처럼 왕성하여 그것을 제어해 버리지 못하나니, 이것이 하분결이니라. 아난아, 혹 어떤 사람은 성냄에 얽매여 성내는 마음이 생긴 뒤에는 버림의 참 모양을 알지 못한다. 그는 버림의 참모양을 알지 못한 뒤에는 성냄은 갈수록 불꽃처럼 왕성하여 그것을 제어해 버리지 못하나니 이것이 하분결이니라. 아난아, 혹 어떤 사람은 내 몸이 있다는 소견에 얽매여 내 몸이 있다는 소견이 생긴 뒤에는 버림의 참 모양을 알지 못한다. 그는 버림의 참모양을 알지 못한 뒤에는 내 몸이 있다는 소견은 갈수록 불꽃처럼 왕성하여 그것을 제어해 버리지 못하나니 이것이 하분결이니라. 아난아, 혹 어떤 사람은 그릇된 계에의 집착에 얽매여 계에 집착하는 마음이 생긴 뒤에는 버림의 참 모양을 알지 못한다. 그는 버림의 참모양을 알지 못한 뒤에는 그릇된 계에의 집착은 갈수록 불꽃처럼 왕성하여 그것을 제어해 버리지 못하나니 이것이 하분결이니라. 아난아, 혹 어떤 사람은 의심에 얽매여 의심이 생긴 뒤에는 버림의 참 모양을 알지 못한다. 그는 버림의 참모양을 알지 못한 뒤에는 의심은 갈수록 불꽃처럼 왕성하여 그것을 제어해 버리지 못하나니 이것이 하분결이니라.”
아난아, 만일 도(道)를 의지하고 자취를 의지하면 五하분결을 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 도를 의지하지 않고 이 자취를 의지하지 않고서 五하분결을 끊으려 한다면 그것은 끝내 그리 될 수 없느니라. 아난아, 마치 어떤 사람이 나뭇심[樹精]을 구하기 위해 도끼를 가지고 숲 속에 들어간다. 그는 나무가 뿌리와 줄기, 가지, 잎과 열매로 된 것만 보고, 그 뿌리와 줄기는 베지 않고 그 심[精]을 얻어 돌아오려 한다면, 그것은 끝내 그리 될 수 없는 것과 같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도를 의지하고 자취를 의지하면 五하분결을 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 도를 의지하지 않고 이 자취를 의지하지 않고서 五하분결을 끊으려 한다면 그것은 끝내 그리 될 수 없느니라.
아난아, 만일 도를 의지하고 자취를 의지하면 五하분결을 끊는다. 그가 이 도를 의지하고 이 자취를 의지하여 五하분결을 끊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리 될 수 있나니, 마치 어떤 사람이 나뭇심을 구하기 위해 도끼를 가지고 숲속에 들어간다. 그는 나무가 뿌리와 줄기, 가지, 잎과 열매로 된 것을 보고, 그 뿌리와 줄기를 베어 심을 얻어 돌아오려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리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도를 의지하고 자취를 의지하면 五하분결을 끊는다. 그가 이 도를 의지하고 이 자취를 의지하여 五하분결을 끊으려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리 될 수 있느니라.
아난아, 어떤 도를 의지하고 어떤 자취를 의지하여 五하분결을 끊는가. 아난아, 혹 어떤 사람은 욕심에 얽매이지 않아, 만일 욕심의 얽매임이 생기면 그는 곧 버림의 참모양을 안다. 그가 버림의 참모양을 안 뒤에는 그 욕심의 얽매임은 곧 멸한다. 아난아, 혹 어떤 사람은 성냄에 얽매이지 않아, 만일 성냄의 얽매임이 생기면 그는 곧 버림의 참모양을 안 뒤에는 성냄의 얽매임은 곧 멸한다. 아난아, 혹 어떤 사람은 내 몸이 있다는 소견에 얽매이지 않아, 만일 내 몸이 있다는 소견이 생기면 그는 곧 버림의 참모양을 안다. 그가 버림의 참모양을 알면 그 내 몸이 있다는 소견의 얽매임은 멸한다. 아난아, 혹 어떤 사람은 그릇된 계에의 집착에의 집착에 얽매이지 않아, 만일 그릇된 계에의 집착의 얽맴이 생기면 그는 곧 버림의 참모양을 안다. 그가 버림의 참모양을 안 뒤에는 그 그릇된 계에의 집착을 곧 멸한다. 아난아, 혹 어떤 사람은 의심에 얽매이지 않아, 만일 의심의 얽맴이 생기면 그는 곧 버림의 참모양을 안다. 그가 버림의 참모양을 안 뒤에는 그 의심의 얽매임을 곧 멸한다. 아난아, 이 도를 의지하고 이 자취를 의지하여 五하분결을 끊느니라.
아난아, 마치 강가아[恒伽江]와 같다. 그 물이 언덕에까지 가서 넘치는데, 혹 어떤 사람이 와서 저쪽 언덕에 일이 있어 건너려고 할 때에 그는 ‘이 강가아의 물은 언덕에까지 차서 넘치는데 나는 저쪽 언덕에 일이 있어 건너가려고 한다. 그러나 내 몸에는 힘이 없어 이제 나는 저쪽 언덕에까지 안온하게 떠 갈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아난아, 마땅히 알라. 그 사람은 힘이 없다. 이와 같이 아난아, 혹 어떤 사람이 깨달음, 멸(滅), 열반으로 가는데 그 마음은 거기로 향하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으며, 해탈에 머무르지도 않는다면 아난아,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저 병든 사람이 힘이 없는 것과 같느니라.
아난아, 마치 강가아와 같다. 그 물이 언덕에까지 가서 넘치는데, 혹 어떤 사람이 와서 저쪽 언덕에 일이 있어 건너가려고 할 때에 그는 ‘이 강가아의 물은 언덕에까지 차서 넘치는데 나는 저쪽 언덕에 일이 있어 건너려고 한다. 그러고 이제 내 몸에는 힘이 있어 나를 저쪽 언덕에까지 떠 가게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난아, 마땅히 알라. 그 사람은 힘이 있다. 이와 같이 아난아, 혹 어떤 사람이 깨달음, 멸, 열반으로 가는데, 그 마음은 거기로 향하고 청정하며 해탈에 머무른다면 아난아,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저 힘있는 사람과 같느니라.
아난아, 또 마치 산과 물이 매우 깊고 지극히 넓으며, 긴 물결은 빠르고 급해 떠내려가는 것이 많은데, 거기는 배도 없고 또 다리도 없을 때에 혹 어떤 사람이 와서 저쪽 언덕에 일이 있어 곧 건너가려고 한다. 그는 건너가려고 하다가 곧 ‘지금 여기는 산과 물은 매우 깊고 지극히 넓으며, 긴 물결은 빠르고 급해 떠내려가는 것이 많은데, 여기는 배도 없고 또 다리도 없어 건너갈 수가 없다. 어떤 방편으로 나는 안온하게 저쪽 언덕에 건너갈 수 있을까’고 생각하다가 ‘나는 이제 이쪽 언덕에서 물과 나무를 주어 모아 묶어서 떼배를 만들어 그것을 타고 안온하게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자’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아난아, 혹 어떤 비구는 염리(厭離)를 반연하고, 염리를 의지하며, 염리에 머물러 몸의 악행을 그치어 쉬고, 마음이 욕계의 악을 떠나는 정(定)에 들어감으로서 욕심을 떠나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떠나, 머트러운 생각이 있고 세밀한 생각이 있어 욕계의 악을 떠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初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닌다.
그는 이 경계(境界)를 의지하여 그것의 흥하고 쇠하는 것을 관찰하고 깨닫는다. 그가 이 경계를 의지하여 그것의 흥하고 쇠하는 것을 관찰하고 깨달은 뒤에는 거기에 머물러 반드시 번뇌가 다하게 된다. 비록 거기 머물러서 번뇌가 다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위로 올라가 그치고 쉬는 경계를 얻는다. 어떻게 위로 올라가서 그치고 쉬는 경계를 얻는가. 그는 머트러운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이미 쉬고 안으로 고요하여, 한 마음이 되어 머트러운 생각도 없고 세밀한 생각도 없으며 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 二선(禪)을 성취하여 노닌다.
그는 이 경계를 의지하여 그것의 흥하고 쇠하는 것을 관찰하고 깨닫는다. 그가 이 경계를 의지하여 그것의 흥하고 쇠하는 것을 관찰하고 깨달은 뒤에는 거기에 머물러 반드시 번뇌가 다하게 된다. 비록 거기 머물러서 번뇌가 다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위로 올라가 그치고 쉬는 경계를 얻는다. 어떻게 위로 올라가 그치고 쉬는 경계를 얻는가. 그는 기쁨의 욕심을 떠나 모든 것을 버리고 구함이 없이 노닐며, 바른 지혜로서 몸에 즐거움을 깨닫는다. 이른바 성인이 말씀하신 거룩한 모든 것의 버림과 바른 생각과 의식(意識)의 즐거움과 공(空)이 있는 제 三선(禪)을 성취하여 노닌다. 그는 이 경계를 의지하여 그것의 흥하고 쇠하는 것을 관찰하고 깨닫는다. 그가 이 경계를 의지하여 그것의 흥하고 쇠하는 것을 관찰하고 깨달은 뒤에는 거기에 머물러 반드시 번뇌가 다하게 된다. 비록 거기 머물러서 번뇌가 다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위로 올라가 그치고 쉬는 경계를 얻는다. 어떻게 위로 올라가 그치고 쉬는 경계를 얻는가. 그는 즐거움이 멸하고, 괴로움도 멸하고, 기쁨과 근심은 본래 이미 멸하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서, 즐거움의 버림과 공덕의 생각과 청정이 있는 제 四선(禪)을 성취하여 노닌다.
그는 이 경계를 의지하여 그것의 흥하고 쇠하는 것을 관찰하고 깨닫는다. 그가 이 경계를 의지하여 그것의 흥하고 쇠하는 것을 관찰하고 깨달은 뒤에는 거기에 머물러 반드시 번뇌가 다하게 된다. 비록 거기 머물러서 번뇌가 다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위로 올라가 그치고 쉬는 경계를 얻는다. 어떻게 위로 올라가 그치고 쉬는 경계를 얻는가. 그는 일체의 색(色)이라는 생각을 지나고, 걸림이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약간의 생각도 생각하지 않아서, 한량이 없는 허공인, 이 한량이 없는 허공 경계를 성취하여 노닌다.
그는 이 경계를 의지하여 그것의 흥하고 쇠하는 것을 관찰하고 깨닫는다. 그가 이 경계를 의지하여 그것의 흥하고 쇠하는 것을 관찰하고 깨달은 뒤에는 거기에 머물러 반드시 번뇌가 다하게 된다. 비록 거기 머물러서 번뇌가 다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위로 올라가 그치고 쉬는 경계를 얻는다. 어떻게 위로 올라가 그치고 쉬는 경계를 얻는가. 그는 일체의 한량이 없는 허공 경계를 지내고, 한량이 없는 식(識)인 이 한량이 없는 식의 경계를 성취하여 노닌다.
그는 이 경계를 의지하여 그것의 흥하고 쇠하는 것을 관찰하고 깨닫는다. 그가 이 경계를 의지하여 그것의 흥하고 쇠하는 것을 관찰하고 깨달은 뒤에는 거기에 머물러 반드시 번뇌가 다하게 된다. 비록 거기 머물러서 번뇌가 다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위로 올라가 그치고 쉬는 경계를 얻는다. 어떻게 위로 올라가 그치고 쉬는 경계를 얻는가. 그는 일체의 한량이 없는 식의 경계를 지내고, 무소유(無所有)인 무소유의 경계를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만일 즐겁고 혹은 괴로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깨달으면, 그는 이 깨달음이 항상됨이 없음을 관(觀)하고, 흥하고 쇠함을 관하며, 욕심이 없음을 관하고, 멸(滅)함을 관하며, 끊음을 관하고, 버림을 관한다. 그는 이렇게 이 깨달음의 항상됨이 없음을 관하고, 흥하고 쇠함을 관하며, 욕심이 없음을 관하고, 멸함을 관하며, 끊음을 고나하고, 버림을 관한 뒤에는 그는 곧 이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은 뒤에는 곧 두려워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곧 반열반을 얻는다. 그래서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모양을 아느니라.
마치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큰 파초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도끼를 가지고 그 파초를 베어 조각을 내되, 혹은 열 조각을 내고, 혹은 백 조각을 낸다. 혹은 열 조각을 내고 혹은 백 조각을 낸 뒤에는 그 잎사귀 잎사귀를 헤쳐 보아도 그 마디를 보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그 속심[實]이겠느냐. 아난아, 이와 같이 비구가 만일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깨달음이 있다면, 그는 이 깨달음의 항상됨이 없음을 관하고, 흥하고 쇠함을 관하며, 욕심이 없음을 관하고 멸함을 관하며, 끊음을 관하고 버림을 관한다. 그는 이와 같이 이 깨달음의 항상됨이 없음을 관하고, 흥하고 쇠함을 관하며, 욕심이 없음을 관하고 멸함을 관하며, 끊음을 관하고 버림을 고나한 뒤에는 그는 곧 이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은 뒤에는 곧 두려워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곧 반열반을 얻는다. 그래서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모양을 아느니라.”
이에 존자 아난은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특별하시나이다.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의지할 곳을 의지하고 의지할 곳을 세워, 번뇌를 떠날 것을 말씀하시고, 번뇌를 지나갈 것을 말씀하셨나이다. 그런데 모든 비구들은 이른바 위없는 마지막의 지극함을 빨리 얻지 못하나이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시었다.
“그러하다, 아난아. 그러하다 아난아.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특별하다. 나는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의지할 곳을 의지하고, 의지할 곳을 세워 번뇌를 떠날 것을 말하고, 번뇌를 지나갈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모든 비구들은 이른바 위없는 마지막 지극함을 빨리 얻지 못한다. 무슨 까닭인가. 사람에게는 낫고 못함이 있기 때문이니, 사람에게 낫고 못함이 있기 때문에 도를 닦는 데에 곧 정묘롭고 머트러움이 있고, 도를 닦는 데에 정묘롭고 머트러움이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낫고 못함이 있다. 아난아, 그러므로 나는 사람에게는 낫고 못함이 있다고 말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존자 아난과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206. 심예경(心穢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에 노닐으시면서 승림 급고독원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만일 비구, 비구니로서 마음속의 五예(穢)를 풀지 못하면, 이것을 비구, 비구니의 반드시 물러나는 법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마음속의 五예를 뽑지 못하는가. 혹 어떤 비구는 세존을 의심하여 망설이면서 마음을 열지 못하고, 마음을 풀지 못하며,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세존을 의심하여 망설이면서 마음을 열지 못하고, 마음을 풀지 못하며,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면, 이것을 제 一의 마음의 더러움을 뽑지 못한 것이라 하나니, 곧 세존에 대해서 이니라. 이와 같이 법(法)과 계(戒)와 교(敎)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며, 만일 모든 범행자들이 세존의 칭찬을 받을 때에 다른 비구들은 이 범행자들을 나무라고 업신여기며, 건드리고 침해하면서 마음을 열지 못하고, 마음을 풀지 못하며,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면, 이것을 제 五의 마음의 더러움을 뽑지 못한 것이라 하나니, 곧 범행에 대해서이니라.
어떻게 마음속의 五박을 풀지 못하는가. 혹 어떤 비구는 그 몸에 있어서 물듦을 떠나지 못하고, 탐욕을 떠나지 못하며, 애정을 떠나지 못하고, 목마름을 떠나지 못한다. 만일 그 몸에 있어서 물듦을 떠나지 못하고, 탐욕을 떠나지 못하며, 애정을 떠나지 못하고, 목마름을 떠나지 못하면, 그 마음은 나아가지 못하고, 편안하지도 못하며, 머무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여 스스로 꾀를 써서 고요히 앉기를 끊는다. 만일 그 마음이 나아가지 못하고, 편안하지 못하며, 머무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여 스스로 꾀를 써서 고요히 앉기를 끊으면, 이것을 제 一의 마음의 결박을 풀지 못하는 것이라 하나니, 곧 몸에 있어서이니라.
어떤 비구는 그 몸에 있어서 물듦을 떠나지 못하고, 탐욕을 떠나지 못하며, 애정을 떠나지 못하고, 목마름을 떠나지 못한다. 만일 그 몸에 있어서 물듦을 떠나지 못하고, 탐욕을 떠나지 못하며, 애정을 떠나지 못하고, 목마름을 떠나지 못하면, 그 마음은 나아가지 못하고, 편안하지도 못하며, 머무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여 스스로 꾀를 써서 고요히 앉기를 끊는다. 만일 그 마음이 나아가지 못하고, 편안하지 못하며, 머무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여 스스로 꾀를 써서 고요히 앉기를 끊으면, 이것을 제 二의 마음의 결박을 풀지 못하는 것이라 하나니, 곧 욕심에 있어서이니라.
또 어떤 비구는 사문이 말하는 바가 성인의 도리와 서로 맞고 부드럽고 연하여 의개(疑蓋)가 없는 것, 곧 계(戒), 정(定), 슬기, 해탈, 해탈지견, 손해, 모이지 않음, 욕심이 적음, 만족할 줄 앎, 끊음, 욕심이 없음, 멸함, 고요히 앉음, 연기(緣起)를 말하지마는, 그 비구는 이 사문이 말하는 곳으로 마음이 나아가지 못하고, 편안하지도 못하여, 머무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여 스스로 꾀를 써서 고요히 앉기를 끊는다. 만일 그 마음이 나아가지도 못하고, 편안하지도 못하며, 머무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여 스스로 꾀를 써서 고요히 앉기를 끊으면, 이것은 제 三의 마음의 결박을 풀지 못한 것이라 하나니, 곧 설(設)에 있어서이니라.
또 어떤 비구는 자주자주 속인들과 함께 모여 희락질하고, 교만하여 공부하지 않는다. 만일 자주자주 속인들과 함께 모여 희락질하고 교만하여 공부하지 않으면, 그 마음은 나아가지 못하고, 편안하지도 못하며, 머무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여 스스로 꾀를 써서 고요히 앉기를 끊는다. 만일 그 마음이 나아가지 못하고, 편안하지 못하며, 머무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여 스스로 꾀를 써서 고요히 앉기를 끊으면, 이것을 제 四의 마음의 결박을 풀지 못하는 것이라 하나니, 곧 모임에 있어서이니라.
또 어떤 비구는 조금 소득이 있다 하여 그 중간에 머물러 다시 위로 올라가기를 구하지 않는다. 만일 조금 소득이 있다 하여 그 중간에 머물러 다시 위로 올라가지 않으면, 그 마음은 나아가지 못하고, 편안하지도 못하며, 머무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여 스스로 꾀를 써서 고요히 앉기를 끊는다. 만일 그 마음이 나아가지 못하고, 편안하지 못하며, 머무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여 스스로 꾀를 써서 고요히 앉기를 끊으면, 이것을 제 五의 마음의 결박을 풀지 못하는 것이라 하나니, 곧 위로 올라감에 있어서이니라.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 비구니로서 그 마음속의 五예를 뽑지 못하고, 그 마음속의 五박을 풀지 못하면, 이것을 비구, 비구니의 반드시 물러나는 법이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 비구니로서 그 마음속의 五예를 잘 뽑고, 그 마음속의 五박을 잘 풀면, 이것을 비구, 비구니의 맑고 깨끗한 법이라 한다. 어떻게 그 마음속의 五예를 잘 뽑는가. 혹 어떤 비구는 세존을 의심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아, 마음을 열고 마음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하다. 만일 어떤 비구가 세존을 의심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아,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하면, 이것을 제 一의 마음속의 더러움을 잘 뽑는 것이라 하나니, 세존에 대해서이니라. 이와 같이 법과 계와 교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며, 만일 어떤 범행자가 세존의 칭찬을 받을 때 다른 비구들도 그 범행자를 나무라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으며, 건드리지 않고 침해하지 않고서 마음을 열고 마음이 풀리며 마음이 편안하면 이것을 제 五의 마음속의 더러움을 잘 뽑는 것이라 하나니, 곧 범행에 대해서이니라.
어떻게 마음속의 五박을 푸는가. 혹 어떤 비구는 몸에 있어서 물듦을 떠나고, 탐욕을 떠나며, 애정을 떠나고, 목마름을 떠난다. 만일 몸에 있어서 물듦을 떠나고, 탐욕을 떠나며, 애정을 떠나고, 목마름을 떠나면, 그 마음은 나아가고 편안하며, 머무르고 이해하여, 스스로 노력하여 고요히 앉기를 끊는다. 만일 그 마음이 나아가고 편안하며, 머무르고 이해하여, 스스로 노력하여 고요히 앉기를 끊으면, 이것을 제 一의 마음속의 결박을 푸는 것이라 하나니, 곧 몸에 있어서이니라.
다시 어떤 비구는 욕심에 있어 물듦을 떠나고, 탐욕을 떠나며, 애정을 떠나고, 목마름을 떠난다. 만일 욕심에 있어서 물듦을 떠나고, 탐욕을 떠나고, 애정을 떠나고, 목마름을 떠나면 그 마음은 나아가고 편안하며, 머무르고 이해하여, 스스로 노력하여 고요히 앉기를 끊는다. 만일 그 마음이 나아가고 편안하며, 머무르고 이해하여, 스스로 노력하여 고요히 앉기를 끊으면, 이것을 제 二의 마음속의 결박을 푸는 것이라 하나니, 욕심에 있어서이니라.
어떤 비구는 사문이 말하는 바가 성인의 도리와 서로 맞고 부드럽고 연하여 의개가 없는 것, 곧 계, 정, 슬기, 해탈, 해탈지견, 손해, 모이지 않음, 욕심이 적음, 만족할 줄 앎, 끊음, 욕심이 없음, 멸함, 고요히 앉음, 연기를 말할 대에 그 비구는 이 사문이 말하는 곳으로 그 마음이 나아가고 편안하며, 머무르고, 이해하고, 스스로 노력하여 고요히 앉기를 끊는다. 만일 그 마음이 나아가고 편안하며, 머무르고 이해하여, 스스로 노력하여 고요히 앉기를 끊으면, 이것을 제 三의 마음속의 결박을 푸는 것이라 하나니, 설(設)에 있어서이니라.
어떤 비구는 자주자주 속인들과 함께 모이지 않고, 희락질하지도 않으며, 교만하지도 않고, 공부한다. 만일 자주자주 속인들과 함께 모이지 않고, 희락질하지도 않으며, 교만하지도 않고 공부하면, 그 마음은 나아가고 편안하며, 머무르고 이해하여, 스스로 노력하여 고요히 앉기를 끊는다. 만일 그 마음이 나아가고 편안하며, 머무르고 이해하여, 스스로 노력하여 고요히 앉기를 끊으면, 이것을 제 四의 마음속의 결박을 푸는 것이라 하나니, 곧 모이지 않음에 있어서이니라.
어떤 비구는 조그만 소득이 있다 하여 그 중간에서 머무르지 않고 다시 위로 올라가기를 구한다. 만일 조그만 소득이 있다 하여 그 중간에서 머무르지 않고 다시 위로 올라가기를 구하면, 그 마음은 나아가고 편안하며, 머무르고 이해하여, 스스로 노력하여 고요히 앉기를 끊는다. 만일 그 마음이 나아가고 편안하며, 머무르고 이해하여, 스스로 노력하여 고요히 앉기를 끊으면, 이것을 제 五의 마음속의 결박을 푸는 것이라 하나니, 곧 위로 올라감에 있어서이니라.
만일 비구, 비구니로서 그 마음속의 五예를 잘 뽑고, 또 그 마음속의 五박을 잘 풀면, 이것을 비구, 비구니의 청정법이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들이 이 十지(支)에 머무른 뒤에는 다시 五법(法)을 닦는다. 어떤 것이 五인가. 욕심의 정(定)을 닦아 단여의족(斷如意足)을 성취하여 떠남, 욕심이 없음, 멸함, 버림을 의지하여 비품(非品)으로 나아가고, 정진(精進)의 정, 마음의 정, 생각의 정, 참고 견디는 정을 닦아 단여의족을 성취하여 떠남, 욕심이 없음, 멸함, 버림을 의지하여 비품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이 참고 견디는 등의 十五법을 성취하고, 스스로 믿음을 성취하면 반드시 알고, 반드시 복, 반드시 바로 다 깨달아 감로문(甘露門)에 이르러 열반에 가까이 머무르리니, 나는 이것을 열반에 이르지 못할 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닭이 달걀을 열 개나 혹 열 두 개를 낳아 때를 따라 안고 때를 따라 덥히며, 때를 따라 보살피는 것과 같나니, 닭이 혹 함부로 놀면, 그 중에서 혹은 부리로 쪼고 발로 밟아 부수나니, 거기서 스스로 안온하게 나오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제 一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가 이 감인 등 十五법을 스스로 받아 성취하면 그는 반드시 보고, 반드시 바로 다 깨달아, 반드시 감로문에 이르러 열반에 가까이 머무리니, 나는 열반에 이르지 못할 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